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방공정’과 함께 부각되는 약소국의 외교사

1408년 10월, 명나라 수도 남경(南京)에서 한 외지인이 죽었다. 그의 이름은 마하라쟈 카르나(麻那惹加那). 발니(勃泥)국왕으로 남경 도착 두 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회를 3일 동안 중단하고 남경 남쪽 오구산 기슭에 묻어주었다.

1958년 5월, 남경의 공무원들이 문화재를 조사하기 위해 남경성 안덕문을 찾았다. 별 기대 없이 근처 마을을 돌아다니던 이들은 한 농민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오구산에 돌로 만든 까마귀와 거북(石乌龟)들이 누워 있어요.”

농민들과 함께 오구산을 찾은 이들은 정말 여기저기 흩어진 석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하게 훼손된 비석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몇 대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영락 6년 8월 을미일, 발니국왕 마하라쟈가… 발니국왕이 중국에 와서… 안덕문 바깥 석자강에 장사지내다.” 기록만 남아있고 실체는 찾을 수 없었던 중국사 미스터리 중 하나인 발니국왕묘가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다.

 

▲ 난징성 외곽에 있는 발니국왕묘. ⓒ 임종헌

브루나이 국왕은 왜 남경을 방문했나

‘마하라쟈 카르나’라고 기록된 이 왕의 진짜 이름은 ‘압둘 마지드 하산’이다. 발니국은 보르네오섬 북단에 자리 잡은 브루나이 왕국을 뜻한다. 그는 1363년 건국된 이슬람 브루나이 왕국의 2대 술탄(이슬람 국가의 수장)이었다. 140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을 때 그는 고작 22살이었다. 당시 브루나이 왕국은, 보르네오섬 남쪽을 장악한 뒤 북상하는 마자파힛 왕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마지드 술탄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건이 발생했다.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가 이끄는 해양 원정대가 마자파힛 왕국의 중심부인 자바섬에 이르렀다. 교역을 위해 상륙한 이들이 마자파힛군의 기습을 받아 170명이 죽자 분노한 정화는 대군을 상륙시켜 전투를 준비했다. 당황한 마자파힛 국왕은 보상금을 지불하고 정기적인 조공을 약속했다.

이를 지켜 본 마지드 술탄은 원정대를 초청했다. 그는 이들을 열렬히 환대하고, 명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방문증 등을 발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드 술탄은 우선 명나라 남쪽 푸젠성(福建省)을 방문하여 명나라 관리들과 만났다. 3년 뒤 2차 원정대를 조직한 정화는 돌아오는 길에 브루나이에 들러 마지드 술탄과 가족들, 그리고 주요 신하들과 함께 남경에 도착하였다.

 

▲ 정화의 원정항로. 붉은 원이 발니왕국, 곧 브루나이왕국이 있던 보르네오 섬이다. ⓒ 임종헌

정화의 원정대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을 경유하며 해적을 소탕하고 교역을 거부하는 세력들은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건국 초기여서 지지기반이 불안한데다 남쪽에 강력한 적을 둔 마지드 술탄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체제를 안정시킬 요량이었다. 그가 굳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경을 직접 방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학계에서는 본다.

명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은 마지드 술탄은 고작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상하게 그의 이름은 <말레이와 브루나이 국왕들의 계보>에도 적혀있지 않다. 그의 존재는 명나라 기록이 있기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 네 살이던 아들은 샤왕(遐旺)이란 이름으로 1413년까지 남경에서 살다가 브루나이로 돌아갔다.

당시 남경에는 마지드 술탄 말고도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세력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와 있었다. 영락제는 이들에게 명나라의 위엄을 알리고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려는 생각에서 마지드 술탄의 장례를 성대히 치렀다. 무덤뿐 아니라 패방(牌坊;충효나 절의를 지킨 사람을 위해 세우는 일종의 기념문)과 비석, 황제보다 1쌍 모자란 5쌍의 석상까지 만들어주었다.

 

▲ 발니국왕묘 앞에 있는 석상들. 총 5쌍으로 무관, 문관, 말, 양, 사자 형상을 하고 있다. ⓒ 임종헌
▲ 발니국왕묘의 패방. ⓒ 임종헌
▲ 발니국왕묘의 비석. 비석 이름은 ‘발니국공순왕비'(공손하고 순한 발니국왕비). ⓒ 임종헌

반복되는 중국-브루나이 관계사

발견된 발니국왕묘는 한동안 방치되다가 1982년 장쑤성(江蘇省) 문물보호유산에 등재되면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곳이 각광을 받은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1년 전국중점보호대상에 등재되었고, 2003년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길을 닦고 ‘중-브루나이 우의관(友谊馆)’을 만들었다. 2008년에는 브루나이 마스나 공주 방문에 맞춰 2300만 위안(약 40억 원)을 투입해 브루나이풍 정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투자와 홍보가 무색하리만큼 직접 찾은 발니국왕묘는 한산했다. 워낙 사람이 없어서인지 우의관 문은 평소에 잠가놨다가, 관람객이 오면 직원이 열어주었다. 중국인 방문객들은 모두 우의관 뒤쪽에 조성한 펜션이나 식당으로 향했다. 방문객 장룽(43)씨는 “가족들과 점심을 먹으러 왔다”며 “발니국왕묘가 뭐냐”고 되물었다. 발니국왕묘 관리직원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찾아올 때를 제외하면, 발니국왕묘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은 하루 열 명을 넘는 날이 별로 없다”고 밝혔다.

 

▲ 한산한 중-브루나이 우의관. ⓒ 임종헌
▲ 우의관 내부. 브루나이 안내문, 특산품, 양국 역사 관련 소개문이 전시되어 있다. ⓒ 임종헌

주원장의 명효릉과 쑨원의 중산릉처럼 웅장한 무덤이 많은 난징에서 관광객들이 굳이 초라한 발니국왕묘를 찾을 리 없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이곳을 보수한 이유는 정화와 관련된 것 같다.

명나라 환관 정화는 일곱 차례의 해외원정을 이끌며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대선단이 국가 재정에 부담만 준다고 판단한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쳐 1433년을 마지막으로 해외원정은 중단되었다. 원정에 나섰던 사람들은 남경 수비와 궁전 수리 업무에 투입되었고, 정화는 무덤 위치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잊혀졌다.

이랬던 정화가 2000년대 들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정화와 관련된 책이나 TV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왔고, 함대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었던 보선창(宝船厂)은 역사관광지로 재개발되었다.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아메리카 대륙을 71년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나오기도 했다. 대선단을 따라 남경을 방문했던 마지드 술탄 역시 정화와 관련된 인물인 만큼, 이에 맞춰 발니국왕묘도 단장했다고 볼 수 있다.

 

▲ 최근 발굴된 보선창 전경. ⓒ 보선창유적유원지 홈페이지

최근 중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남방공정’과 더불어 남중국해, 동중국해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해안변경공정’을 시행하고 있다. ‘동북공정’처럼 이들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다. 특히 중국은 많은 지하자원이 매장된 난사군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한다. 이를 두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대선단을 이끌고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난사군도 인접 국가들을 잠재웠던 정화가 재조명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국은 난사군도 싸움에서 힘이 되는 우군이 필요하다. 여기에 적합한 나라가 브루나이다. 브루나이는 난사군도에 인접한 국가들 중 가장 약하다. 그렇지만 GDP의 52.3%(2008)를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일 만큼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상권과 전문 직종을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비교적 중국에 우호적이다. 브루나이 쪽에서는 전체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동남아시아 국가에 의존할 정도로 인근국가 수입 의존도가 높다. 수입통로를 다변화하고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주변국이 바로 중국이다.

1405년 정화는 명나라 이익을 위해, 마지드 술탄은 브루나이 왕국의 안전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600년이 흐른 뒤, 그들의 후손이 다시 똑같은 이유로 손을 잡았다. 되살아난 정화와 발니국왕묘는 역사가 반복됨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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