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진희정

▲ 진희정 기자
당신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는 무엇인가? 자유, 평화, 진실, 아니면 신, 조국? 우리는 가슴에 품은 나름의 어휘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성찰하고 행동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자유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끝까지 믿고 따르는 ‘그 무엇’을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 불렀다. 마지막 어휘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의식 아래 고요히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비로소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삶의 고단한 순간을 지탱하거나 생의 끝에 남긴 한마디에 마지막 어휘가 실리곤 하니, 이 얼마나 절묘한 이름인가.

 

‘MB씨를 위한 MBC’에 저항한다며 펜과 마이크, 카메라를 내려놓은 기자들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외친다. 지난달 25일부터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한 데 이어 노조까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간 MBC의 마지막 어휘는 뭘까? 권력에 불편한 이슈는 배제한 채, 정권 입맛에 맞는 뉴스만을 만들게 한 보도책임자와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MBC 구성원들의 마지막 어휘는 ‘공정성’이다. 청와대 내곡동 사저 의혹, 한미FTA 찬반 논란, 10.26 재•보궐 선거, 피디수첩 무죄판결 등 MBC기자회는 ‘2011년 7대 불공정 보도’를 선정해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권이 ‘조인트 깔 수 있는’ 낙하산 사장을 투입해 언론장악에 나섰던 2010년, MBC 제작진은 간판 예능 ‘무한도전’을 7주나 결방하는 파업을 감행하고도 그들의 마지막 어휘를 지켜내지 못했다. 잃어버린 공정성을 되찾기 위해, 이번엔 ‘무한도전’ 결방을 통한 관심 환기에서 더 나아가, 그보다 더 재미있는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제작해 성역 없는 진실보도의 열망을 담았다. '제대로 뉴스데스크’는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는 주요 이슈를 파헤치겠다며 YTN 해직기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온라인 방송 ‘뉴스타파’와 맥을 같이 한다. ‘나는 꼼수다’를 비롯해, 팟캐스트나 SNS를 기반으로 등장한 수많은 방송들이 제기해온 정당한 의혹들을 갈 곳 잃은 기자들이 검증하며 스스로 마지막 어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99% 대중의 각성을 진원지로 방송계에 불어 닥친 변혁의 바람을 체감하지 못하는지, 낙하산 사장은 ‘MBC가 지난해 최대 매출을 달성하고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35% 시청률을 올렸는데 나가라는 게 웬 말이냐’고 따졌단다. 촛불시민을 보고도 ‘수많은 촛불을 누구 돈으로 샀는지 찾아내라’고 역정 냈다던 MB씨를 위한 MBC의 수장답다. 공영방송 사장이란 사람이 MBC를 하나의 영리기업으로 여기고 있다는 건가? 공정성이 어찌 MBC만의 잃어버린 마지막 어휘겠는가?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11년 세계 언론자유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2010년 42위보다 두 단계 떨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다음 자리로, 현 정권 직전의 39위보다 다섯 자리나 밀렸다. 과도한 언론자유는 없다는데…

 

KBS는 텔레비전 방송 송출 50주년 특집 프로그램에서 영국 공영방송 BBC를 역할모델로 꼽았다. BBC가 강조하는 공정성과 정권으로부터 독립이 KBS가 추구하는 정치적 중립성 및 재정적 안정과 같다는 것이다. 완전히 시청료에 의존하는 안정적 재원 확보가 BBC 저널리즘의 바탕임을 언급하며, KBS의 시청료 인상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언제부터 언론이 정치적 쟁점에 대해 의견을 갖지 않는 중립성이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공정성과 같은 말이었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판단 없이 언론이 어떻게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제4권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반백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수영 시인의 1960년 미발표 작품 <김일성 만세>의 일부분이다. 시인이 “김일성 만세”를 외치려던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는 불온함 하나로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으니 명작 한 편 발표 못하고 숨겨놓은 것쯤이야 백번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다를까? 나 또한 시를 인용해 놓고 해명을 덧붙여야 하는 것 아닌가, 불안해지니 말이다. 5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김일성 만세’를 외칠 만큼의 언론자유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지난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다시 한번 확인됐다. 학생회관에 분향소를 설치하려던 대학생들은 저지당했고, 언론사 촬영 사진에 행여 김정일 얼굴이 나올까 현장의 청원경찰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보수단체는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한국의 언론자유는 여전히 ‘김정일을 추모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차원에서 거론된다. ‘김일성 만세’를 외칠 자유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조차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로 매도될지 모른다. 나 또한 북한의 전쟁과오와 3대세습을 혐오하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김정일 분향소를 주장할 자유는 그것을 비판할 자유만큼 보장되어야 한다. 누구나 모든 사안에 대해 논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라 해도 인류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밀이 쓴 <자유론>의 한 구절이지만 ‘뉴스타파’와 ‘제대로 뉴스데스크’는 언론자유의 장벽을 ‘제대로’ ‘타파’할 수 있을까? 그들이 믿고 따르는 마지막 어휘의 수준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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