[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⑦ 갓난 아이 품에 안고 목격한 마리우폴의 최후

칠흑같이 어두운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함께 지냈다. 해가 뜨면 음식과 물을 누가 먼저 먹을 것인지를 두고 다퉜다. 해가 지면,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견뎠다. 변기가 없어, 모두가 양동이 하나에 볼일을 봤다. 생후 4개월 된 아이의 엄마, 스물네 살 안나 자이체바(Anna Zaitseva) 씨는 양초 위에 분유를 데워 아이에게 먹였다.

지난 2월 25일부터 65일간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지낸 안나 자이체바 씨가 4월 30일 구조된 후 친동생 닉 오사드척(Nick Osadchuck) 씨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 안나 자이체바
지난 2월 25일부터 65일간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지낸 안나 자이체바 씨가 4월 30일 구조된 후 친동생 닉 오사드척(Nick Osadchuck) 씨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 안나 자이체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째인 2월 25일, 안나 씨의 가족은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로 피신했다. 안나 씨는 그곳에서 식량 부족과 추위를 견디며 65일 동안 지냈다. 4월 30일 안나 씨는 아기와 함께 제철소를 빠져나왔다.

<단비뉴스>는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와 온라인 메시지를 통해 지난 5월 9일부터 30일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안나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독립 미디어 플랫폼 유크레이너(Ukrainer)의 활동가 보다나 카피차(Bohdana Kapitsa) 씨, 그리고 우크라이나 미디어 지원센터(UA Media Support Center) 등이 인터뷰를 도왔다. 인터뷰에서 안나 씨는 제철소에 들어간 날부터 탈출한 날까지 겪은 참혹한 전쟁을 생생하게 전했다.

5월 18일 안나 자이체바 씨가 줌(ZOOM) 화상회의를 통해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유제니
5월 18일 안나 자이체바 씨가 줌(ZOOM) 화상회의를 통해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유제니

대피소 첫날, 그리고 남편과의 이별

안나 씨와 남편 키릴 자이체브(Kirill Zaitsev) 씨는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나고 자랐다. 안나 씨는 마리우폴의 한 고등학교에서 불어 강사로 일했다. 키릴 씨는 직업 군인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5월 결혼식을 올렸다. 2021년 10월 28일, 아들 스브야토슬라브 자이체브(Svyatolav Zaitsev)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난 직후, 키릴 씨는 제대를 결심하고 아조우스탈 제철소(Azovastal Steel Plant)에 직장을 얻었다. 두 사람은 안나 씨의 부모님과 마리우폴에서 방 3칸짜리 아파트에서 단란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월 24일 새벽, 안나 씨는 하늘이 갈라지는 폭발음을 들었다. 마리우폴은 친러시아 성향의 돈바스 지역과 2014년 러시아에 병합된 크림반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는 개전 초기부터 마리우폴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공격을 가했다.

전직 군인이었던 남편 키릴 씨가 전쟁이 시작됐다며 피난길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가족 모두 폴란드로 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마리우폴을 빠져나가려는 인파로 도로가 마비됐고, 이어지는 폭격으로 그 도로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신, 키릴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근무하게 된 아조우스탈 제철소의 지하 벙커로 가족을 대피시켰다.

안나 씨는 아기에게 먹일 분유, 기저귀 몇 장, 비상식량, 옷, 담요 등을 챙겼다. 키우던 고양이 세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를 위해 사료를 넉넉히 채운 후, 문을 잠그고 나왔다. 안나 씨는 인터뷰 도중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새까맣게 탄 사진을 보여주며 반려동물의 생사를 걱정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있는데, 고작 동물 걱정을 하는 것이 죄스러우면서도 가족처럼 여기던 고양이와 강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안나 씨는 말했다.

지하 벙커는 지하 5~6층 깊이로 어둡고 습했다. 수백 명의 피난민은 50~70명씩 무리 지어 각자 구역을 나눠 생활했다. 안나 씨의 구역에는 75명이 함께 지냈다. 안나 씨의 아기를 비롯해 3살, 4살, 7살 어린이도 있었다. 벙커 내부에는 간이침대와 헌 옷, 담요, 그리고 물과 비상식량이 어느 정도 구비돼 있었다.

벙커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던 2월 28일, 스물두 살의 남편 키릴 씨는 참전을 결심했다. 아조우스탈 제철소에 기지를 둔 아조우 연대에 입대하기로 했다. 남편은 2014년 돈바스 전쟁에 참전한 전직 보병으로 대피소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며 안나 씨를 설득했다.

“나는 남편을 계속 말렸어요. 3~4일 정도만 피해 있으면 다 끝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끔찍한 일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거예요.”

이후 제철소에서 지낸 두 달 동안 안나 씨는 남편을 딱 두 번 만났다. 각각 5분 동안이었다.

입대 후 남편 키릴 씨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내 안나 씨에게 보냈다. ⓒ 안나 자이체바
입대 후 남편 키릴 씨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내 안나 씨에게 보냈다. ⓒ 안나 자이체바

배고픈 아이들, 다투는 어른들

“깊은 바다 밑 잠수함 속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어둡고 답답한 그 공간에는 공포와 고통이 도사렸죠. 수많은 사람 틈에서 숨이 막혔고,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들었어요. 아이만은 아프지 않게 옷과 담요로 그를 최대한 두껍게 감싸곤 했어요.”

지하 벙커에서 보낸 두 달 동안, 추위와 싸웠다. 헌 옷과 담요 등을 있는 대로 껴입었다고 안나 씨는 말했다. 발전기를 작동시켜야 전기를 쓸 수 있는데, 폭격의 충격으로 발전기가 작동을 멈췄다. 그럴 때면 촛불을 켜 아기에게 줄 우유와 물을 데웠다. 어둡고 습한 지하 벙커에서는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었다. 75명의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인 탓에 공기가 탁했고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여기저기서 폐를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안나 씨는 회상했다.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안나 씨가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남편에게 보내려고 찍은 사진이다. ⓒ 안나 자이체바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안나 씨가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남편에게 보내려고 찍은 사진이다. ⓒ 안나 자이체바

피난민들은 대피소에 올 때 각자 비상식량을 챙겨왔다. 대피소 생활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음식을 숨기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음식을 한데 모아 똑같이 나누자고 제안했고, 어떤 이는 나누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제철소를 지키는 우크라이나 군의 아조우 연대는 지하 벙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깡통 음식, 비스킷, 물 따위의 식량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마저 넉넉하지 않아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파스타 생면을 맹물에 불려 먹는 경우가 많았다.

대피소 사람들은 음식을 가져가는 순서를 정했다. 어린이, 부상자나 기저 질환자, 노약자 등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몇 살을 노인으로 정할지, 얼마나 아픈 사람을 약자로 정할지에 대해 다툼이 잦았다고 안나 씨는 말했다. 벙커에 대피한 사람들은 고립과 고통에 지쳐갔고,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으로 싸우는 일도 생겨났다.

“러시아에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큰 충돌이 생기기도 했어요. 두렵고 지쳐서 그랬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 같이 살아남아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우리는 이내 그걸 깨닫곤 했어요.”

아이들은 군인들이 보내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리할 수가 없으니, 파스타 면을 맹물에 불려 먹었는데, 그것도 아이들은 먹지 않으려 했다. 배고픈 아이들은 벙커에서 먹는 상상을 하며 놀았다. 점원이나 손님을 연기하며 카페와 식당 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케이크, 초콜릿, 콜라, 과자 이야기를 매일같이 했다.

지하 벙커에서 매일 아침, 그리고 잠들기 전에 안나 씨는 일기를 썼다.  ⓒ 안나 자이체바
지하 벙커에서 매일 아침, 그리고 잠들기 전에 안나 씨는 일기를 썼다. ⓒ 안나 자이체바

빗물로 씻고, 양동이에 볼일 본 시간들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물이 부족해 겨울에는 눈을 녹여 썼고, 3~4월에는 빗물을 들여왔다. 손이나 오염된 부분만 조금씩 닦아내야 했다. 안나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따뜻한 물이 더 많이 필요했다. 아기의 대소변을 닦아줘야 했고 분유를 데워 줘야 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군은 식량과 함께 아기 기저귀도 갖다줬지만, 크기가 맞지 않아 두 개를 이어 쓰거나 잘라 썼다. 그마저도 부족했다. 서너 시간에 한번 갈아줘야 할 기저귀를 12시간 이상 그대로 두는 일이 많았다.

파이프 고장으로 대피소 내 변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양동이 몇 개를 찾아 화장실 안에 들여놨다. 대피소 사람들은 청소, 요리 등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화장실을 치웠다. 배설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지상 1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안나 씨는 그 계단이 끝도 없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것을 치우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불쾌한지는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언제나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건 아주 작은 일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속했죠.”

안나 씨가 아들 스브야토슬라브를 안아 보이고 있다. 제철소에서 살아남은 6개월 된 아기다. 안나 씨는 아기가 별다른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 유제니
안나 씨가 아들 스브야토슬라브를 안아 보이고 있다. 제철소에서 살아남은 6개월 된 아기다. 안나 씨는 아기가 별다른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 유제니

포로로 잡힌 남편, 마지막 대화들

전선에 있던 남편 키릴 씨는 가능할 때마다 안나 씨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로 사진을 보냈다. 4월의 어느 날, 키릴 씨는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약품도 구할 수도 없어 다리가 썩어가고 있다고 키릴 씨는 안나 씨에게 말했다. 지팡이나 목발 따위의 보조기구를 구해 겨우 걷고 있으며, 부상병들이 모여 있는 벙커 내 한 구역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던 날은 결혼 1주년 기념일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 아이를 위해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꼭 행복하게 살라’고 남편이 말했어요. 자신이 죽고 모든 것이 끝나면, 군에서 보상금이 어느 정도 나올 거라고도 했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어요.”

작년 5월, 안나 씨와 키릴 씨가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 스브야토슬라브가 10월 28일 태어났다. ⓒ 안나 자이체바
작년 5월, 안나 씨와 키릴 씨가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 스브야토슬라브가 10월 28일 태어났다. ⓒ 안나 자이체바

5월 18일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안나 씨는 이틀 전인 16일을 끝으로 남편과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안나 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자주 쉬었고, 인터뷰 내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튿날인 19일, 마리우폴 제철소에 고립돼있던 아조우 연대 군인들이 러시아에 투항했다. 이들은 돈바스 지역의 병원과 교도소 등으로 옮겨졌다.

22일 다시 인터뷰한 안나 씨의 표정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남편이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소식을 접했고, 미디어를 통해 남편이 살아있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도네츠크주 친러 성향의 방송사 <MVD DNR>은 러시아군에 잡힌 우크라이나 포로들의 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했다. 목발을 짚은 남편 키릴 씨의 짧은 인터뷰가 영상에 담겨 있었다. 러시아군은 키릴 씨에게 다쳤는지 물었고 그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또,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철수할 것을 지시 받았느냐”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안나 씨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투항병 포로 맞교환을 논의 중이라며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포로 맞교환을 러시아에 제안했지만, 러시아 측은 아조우 연대를 나치 범죄자로 규명하고 교환 대상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5월 18일 친러 성향의 방송 MVD DNR이 보도한 영상에서 남편 키릴 씨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MVD DNR(мвдднр) 유튜브 캡처
5월 18일 친러 성향의 방송 MVD DNR이 보도한 영상에서 남편 키릴 씨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MVD DNR(мвдднр) 유튜브 캡처

여과 수용소에서의 폭력적 알몸 수색과 심문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투항하기 전인 4월 30일 안나 씨는 두 달 만에 햇빛을 봤다. 곧이어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됐다. 러시아가 점령한 마리우폴을 빠져나오려면 러시아의 여과 수용소(filtration camp) 검문 과정을 거쳐야 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심문하는 과정이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안나 씨의 성 씨를 확인한 후 취조실로 끌고 갔다.

그들은 안나 씨의 열 손가락 지문을 전부 채취했고, 휴대전화를 뺏어 사진과 파일을 전부 삭제했다. 이메일과 소셜미디어(SNS) 등의 정보도 수집했다. 직업, 출신 지역, 가족 및 친척 관계에 대한 취조가 이뤄졌고, 남편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물었다. 가방 속을 뒤져 날카로운 물건이나 목걸이나 반지 따위의 장신구도 전부 뺏었다.

검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안나 씨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팔뚝, 겨드랑이, 허벅지, 성기, 항문 등을 살피며 나치 관련 문신 등을 확인했다. 같은 장갑을 이용해 수백 명에 달하는 여성의 몸을 수색했다.

“수치스럽고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저는 운이 좋았어요. 14살짜리 아이와 22살의 한 여성은 여과 수용소를 빠져나오지 못했거든요. 그들은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죠.”

추억 속 고향, 앞으로 살아야할 삶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지금, 자신이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은 기자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라고 안나 씨는 말했다. 참혹한 실상을 세계에 알려 이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야,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나 씨는 믿고 있다.

안나 씨가 살던 아파트가 폭격으로 인해 불탔다. 안나 씨의 이웃이 사진을 찍어 전해줬다. ⓒ 안나 자이체바
안나 씨가 살던 아파트가 폭격으로 인해 불탔다. 안나 씨의 이웃이 사진을 찍어 전해줬다. ⓒ 안나 자이체바

“미국의 국회의원, 상원의원과 만났어요. 일본, 프랑스, 미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기자들도 최대한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도 부탁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많은 물자와 무기 지원이 절실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안나 씨가 기억하는 마리우폴은 희망의 도시였다. 유럽 최대 규모로 11㎢의 면적을 자랑하는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많은 이의 생계를 보장하는 일터를 제공했다. 마리우폴은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었고, 수많은 학교와 공원, 문화, 예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에는 아이들이 붐볐고, 관광 도시로 거듭나면서 외국인도 많아지고 있었다.

안나 씨는 그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이제 도시는 잿더미가 됐다. 남편과 재회하고, 아이를 함께 안아 기르며, 고양이와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는 생활을 안나 씨가 다시 재건할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021년 10월, 아들 스브야토슬라브가 태어나기 직전에 찍은 안나 씨와 키릴 씨의 사진. ⓒ 안나 자이체바
2021년 10월, 아들 스브야토슬라브가 태어나기 직전에 찍은 안나 씨와 키릴 씨의 사진. ⓒ 안나 자이체바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몇몇 언론이 한국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2~3일 정도 현지를 살펴 보도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그들과 그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⑥ 사진가 장진영이 목격한 우크라이나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