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원전과 송전탑 강행 공권력에 ‘나무 심기’로 맞선 남녀노소

지난 1월 농민 이치우(74)씨가 ‘송전탑 건설 중단’을 외치며 분신해 숨진 경남 밀양에 17일 저녁 1200여 명의 남녀노소가 모여 ‘원전 없는 세상’을 외쳤다.

이날 밀양 영남루 앞 야외공연장에는 오후 4시부터 대형버스와 승합차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속속 도착했다. 어린이책 시민연대, 초록교육연대, 녹색당, 진보신당 등의 단체참가자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온 개인 등 각양각색의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드문드문 빗방울이 내리는 흐린 날씨와 쌀쌀한 바람에도 야외공연장의 열기는 점점 높아졌다.

▲ ‘탈핵 희망버스’행사에 참가한 밀양 어린이들이 '핵 없는 세상'을 바라는 팻말을 들고있다. ⓒ 강태영

'송전탑 건설 반대' 외치며 전국에서 1200명 모여

오후 7시, ‘이치우 열사 정신 계승, 핵발전소 반대, 송전탑 반대’라는 구호와 함께 행사가 시작됐다. 어린이 문화동아리인 ‘백창우와 굴렁쇠 아이들’이 “노노노 핵발전소~”로 시작되는 노래를 힘차게 불렀고, ‘이치우 열사 분신대책위원회’ 소속의 주민합창단이 ‘송전탑 아리랑’ 등을 구성지게 불렀다. 고리 영광 월성 울진 등의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서울 등으로 보내려 밀양에 69개의 송전탑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업의 터전인 땅을 헐값에 수용 당하게 된 주민들은 지난 7년의 투쟁이 눈앞에 스치는 듯, 비장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유기농가수 사이’, ‘요술당나귀’의 노래와 밀양 ‘공간사랑’의 연극도 이어졌다. 주민 등 참가자들은 흥겨운 노래가 나올 땐 덩실덩실 춤사위로, 우스갯소리엔 폭소와 박수로 호응했다.

해직기자들이 만드는 대안매체 ‘뉴스타파’가 이날 행사를 위해 특별 제작한 ‘송전탑 건설과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자살’편도 방영됐다. 국가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할 생각은 않고 원전을 무분별하게 증설하면서 송전탑 건설로 주민들의 생업을 위협하고, 주민들의 저항을 ‘보상을 노린 꼼수’로 몰아붙이는 정부와 한전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송전탑 예정지인 밀양의 4개면 주민대책위원장들이 연설에 나섰다. 부북면 이남우(70) 위원장은 “정부와 한전은 왜 ‘국책사업’ ‘공익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이 나라 국민을 함부로 내동댕이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긴장됐던 연설 분위기는 주민들이 위원장들에게 “오빠” “위원장 잘생겼다” 등의 농담을 던지면서 왁자하게 풀어지기도 했다.

▲ 탈핵 희망버스 행사장에서 마을 주민합창단이 '송전탑 아리랑' 을 부르고 있다. ⓒ 강신우

송전탑 건설부지에 '희망의 나무' 심는 등 다양한 행사 이어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야외공연장 주변엔 밀양문학회 등이 내건 추모시 현수막이 펄럭였고 주민들은 멀리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막걸리, 파전, 두부김치, 어묵탕 등의 먹거리를 연신 장만했다.

참가자들은 마지막으로 ‘원전 없는 세상’의 희망을 담은 200여 개의 풍등을 날리고 주민들이 마련한 숙소로 이동했다.

다음날인 18일 오전에는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입구에 200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129번 송전탑 건설부지까지 행진했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다시 ‘희망의 나무’를 심기 위해서다.

일행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김준한 신부(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는 “한전과 물리적으로 싸우고 부딪히기보다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건 울창했던 산을 원상복구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라며 “우리는 이 나무를 지켜 송전탑 자리가 다시 나무로 뒤덮이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 분신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이 '희망의 나무' 심기 행사를 안내하고 있다. ⓒ 강태영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어린 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참가자들이 200여 그루 영산홍 묘목을 황량한 부지에 심었다. 이들은 이어 부북면 주민들이 기습 공사를 막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당번을 선 산막으로 이동했다. 

“우리 좀 살려 주이소. 오늘같이 계속 와 주이소. 산막 불로 고구마 구워 줄끼라.”

산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산막에서 용역들을 막았다는 할머니들의 호소에 참가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번 ‘탈핵 희망버스’ 행사를 기획한 이치우 열사 분신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전 밀성고 교사)은 참가자들이 성서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다고 고마워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이웃을 챙기고 간호해주고 책임졌습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강도를 만나 고통을 겪는 마을 사람의 이웃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 삶’이 강도를 만날 수도 있다는, 혹은 이미 만났다는 위기감에서 이런 자리에 모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이 싸움을 함께 하는 건 누군가를 돕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지키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국장에 따르면 이번 행사를 위해 마을 주민들 가운데 ‘젊은 축’에 속하는 50, 60대 남성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배워 희망버스를 알리는 ‘웹자보’를 날렸다고 한다. 송전탑 건설에 저항하다 용역과 굴삭기가 들이닥치자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야 만 이치우 씨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부북면의 이남우 위원장은 혼잣말하듯 나직이,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안 진다. 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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