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 청년실업이 부추기는 과열 대학편입 경쟁

지난달 23일 부산시 진구의 한 편입전문 학원. 강의실로 향하는 계단 벽면에 ‘합격 수기’ 포스터가 빼곡히 붙어있다.

“편입이 인생을 바꾸다 -송00씨, 동국대 경제학과 편입, 현재 A증권 근무”
“정체된 젊음 대신 도전을 택하다 –황00씨, 건국대 기계공학과 편입, 현재 B중공업 근무”

도전과 좌절, 노력과 성공의 우여곡절을 담은 수기는 대학 편입에 성공한 사람을 마치 영웅처럼 보이게 했다. 내용의 상당부분은 서울소재 대학에 편입한 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는 것. 청년(15세~29세)실업률이 8%로 전체실업률(3.5%)의 두 배를 넘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청년수가 110만명을 넘는 시대. ‘전망 있고 안정된’ 직장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상위권 대학 졸업장은 ‘필수 스펙(조건)’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수도권 대학에 편입하는 것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돌파구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또 같은 지방대 중에서도 좀 더 사회적 평가가 나은 학교로 옮기려는 움직임도 있다. 

 

▲ 부산시내 모 편입학원 내부에 붙어있는 포스터 일부. ⓒ 김강민

“인(in)서울 아니면 지방 국립대라도”

이달 초 부산의 한국해양대학교에 편입한 김성현(26•가명)씨는 D대학교 지방캠퍼스에서 3학년까지 다녔지만 ‘분교에서 공부한 것이 취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2010년 7월 휴학계를 내고 편입 공부를 시작했다.

"무조건 분교를 벗어나 수도권 대학에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6개월 동안 열심히 했어요. 학과보다는 학교의 네임밸류(명성)가 중요했기 때문에 비교적 경쟁률이 낮은 학과에만 원서를 냈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홍익대, 숭실대, 인하대, 국민대, 아주대, 동국대 등 9군데에 응시했지만 한군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정말 암담했죠. 공부한 시간은 짧았지만 ‘인(in) 서울’을 목표로 미친 듯이 공부했거든요.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는데……"

그는 6개월간 편입학원 수강료로 약 250만원, 편입학 원서비로 약 100만원을 썼다고 한다. 시험을 치러 서울에 오가는 비용도 교통비와 식비를 포함해 한 번에 20만원가량 들었다. 그는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사정을 생각해서 포기했다. 대신 1년 동안 대형마트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산에 있는 국립대 편입을 준비했다. 영어공인성적을 반영하는 국립대 전형을 위해 6개월간 월 15만원 내외의 수강료를 내며 토익 강좌를 들었다. 지방이라도 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국립대 출신이 취업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씨는 편입준비로 보낸 2년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졸업장이 바뀌게 된 데 만족한다고.
 

▲ 편입 시험 일정을 적어놓은 김씨의 노트. ⓒ 김강민


그는 ‘분교에서도 실력을 키우면 좋은 곳에 취업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최근 들어 일부 기업이 고졸을 뽑거나 (학벌보다) 능력위주로 인재를 채용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달라요. 시험 점수가 비슷한 두 지원자가 있다면 높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택하는 게 현실 아닙니까? 그러지 않다면 누가 기를 쓰고 어려운 편입공부에 뛰어 들겠어요?”

2년 째 편입공부 중인 부산 B대학의 박찬영(24•가명)씨도 같은 입장이다. 그는 장차 전공분야인 화학을 응용한 사업을 하는 게 꿈이지만 더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종목표가 대기업 취직은 아니지만, 개인 사업을 하려면 우선 번듯한 기업에서 실무 경험을 쌓아야죠. 그러기 위해선 상위권 대학 편입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박씨는 편입준비로 지난해 500만원 넘는 비용을 썼다. 부모도 그의 꿈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그는 지난해 국민대, 서강대, 고려대 편입 1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올해는 반드시 최종 합격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인기 학과는 100대 1 넘는 경쟁률도

2012학년도 고려대 일반편입학의 경쟁률은 모집인원 159명에 5507명이 지원해 34.64대 1을 기록했다. 인기 학과의 경우 100대 1을 넘기도 했다. 경영학과 101대 1, 영어영문학과 115대 1, 심리학과는 108대 1이었다. 경희대 편입도 평균 2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2011학년도 수도권 대학 편입시험 전체에 총 17만 2186명이 응시했다.

학력 차별을 없애자는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단법인 ‘학벌 없는 사회’의 김지애 간사는 “비정규직, 임시직이 많고 양질의 일자리가 적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 학벌 높이기 경쟁이 벌어진다”고 진단했다. 최근에 정부가 나서서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을 독려하고 있지만, 고졸 등 학벌을 보지 않는 채용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에 그치고 있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8년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대학 4학년생 82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47.6%가 ‘학교 간판이 취업에 걸림돌이 됐다’고 답했다. 서울소재 대학생의 40.4%, 수도권 대학생의 44.4%,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대생의 54.6%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서울지역 대학생도 그 나름의 ‘학벌 차이’를 체감하지만 지방대로 갈수록 정도가 심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 간사는 학벌주의와 대학서열화가 대학교육의 의미를 훼손하고 사회적 낭비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편입에 비용과 시간을 쏟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편입의 목적을 학문이 아닌 취업에 둔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취업이 잘 되는 학교, 학과에 진학해서 취직에 도움이 되는 공부만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 모습이 아니죠.”

그는 학생들이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다니고 졸업한 후에는 그 지역 기업에 취직하는 게 보편적인 독일처럼 대학평준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입시교육 하나로 사람을 ‘우수하다’ ‘열등하다’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며, 대학은 모든 학생의 자질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특화된 교육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기혁명>의 저자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은 지난해 11월 25일 세명대학교 강연에서 “사람은 각자 우주의 중심이며 저마다 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며 “개인이 가진 재능의 포도송이를 학벌이라는 스펙으로 줄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청중의 공감을 얻었다.

 

▲ "스펙으로 사람을 줄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 ⓒ 주상돈

"지방대에서도 실력 쌓아 꿈 이룰 수 있어요"

지방대에서 실력을 쌓아 꿈을 이루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경우(29)씨는 지난해 부산 동서대학교 디지털 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의 한 케이블 방송사 PD로 활약하고 있다. 남씨는 방송사에 응시할 당시 토익 성적이 없어 제출하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학벌과 스펙보다 실무경험이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영상 제작에 많은 시간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4년간 4~5번의 공모전에 도전해 2010년 KBS 영상컨텐츠 공모전 대상 등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남씨는 서류전형 등 여러 평가를 거쳐 10명이 남은 최종면접에서 유일하게 합격했다. 

“학벌과 공인성적보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해당 기업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부산 동명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김다훈(30)씨도 국내 최대여행사 중 하나인 A사의 영남본부에 합격, 1년째 즐겁게 일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김씨가 평소 원하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대하는 유연성과 열린 사고’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라고. 김씨는 대학 3학년 때 휴학한 뒤 2년 동안 동남아시아, 멕시코 등으로 배낭여행을 다녔고,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 오랫동안 생활한 것이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아요.”

평소 철학, 미술, 음악, 소설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책을 읽은 덕에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진지하게 답변할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지원자 중에는 수도권과 부산의 명문대 출신도 있었고, 영어공인점수도 김씨보다 대부분 높았지만 결국 선택된 것은 김씨였다.

지난 1년 동안 편입준비에 매달렸던 허지훈(26•가명•부산 S대)씨는 8곳의 편입시험에 모두 떨어진 후 3월 초 모교에 복학했다. 그는 이제 편입에 미련이 없고, 모교에서 최선을 다해 실력을 기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자질을 키워 탄탄한 기업에 입사하는 선배들을 봤어요. 공모전에 도전해 입상하거나 전공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것을 기업에서 좋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았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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