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정희진 박사
주제 ② ‘인문학 위기담론’의 위기

일본 대지진, 미국 의료보험, 한국 청소년 문제의 공통점

지난 3월 일본에서 내진설계 건물들이 강력한 지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다. 미국에서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타살 위장 자살’을 시도하는 빈민층과 보험회사 간에 치열한 두뇌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의 분노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세 가지 현상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정희진 박사는 공저 <@좌절+열공>에서 설명했다. 기존 담론, 언어, 지식체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사례는 훌륭한 과학과 휴머니즘이 역설적으로 빈자의 고통을 더 아프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는 ‘청소년기 반항’이나 ‘공부 못하는 애들 투정’ 정도로 생각하는 기성세대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 정희진 박사와 함께한 세명대저널리즘스쿨 특강. ⓒ 이슬기

기존 인문학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해석해내기 힘들다. 눈에 보이는 현상(기표)과 그 함의(기의)가 기존 주류 인문학적 사고로는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 박사는 이를 두고 “인문학의 위기는 곧 재현의 위기”라고 정리했다.

“소위 ‘인문학 위기’라는 건, 기존 인문학이나 지식담론이 얼마나 협소한 렌즈이며 해석력을 잃었는가를 보여주는 현상이에요. 렌즈가 깨지니 미래가 안 보이는 거죠. 좋은 말도 나쁜 말도 아니고, 그저 상황을 보여주는 것뿐이죠.”

산업혁명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 사회 지식인

인문학의 위기는 왜 발생한 걸까? 가장 큰 요인은 자본주의 발달이다. 현대 인문학의 토대가 마련된 시점은 근대 초기, 즉 산업혁명 무렵이다. 숙련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초등교육시설로부터 인문학이 출발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발달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8시간씩 함께 일했던 노동자 다섯 명 중, 가장 유능한 한 명만 남아 18시간 동안 일하고 나머지 네 명은 해고되는 식이다. 대신 서비스업 같은 새로운 유형의 직업이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소외되었던 주체, 특히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식인 혹은 오피니언 리더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산업혁명기에 머물러 있다. 지금 이 곳에서 발생하는 일을 예전 서구 시각으로 설명하는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2008년에 있었던 촛불 시위다. 촛불 시위는 일종의 반정부 시위다. 그런데 반정부 시위 참가자 중 70% 이상은 바로 전 해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현상을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진보 진영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소비자 주체성’이란 개념을 배제한 채 ‘반정부 데모’로만 해석하려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목도하게 된 대중은 인문학으로부터 ‘자발적 낙오’를 선택하였다고 정 박사는 진단했다.

 

▲ 2011년 11월 26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 현장. ⓒ 정혜정

“우리나라 학생한테는 학교 다니는 게 억압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3세계 어린이한테는 교육이 욕망입니다. 이 두 가지를 똑같이 일률적으로 강요할 수 있을까요? 억압으로 느끼는 아이한테 제3세계 어린이 예를 들이대면서 ‘어떤 애는 공부를 못해서 카펫 짜고 있는데 너는 복 터진 거야’라고 얘기하는 게 바로 인문학의 위기, 소통의 위기입니다.”

파시스트를 넘어 진정한 지식인으로

과거에는 별 모양을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별만 생각했다. 요즘은 불가사리, 계급장, 아이돌스타 등으로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한다. 다양성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에도 기표와 기의가 1 대 1로 일치되었던 과거에 머물고 있는 인문학자들은 “요새 것들 어떻게 된거야”라며 혼란이고 위기라고 한다.

▲ 정희진 박사가 공저자로 참여한 <@좌절+열공>.
하지만 이런 위기가 오히려 정상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다고 정 박사는 말했다. 같은 말이라도 사회적 맥락, 상황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기존의 언어, 기존의 학문만을 고수하는 사람은 뒤처지게 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편견의 일부라는 걸 인식하고, 누구나 이런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정 박사는 강조했다.

정 박사는 파시스트를 ‘하나의 언어, 자기의 언어를 주장하고 강요하며 개념을 정의하려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그와 반대로 개념을 교란시키려는 사람이 지식인이다. 다양성의 시대에 여전히 하나의 언어에 머무르면 인문학 위기는 계속된다. 해결책은 바로 인문학 위기를 이야기하는 인문학 관련 종사자들의 변화에 달려있는 셈이다.

“대중이나 세상을 얕보아선 안 됩니다. 세상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진부한 사고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하나의 렌즈를 고집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여섯 개 렌즈를 바꿔 끼는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 즉 지식인입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사회교양특강>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개설되고 서울 강의실에서 일반에 공개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은 강재호, 이택광, 심보선, 이현우, 정희진, 오동진, 고미숙 선생님이 맡는데,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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