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집 재밌는곳]쑤저우의 부자들이 한적함을 찾아간 곳

강과 호수, 운하가 많은 중국의 장강(長江) 이남 지역에는 ‘물이 어우러진 마을’이란 뜻의 수향(水鄕)으로 불리는 곳이 꽤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수향은 장쑤성(江蘇省)에 있는 쑤저우(蘇州)다. ‘하늘에는 천당이,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天上天堂, 地下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여서, 중국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지가 됐다. 하지만 상업도시라 꽤 번잡하기 때문에 ‘동방의 베네치아(이탈리아의 수변도시)’란 소문을 믿고 쑤저우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더러 실망하기도 한다.

수 천 개 중국 수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장쑤성 쿤산(昆山)의 저우장(周庄)도 지난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관광객이 많이 몰려 고즈넉한 멋을 즐기기 어렵다. 이 보다 훨씬 조용하면서 옛 정취가 물씬한, 감춰진 중국의 베네치아를 보고 싶다면 쑤저우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통리(同里)가 제격이다.

 

▲ 통리 입구. ⓒ 임종헌

통리호 서쪽에 자리 잡은 이 고장의 원래 이름은 ‘부유한 땅’이란 뜻의 푸투(富土)였다. 운하를 이용한 무역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부자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사치스런 이름이라고 해서 당나라 때(7세기 초) 통리(铜里)로 이름을 바꿨고, 북송 시절(10~13세기)에 발음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운하를 끼고 상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쑤저우의 부자들은 혼잡스러운 시내를 피해 한적한 통리로 이주했다. 통리의 큰 저택들은 명•청 시대(14~18세기)에 대부분 지어졌다. 마을 동쪽에 있는 호수 덕분에 전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통리에는 청나라 부자들의 주택 38채를 비롯, 수 백 채에 이르는 전통가옥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쑤저우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중국 전통 수향의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원 하나, 사당 둘, 다리 세 개

지난달 7일 통리를 찾았을 때,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차량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서 입장권을 산 뒤 전기열차나 삼륜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이동하게 돼 있었다. 마을 입구에 조성된 시장은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휴대전화 가게 옆에 전통 의복점이 있고, 에스프레소와 와플을 파는 카페 앞에는 닭날개 튀김을 파는 노점상이 진을 치고 있다. 관광객이 떠나면 적막한 다른 전통 마을들과 달리 ‘사람 냄새’가 확 느껴졌다. ‘양씨’라고 밝힌 50대의 중국인 삼륜자전거꾼은 통리 주민들의 생계수단이 다양하다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부모님은 마을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난 30년째 이 삼륜자전거를 타고 있고, 마누라는 식당에서 일하지. 아들 내외는 근처에 있는 자동차 공장 직원이에요. 마을 안에서 자식들과 함께 일하는 집도 있지만, 우리처럼 자식들은 공장에서 나가 일하는 경우가 많죠.”

 

▲ 삼륜자전거꾼. 원래 마을 입장료는 100위안(약 17000원)이고, 전기열차를 타면 2위안을 더 내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꾼과 흥정하면 100위안으로 입장도 하고 마을을 구경하는 동안 대여할 수도 있다. ⓒ 임종헌

시장 한 켠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이 지역 전통 희극인 곤곡(崑曲)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명나라 중기에 시작된 곤곡은 중국전통 희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세기 초에 완성된 경극과는 작품, 연출법, 노래 곡조 등에서 차이가 많다. 이 날 공연된 작품은 주인공이 낙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꿈에서 깨어난다는 줄거리의 모란정(牡丹亭) 제10착 유원경몽(遊園驚夢)이었다.

 

▲ 곤곡 공연 장면. ⓒ 임종헌

왁자지껄한 공연장을 지나 마을의 유명한 정원, 퇴사원에 들어섰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서인지, 순식간에 소음이 사라지고 우아한 뜰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통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일원이당삼교(一園二堂三橋)’라고 한다. ‘일원’은 청나라 광서제 시절 내각학사를 지낸 임난생(任蘭生)이 만든 퇴사원이다. ‘이당’은 사당인 숭본당(崇本堂)과 가음당(嘉蔭堂)으로, 지금은 전통 호텔로 탈바꿈한 세덕당(世德堂)과 더불어 청나라 시기 대표적인 건축물로 통한다. 마지막 ‘삼교’는 강줄기 세 개가 만나는 곳에 놓인 세 개의 다리 태평교(太平橋), 길리교(吉利橋), 장경교(長慶橋)를 말한다.

 

▲ 퇴사원 전경. 청나라 말기 정원의 장점을 집대성해 만들어 ‘강남 고전 정원의 경전’으로 꼽힌다. ⓒ 임종헌

 

▲ 가음당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 임종헌

통리에는 이 외에도 관료의 딸과 석공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시작했다는 진주탑, 1898년 장강 이남에서 처음 문을 연 찻집이라는 남원차사, 1900년대 초반 중화민국 시절 참의원 비서장을 지냈던 첸취빙(陳去病)의 고택, 통리호의 작은 섬 나성주(羅星州)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 퇴사원 내부. 손님들과 바깥 경치를 즐기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임종헌

중국의 다른 관광지에서 웅장한 ‘대륙 스케일’에 질린 여행객들은 단아하면서도 푸근한 통리에서 모처럼 여유를 되찾는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황선(52•여)씨는 “천천히 걸으며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고 말했다. 상하이에서 대학에 다닌다는 스페인 유학생 라울(25)은 “쑤저우는 물론이고 베네치아보다도 이 곳이 훨씬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에서 빨래하고 낚시하는 마을 사람들

통리는 15갈래 물줄기로 나뉜 7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통리 서쪽에 있는 공단에서 쏟아내는 오폐수는 남쪽 난싱호(南星湖)로 빠져나간다. 덕분에 통리를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탁하긴 해도 중국 운하 특유의 악취가 올라오지 않는다. 여름에도 마음 놓고 물줄기를 따라 통리를 한 바퀴 도는 목선을 탈 수 있다. 여자 뱃사공이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중국 민요를 들으며 배에 몸을 맡기는 진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

통리의 물줄기는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다. 사진기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관광객 옆에서 무심히 빨래나 설거지를 하는 주민들을 볼 수 있다. 가마우지를 이용한 전통 낚시는 구경거리인 동시에 주민들의 생업이다. 목에 매듭이 묶인 가마우지는 물고기들을 잡아도 삼키지 못한다. 입 안 가득 물고기가 차면 가마우지들은 배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를 뱉어낸다.

 

▲ 집 앞을 흐르는 강에서 빨래를 하는 통리 주민. ⓒ 임종헌
▲ 전통배에 앉아 있는 가마우지. 돈을 내면 가마우지를 이용한 전통 낚시를 볼 수 있다. ⓒ 임종헌

수로를 따라 난 길이 비교적 큰 반면 집 사이로 난 골목길인 농당(弄堂)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힘들만큼 좁다. 쑤저우나 저우장의 농당에선 인파에 떠밀려 다니기 일쑤지만 통리의 농당은 한산해서 기와 하나, 벽돌 하나를 음미하면서 걸을 수 있다. 길을 잃더라도 곧 수로를 만나게 되고, 수로를 따라가면 결국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통시장 골목. ⓒ 임종헌

물길 옆 도로에는 각종 가게와 식당들이 늘어서있다. 우리 고무신에 옛문양을 수놓은 듯한 전통신발, 박을 반으로 쪼개 만든 주머니, 전통 희극 주인공들이나 유명인사들이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모양의 인형 등이 팔리고 있다. 닭튀김, 나이차(奶茶;밀크티)같은 주전부리도 볼 수 있다. 통리를 대표하는 음식은 여러 가지 약재를 찻물에 넣고 삶은 족발이라고 한다. 장원급제가 꿈이라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해서 이름이 장원제(狀元蹄)란다. 장원제 덕인지 모르겠지만, 통리는 인재가 많이 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나라 때까지 장원 1명, 진사 42명을 비롯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136명이나 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

자금성, 만리장성, 진시황릉 같은 중국의 대표 관광지와 비교하면 너무 작은 곳. 항저우, 구이린처럼 놀란 만한 자연 풍광을 자랑하지도 못하는 곳. 상하이나 홍콩 같은 쇼핑천국도 아닌 곳. 그렇지만 통리는 소박하고 정갈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튀어보려고 발버둥치는 관광지들 사이에서 통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에 더 돋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곳. 과거만 남은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배기 삶이 있는 ‘마을’이라서 더욱 매력적인 통리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