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동현

▲ 김동현 기자

# 장면 1 - 공항 입국장 문 앞. 여느 때처럼 북적이던 인파가 해외파병 미군 한 명이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자 일순 조용해진다. 그는 범죄자인양 사람들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선다. 이 미묘한 긴장을 지켜보던 한 백발 노인이 큰 결심을 한 듯 팔을 들어 '탁. 탁. 탁.' 느리지만 또렷한 박수 소리로 정적을 깬다. 노인의 돌출행동에 한둘이 동참하더니 마지막에는 우레와 같은 갈채로 모든 이들이 이 ‘고개 숙인 존재’를 열렬히 환영한다. 그리고 자막이 깔린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유명한 미국 맥주 광고의 한 장면이다. ‘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판다’는 미국식 자본주의 논리와 확연히 다른 철학이 존재한다. 의무를 다한 시민에 대한 공동체의 신뢰를 담고 있다. 미디어가 재생산해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그 실천에 대한 공동체의 보답은 미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경찰•소방관•군인이 미국 어린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으로 손꼽히게 된 데도 이들 ‘모범시민’을 부각시켜온 언론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 장면 2 - 지난달 27일 대전 현충원. 특전사령부 주관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순직한 윤장호 하사 서거 5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공식 부대 주최 행사로는 올해가 마지막. 유가족, 주한 아프가니스탄 대사, 군 관계자, 그리고 아프간에서 같이 근무한 전우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부모의 눈가에는 5년 전의 눈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식장은 썰렁하기만 했다. 이 날 행사 자체가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윤 하사는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윤 하사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 재건 임무 도중, 탈레반 소행으로 추정되는 폭탄테러로 순직했다. 미국 유학 시절 미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였고 영주권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에 현역으로 입대했다.

▲ 윤장호 하사에 대한 군부대 주관 추모식도 서거 5주년인 올해가 마지막이다. ⓒ 김동현

나는 5년 전, 당시 윤장호 병장과 함께 아프간에서 통역병으로 근무했다. 고국으로 실려 갈 수송기 안 그의 주검 앞에서 전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만히 서있는 일뿐이었다. 누군가 나지막하게 시작한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모두들 목이 메었다. 한국 남자라면 모두가 해야 하는 병역의무를 위해 고국에 와서, 누군가 가야 했던 파병을 자원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가는 윤 하사. 그는 죽어서도 때마침 불붙기 시작한 파병반대 집회 분위기에 휩싸여 논란 속에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 논란마저 사그라지고 그가 이 세상을 살다간 흔적은 봉분도 없는 묘와 추모비로만 남았다. 윤 하사 아버지는 아직도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 막내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인양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리고 미군 기지에 세워진 윤 하사 추모비가 기지 이전으로 없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군 관계자가 “미군들은 추모비와 같은 상징성을 중요시 여긴다”며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서 잊혀져 가는 자식의 모습은 무엇으로 붙들어 둘 수 있으랴.

▲ 윤 하사 아버지는 아들이 그리울 때 핸드폰을 켜지만 목소리는 영영 들을 수 없다. ⓒ 김동현

‘미국은 잊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왜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걸까? 대전 현충원의 경관은 1년 전에 견주어 많이 바뀌었다. 비어 있던 공터는 어느새 묘비로 빽빽이 들어찼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순국한 장병들 말고도 무수히 많은 청년들이 우리가 지켜주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숨겨진 영웅들, 아니 ‘모범시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외면은 어디서 비롯됐나? 고위층 자제나 재벌2세들의 병역기피가 병역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의무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말로만 기회균등 사회일 뿐 ‘보통남자’들은 적어도 몇 년간 청춘의 활력을 저당 잡힌 채 사회 진출 시점부터 달라지게 된다. 공동선을 위해 일하다가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수많은 ‘모범시민’에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공동체 정신을 이어갈 수 있을까.

▲ 1년 전 까지만 해도 많이 비어있던 대전 현충원 윤 하사 주변 묘역에는 그새 순국 영령의 새 묘비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 김동현

 

                              ▲ 고 윤장호 하사 추모 영상 ⓒ 아프간 한국군 지원단 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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