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천 명 넘는 남자와 통화, 남자친구 조차 지겨웠다

 ▲ 이보라 기자
내 평생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통화하기는 처음이었다. 회사에서 여자 텔레마케터에겐 주로 젊은 남성고객을 배당한다. 2주일간 일하면서 하루에 약 200통의 전화를 걸고 그 중 절반 정도 통화가 됐으니 모두 1천명 넘는 남성들과 얘기를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남자 목소리 자체가 지긋지긋해졌다. 심지어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것까지도.

에잇.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은 남자들과 전화로 밀담을 나누겠는가. 마스크만 쓰면 초인적인 힘을 갖는, 영화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나도 헤드셋만 쓰면 상냥하고 싹싹한 텔레마케터가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교도 없고, 좀처럼 빈 말을 못하는 내 성격은 영업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내 옆자리의 목소리 고운 동료는 “예쁜 IPTV 셋톱박스도 설치해드려요”라고 애교가 철철 넘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평범한 DVD 플레이어처럼 생겼을 뿐인 셋톱박스를 ‘예쁘다’고 말할 융통성이 내겐 없었다. 좀처럼 주문을 못 받아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너 때문에 난 기뻐서 울었고 슬퍼서 울었어~~.”

원더걸스의 ‘2 Different Tears’는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슬퍼하고 기뻐했다는 노래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 때문에 울고 웃었다. 야단치고 화내는 고객들 때문에 서러워서 눈물이 났고, 가뭄에 콩 나듯 ‘좋은 상품 소개해줘 고맙다’는 말을 듣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물론 웃을 수 있었던 순간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대부분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거나 자기 비하에 빠지는 날들이었다.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는 고객은 차라리 괜찮았다. 짜증을 내다 못해 험한 소리까지 해대는 고객들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고객에게 서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할 때도 많았다. 우리도 남들이 출근해서 일하기 시작하는 시간부터 전화를 돌린다. 하루 일을 시작하느라 한창 바쁠 때 판촉전화를 받고 싶겠는가. 또 잠자는 사람을 깨웠을 땐 엎드려 사죄라도 하고 싶을 만큼 미안했다.

내가 텔레마케터로 일한다고 하자, 친구들은 ‘판촉 전화 받으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판매원들 입장에서 나은지’ 물었다. 어차피 물건을 안 살 것이라면 전화를 빨리 끊는 게 나은지 궁금하단다. 판촉업체마다 업무를 평가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뭐가 정답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 친구들에게 당부했던 것은 제발 짜증이나 화를 내지는 말라는 것이다.

텔레마케터로 일하기 전, 나도 판촉 전화를 받고 짜증낸 경우가 없지 않았다. 사실 전화 자체보다, 그때그때의 내 기분에 따라 태도가 달랐던 것 같다. 회사에서는 ‘설령 고객이 화를 내더라도 나 때문에 화 난 것이 아니라 고객이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고객의 거친 말 한마디는 깊은 상처가 된다.

전화판촉 회사는 역동적인 노동의 현장은 아니었다. 근육을 쓸 일도, 땀을 흘릴 일도 없었다. 대신 전화기 너머의 얼굴 없는 ‘고객’과 하루 종일 전쟁을 치르고,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에 칼질을 당하는 곳이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넋이 빠진 듯 기진맥진했다. 고등학교 때 하루 종일 모의고사를 풀고 난 후, 얼굴은 기름기로 번들거리고 눈은 쾡 하니 들어갔던 것처럼. 

실적이 나오지 않아 하루 종일 초조했던 날들이 새삼 떠오른다. 어떻게든 주문을 받아보려고 입술을 깨물며 다이얼을 빨리 누르던 순미 언니도 생각난다. 실적이 곧 급여, 생활비, 삶의 수준과 연결되는 그들에게 고객의 거절은 ‘절망으로 가는 비상구’다. 더욱이 쌀쌀 맞고,  야박하고, 잔인한 거절이라면 더더욱. 어느 날은 화를 내는 고객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저기요, 나도 이 시간에 이런 전화 하는 거 괴롭고 싫거든요? 하지만 이게 내 직업인 걸 어떡해요!”

두 주일의 텔레마케터 체험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을 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특히 판촉 전화를 받는 내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보라 고객님이신가요?”
“아유. 힘드시겠네요. 근데 제가 버는 돈이 없어서 물건을 못 사요. 죄송해요.”

이제는 어떤 전화가 와도, ‘따뜻한 거절’을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영업에 보탬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고단한 그들의 삶에 어떻게든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려 한다. 지금 이 순간 판촉 전화를 받는 수많은 고객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황량한 들판에서 거친 비바람을 맞는 것 같은 그들에게 최소한 비수를 던지지는 말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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