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⑥ 사진가 장진영이 목격한 우크라이나

지난달 14일, 여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람이 있다. 이름은 장진영, 나이는 42살, 직업은 프리랜서 사진가. 프리랜서 사진가 장진영 씨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 언론인 가운데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취재했다.

나중에 한국 외교부 허락을 받은 기자들이 2~3일씩 현지 일부 지역을 취재한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현지 체류 기간과 취재지역은 장 씨의 경우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전쟁 발발 9일 뒤인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Przemysl)을 거쳐 우크라이나로 들어간 뒤, 보름 동안 전쟁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장 씨는 자신이 목격한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 세상과 소통하길 원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직후, 여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단비뉴스>는 지난 4월 22일, 장 씨를 만났다. 그가 직접 목격한 전쟁과 피난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독 한국 언론인의 전쟁 취재가 어렵게 된 사정과 이에 대한 의견도 들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사진들도 함께 싣는다.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한 군인이 피난을 가는 부인과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한 군인이 피난을 가는 부인과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12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피난을 가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배웅하는 남자 친구의 이마에 입맞추고 있다. ⓒ 장진영
3월 12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피난을 가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배웅하는 남자 친구의 이마에 입맞추고 있다. ⓒ 장진영
3월 13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남편이 배웅 나온 부인을 안고 있다. ⓒ 장진영
3월 13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남편이 배웅 나온 부인을 안고 있다. ⓒ 장진영
3월 14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피난 가는 딸이 차창 밖의 아빠와 전화 통화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14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피난 가는 딸이 차창 밖의 아빠와 전화 통화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 장진영

프리랜서 사진가가 우크라이나로 향한 이유

장진영 씨는 6년차 프리랜서 사진가다. 2002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철학을 전공했다. 학회 동아리에서 공부하는 한편, 사진 동아리에서도 활동했다. 이후에는 구로공단의 육가공업체 등 여러 직장에서 일했다. 30대 후반에 이르러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처음 접했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결혼 등 행사 사진을 찍거나, 식당 홍보용 사진을 촬영했다.

생계를 위해 다시 잡은 카메라를 빌어 그는 격렬한 현실을 다시 만났다. 국내 여러 시위 현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019년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였다. 직접 홍콩을 찾아가, 시위의 최전선에서 현장을 기록했다. 당시 그가 찍은 사진은 시사주간지 <시사IN>, 그리고 사진 잡지 <보스토크>(VOSTOK)에 보도됐다. 홍콩 시위 취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건을 기록해 전달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꼈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켜봤다. BBC, CNN, 로이터 등 해외 언론, 그리고 현지인들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현장 사진을 접했다. 성에 차지 않았다. 남의 시선을 거쳐 남이 찍은 사진만으로는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국, 유럽의 주류 언론이 보도하는 사실이 ‘누구의 사실’인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직접 현장에 가기로 했다.

지난 2월 말, 출국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무단입국’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국 여권법 제17조 1항을 보면, ‘천재지변·전쟁·내란·폭동·테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국외 위난상황으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신체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이 특정 국가나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기간을 정하여 해당 국가나 지역에서의 여권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방문·체류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어떤 나라를 ‘여권 사용 제한 지역’으로 지정하여 한국인의 입국을 정부가 금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조항은 2007년 샘물교회 선교사 피랍 살해사건 이후 신설됐다. 그런데 한국 외교부는 지난 2월 13일 우크라이나를 ‘여행 금지 지역’으로 지정했다. 한국인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된 것이다.

이 법을 위반하면 1000만 원 이하 벌금, 1년 이하 징역의 형벌을 받을 수 있다. 전과 기록도 남는다. 장 씨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직접 촬영한 현장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먼저 조언을 구하러 선배를 찾아갔다. 2019년 홍콩 시위 취재현장에서 만난 한국인 포토저널리스트였다. 여러 사정으로 실명을 밝힐 수 없는 그 선배는 중동 분쟁 취재 경험이 있는 전문 사진 기자이기도 하다. 선배의 조언을 따라 장 씨는 짐을 쌌다. 카메라 3대, 광각·표준·망원렌즈, 플래시, 노트북, 위아래 겉옷, 속옷 각 두 세트, 양말 3개, 얇은 패딩, 외투, 장갑, 여권, 기자증, 그리고 선배가 준 방탄조끼와 헬멧을 챙겼다. 우크라이나로 떠나는 길에 짊어질 짐의 무게는 30킬로그램(kg) 정도였다.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의 선로 뒤에서 시민들이 음식과 군용 물자를 옮기고 있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의 선로 뒤에서 시민들이 음식과 군용 물자를 옮기고 있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군인과 시민들이 다른 지역에서 배송된 위장막과 군용물자를 옮기고 있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군인과 시민들이 다른 지역에서 배송된 위장막과 군용물자를 옮기고 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 도착한 피난민들이 양손에 짐을 들고 선로를 건너고 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 도착한 피난민들이 양손에 짐을 들고 선로를 건너고 있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한 난민이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공습을 대비해 전기를 차단한 상태여서 역사 내부가 매우 어둡다. ⓒ 장진영
3월 8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에서 한 난민이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공습을 대비해 전기를 차단한 상태여서 역사 내부가 매우 어둡다. ⓒ 장진영
3월 1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 장진영
3월 1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중앙역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 장진영

국경도시 프셰미실에서 키이우로

3월 2일 오후 6시, 장 씨는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경유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Warszawa)에 도착했다. 바르샤바 서부 기차역에는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그는 접경도시 프셰미실(Przemysl)행 기차를 탔다. 전쟁 현장을 취재하러 세계 곳곳에서 달려온 언론인들, 그리고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은 우크라이나 피난민들로 프셰미실은 북적였다.

이후 사흘 동안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Kyiv)로 가는 방법을 알아봤다. 프셰미실역의 전광판은 꺼져 있었다. 언제 기차가 오고, 어디서 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프셰미실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는 프랑스인 의용군을 만났다. 프랑스인 군인은 장 씨에게 르비우(Lviv)행 기차 정보를 알려줬다. 르비우는 키이우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였다.

우여곡절 끝에 올라탄 기차에는 세계 곳곳에서 참전한 의용군, 우크라이나인 자원입대자 등이 타고 있었다. 르비우로 가는 도중 몇 차례에 걸쳐 우크라이나 군인이 기차에 올라타 승객의 여권을 확인했다. 6시간 만에 장 씨는 르비우에 도착했다. 3월 5일 밤 10시였다. 그제야 그는 우크라이나에 왔음을 실감했다.

그는 역에서 밤을 새웠다. 당시 키이우 외곽의 부차(Bucha)와 이르핀(Irpin)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키이우가 봉쇄될 것이라 보고 가급적 빨리 키이우에 가고자 했다. 다음날인 3월 6일 오후 3시 르비우에서 키이우행 기차를 탔다. 기차는 약 550킬로미터(km)의 거리를 10시간 동안 이동했다.

3월 5일, 폴란드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크라이나인 부부가 생각에 빠져있다. ⓒ 장진영
3월 5일, 폴란드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크라이나인 부부가 생각에 빠져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 로비에서 한 부부가 기차를 기다리며 담요를 나눠 덮은 채로 쪽잠을 자고 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 로비에서 한 부부가 기차를 기다리며 담요를 나눠 덮은 채로 쪽잠을 자고 있다. ⓒ 장진영
3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버스터미널에서 우크라이나를 떠나온 아이가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 장진영
3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버스터미널에서 우크라이나를 떠나온 아이가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 장진영

적막했던 수도 키이우

3월 6일 새벽 1시, 마침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역에 도착했다. 키이우에는 오후 10시부터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래도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장 씨는 적막한 거리를 2킬로미터(km) 정도 걸었다. 중간에 군인에게 붙잡혔지만 여권과 기자증을 보여주고 풀려났다. 겨우 도착한 숙소의 문은 닫혀있었다. 다시 길 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는 새로운 숙소를 찾았다. 키이우는 르비우보다 숙소 찾기가 수월했다. 많은 시민들이 키이우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인구 300만 명의 도시 키이우에서 약 200만 명의 시민이 피난을 갔다.

그는 숙소를 구하고 마트에서 빵, 햄 등을 사서 식량을 비축했다. 그리고 시내로 나갔다. 키이우 시내는 적막이 흘렀다. 도시가 텅 빈 채로 멈춰 있었다. 왕복 6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서로 충돌한 그대로 서 있었다. 단축 영업을 하는 마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 심지어 식당과 은행 문도 닫혀 있었다. 대중교통은 전혀 다니지 않았고, 아주 드물게 택시가 돌아다녔다. 키이우에서 장 씨는 최전선에 접근할 길을 찾으려 했다. 키이우 외곽의 이르핀(Irpin)과 부차(Bucha)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가려면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허가증(Joint Forces Operation accreditation)이 필요했다. 그 허가증을 받으려면, 소속된 매체 편집장이 우크라이나 국방부에 취재 협조를 요청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장 씨는 소속 매체가 없는 프리랜서였다. 예전에 미국 국립언론사진작가협회(National Press Photographers Association)에서 발급받은 기자증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터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물론 해외의 프리랜서 기자들은 이런 관문을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다. 해외 유력 언론은 현지를 잘 알고 있거나, 전쟁과 재난 현장을 취재한 이력이 있는 프리랜서들과 수시로 계약을 맺어 고용한다. 전쟁 취재에 필수적인 현지 당국과의 협력도 본사가 잘 처리해준다. 한국 언론계에는 그런 관행이 없다. 장 씨는 온전히 혼자 힘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했다.

현실의 벽을 마주한 그는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키이우 시내와 키이우역 주위를 배회했다. 공습경보가 가끔 울렸지만, 기차는 계속 다녔다. 눈발이 날리는 역에는 도시 방어를 위한 위장막, 생감자를 비롯한 구호물자 등이 도착하고 있었다. 군인과 자원봉사자들이 줄지어 짐을 옮겼다. 키이우 역은 생이별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 군인이 기차 창문 너머의 가족과 슬픈 표정으로 인사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방공호와 병원의 문도 두드렸다. 그러나 매번 거절당했다. 허가증이 없는 그에게 돌아온 답은 “No Photo”였다. 그에게는 우크라이나에서 취재를 도와주는 현지 동행인 ‘픽서’(Fixer)도 없었다. 픽서를 고용하려면 하루 수백만 원을 지불해야 했다.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온 그에게 픽서를 구할 여력은 없었다.

시내를 돌아다닐 때마다 경찰과 군인들이 계속 그를 잡았다. 키이우 외곽에서는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키이우 안에서도 여러 시설을 파괴하는 첩자를 잡겠다고 혈안이었다. 군인과 경찰에게 잡힐 때마다 기자증과 여권, 그리고 카메라 사진을 다 보여줬다. 시내 중심부에서는 400미터(m)마다 군인에게 잡혔다. 지나가는 시민이 그를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그가 도모할 수 있는 취재에는 한계가 있었다.

3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터미널에서 폴란드인 자원봉사자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두르고,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음식을 건네고 있다. ⓒ 장진영
3월 2일,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터미널에서 폴란드인 자원봉사자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두르고,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음식을 건네고 있다. ⓒ 장진영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인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로 가는 기차에서 군인들이 여권을 검사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인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로 가는 기차에서 군인들이 여권을 검사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 앞에서 인접국가 폴란드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피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6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 앞에서 인접국가 폴란드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피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장진영

키이우와는 다른 분위기의 르비우

3월 13일 오후, 그는 다시 기차를 타고 르비우로 돌아왔다. 르비우는 키이우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키이우 등을 탈출한 피난민이 지나는 중간 기착지인 르비우에는 묘한 활기마저 느껴졌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으로 인해) 부산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장 씨는 말했다.

르비우 시청 앞 미디어센터는 해외 언론인들로 붐볐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번 전쟁을 대처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일 주요 전쟁 소식과 성명 등을 미디어센터를 통해 공표했다. 각 나라에서 온 기자들은 미디어센터의 카페와 회의실에서 취재내용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취재를 준비했다. 그곳에 한국 기자들은 없었다.

3월 17일, 우크라이나 야보리우 군사기지에서 러시아의 공습으로 사망한 군인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다. ⓒ 장진영
3월 17일, 우크라이나 야보리우 군사기지에서 러시아의 공습으로 사망한 군인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다. ⓒ 장진영
3월 15일,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르비우주(州) 스타리치 지역에서 사망한 군인의 유가족이 가슴과 머리에 손을 얹고 슬퍼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15일,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르비우주(州) 스타리치 지역에서 사망한 군인의 유가족이 가슴과 머리에 손을 얹고 슬퍼하고 있다. ⓒ 장진영
3월 15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의 리차키브 공동묘지에서 군인들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15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의 리차키브 공동묘지에서 군인들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 장진영
3월17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의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 참여한 한 군인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사진이 걸린 성당 벽을 바라보고 있다. ⓒ 장진영
3월17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의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 참여한 한 군인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사진이 걸린 성당 벽을 바라보고 있다. ⓒ 장진영

키이우와는 달리 르비우에서는 허락을 구해 현장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쟁에 맞서고 있었다. 르비우의 시민들은 도서관에 모여 군용 위장막을 만들었다. 민간인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벌이기도 했다. 성당의 성직자들조차 방어책을 도모하고 있었다. 공습에 대비해 성상을 보호재로 감싸고, 성당의 창문을 모래주머니로 촘촘히 막아두었다.

르비우에서도 이별은 계속됐다. 르비우 기차역은 군인과 그의 가족, 연인, 친구들이 헤어지는 공간이었다. 살아서 헤어지는 사람들 뒤에는 죽어서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 씨는 러시아의 공습으로 희생된 군인들의 장례식도 찾아갔다. 성당에서는 희생자를 떠나보내는 장례미사가 진행됐다.

이후 7일 동안 그는 르비우 시내에 머물렀다. 오직 혼자의 몸으로, 어떤 집단이나 조직의 보호도 없이, 극도의 긴장 속에서 현장을 기록하던 그의 심신도 마침내 지쳐 버렸다. 그는 15일간의 우크라이나 체류를 마치고 3월 20일 르비우에서 폴란드의 프셰미실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3월 17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도서관에서 어느 시민이 천 조각으로 군용 위장막을 만들고 있다. ⓒ 장진영
3월 17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도서관에서 어느 시민이 천 조각으로 군용 위장막을 만들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군사훈련센터에서 민간인 지원자들이 기초군사훈련에 참여해 총기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군사훈련센터에서 민간인 지원자들이 기초군사훈련에 참여해 총기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군사훈련센터에서 민간인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훈련에 참가한 시민들은 총기 사용법과 응급처치법 등을 배운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 군사훈련센터에서 민간인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훈련에 참가한 시민들은 총기 사용법과 응급처치법 등을 배운다. ⓒ 장진영

현장의 저널리스트들을 만나며 느낀 부러움

보름 동안, 장 씨는 동아시아 출신 언론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가 만난 동아시아 언론인은 서너 명 정도였다. 매그넘 소속 사진가인 대만계 치엔치창(Chien-chi Chang), 일본인 포토 저널리스트 고 나카무라(Go Nakamura), 그리고 유키 이와무라(Yuki Iwamura) 등이다. 고 나카무라는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베테랑이다. 그와 동행하는 유키 이와무라는 미국을 근거지로 삼아 프리랜서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한 상태였다. 취재 경험의 차이가 컸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 같이 다녔다.

장 씨는 그들이 부러웠다. “함께 다니면, 선배가 여러 조언을 많이 해주겠죠. 제 경험이 일천한데, 전쟁 취재의 경험이 풍부한 선배 언론인이 조언하거나 가르쳐주면 참 좋을 텐데, 생각했죠. 우크라이나에 그런 한국 언론인은 없었어요. 조언해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저에게는 없었고 일본인 사진가에게는 있었어요.”

프리랜서 사진가 장진영 씨가 지난 4월 22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보름간의 우크라이나 취재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 정승현
프리랜서 사진가 장진영 씨가 지난 4월 22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보름간의 우크라이나 취재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 정승현
장진영 씨는 지난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를 거쳐 키이우로 이동했다. ⓒ 김은송
장진영 씨는 지난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에서 우크라이나 르비우를 거쳐 키이우로 이동했다. ⓒ 김은송

그는 현지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고 했다. 힘들다고 토로할 상대조차 곁에 없었다. 프리랜서 언론인들끼리 여러 정보를 주고받는 국제적 네트워크에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 상황을 무릅쓰고 15일 동안 우크라이나를 취재했지만, “나는 짧게 있다가 돌아온 것”이라고 장 씨는 말했다. 일본인 프리랜서를 비롯하여, 세계 각 나라에서 우크라이나로 달려온 언론인들이 지금도 전쟁의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 전쟁전문기자 파울라 브론슈타인(Paula Bronstein)도 있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 등 세계의 전쟁과 분쟁 현장을 보도해왔다. 장 씨가 르비우로 돌아올 때 그녀는 키이우로 들어갔다. 그렇게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다른 나라 언론인들과 달리, 이제 장 씨는 여권법 제17조 1항 위반 혐의와 싸우고 있다.

국내 여권법의 독소조항

대한민국 헌법 제14조를 보면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에 비해 여권법 제17조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여권 사용을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헌법에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와 법률에 명시된 여권 사용의 제한이 상충하는 것이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어떨까. 일본의 경우 우크라이나 지역에 ‘피난 권고’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일본인의 우크라이나 입국 연기를 권고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 강제력이 없다. 일본 언론인들의 취재 활동도 한국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일본의 유력 신문과 방송은 우크라이나 현지에 기자를 파견하거나, 프리랜서 기자와 계약을 맺어 전쟁 초기부터 다양한 보도를 내놓고 있다. 특히 <TBS>(Tokyo Broadcasting System)는 러시아의 침공 직전부터 특파원과 전쟁 전문 저널리스트들을 우크라이나 현지에 파견해, 다각적이고 시의성 있는 전쟁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인터뷰 끝 무렵, 장 씨는 “앞으로 전쟁 현장을 취재하게 될, 나와 비슷한 입장에 놓일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선배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후배들을 위해 전쟁 취재의 방법과 경로를 잘 닦아 놓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장 씨는 경찰 조사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이 법적으로 처벌받을 것인지는 장 씨에게 그닥 중요하지 않다. 한국 외교부의 일방적인 ‘여권 사용 제한’으로 언론 취재의 자유가 침해받는 현실을 공론화하고, 이를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한 여성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한 여성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어느 할머니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18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어느 할머니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장진영
3월 20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폴란드 프셰미실로 가는 기차에 탄 아기가 창밖을 보고 있다. ⓒ 장진영
3월 20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폴란드 프셰미실로 가는 기차에 탄 아기가 창밖을 보고 있다. ⓒ 장진영
3월 5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대기중인 프셰미실행 기차 안에서 어린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 장진영
3월 5일 우크라이나 르비우역에서 대기중인 프셰미실행 기차 안에서 어린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 장진영
3월 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의 전차 선로 위에 시민들이 세운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다. 방어벽에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러시아군은 꺼져라.’ ⓒ 장진영
3월 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의 전차 선로 위에 시민들이 세운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다. 방어벽에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러시아군은 꺼져라.’ ⓒ 장진영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몇몇 언론이 한국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2~3일 정도 현지를 살펴 보도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그들과 그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