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문학에 부는 훈풍과 삭풍 (2)

대학 관련 기사 첫 회로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부는 ‘인문학 열풍’과 대학 캠퍼스 내에서 보이는 ‘인문학 외면’ 현상을 두 차례 나눠 싣습니다. 앞으로 대학 취재팀은 전국 대학가의 젊은 소식과 이슈를 발굴해 독자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대학언론인을 비롯한 대학생, 일반 독자 여러분은 직접 기자를 작성하거나 제보를 통해 <단비뉴스>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CEO와 소외계층에 부는 인문학 훈풍 밖에는 또 다른 양상도 있다. 정작 인문학 교육과 연구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대학 캠퍼스에서는 인문학에 삭풍이 불어 닥치고 있다.

▲ 성균관대 비전2020안에 반대하는 문과대학 교수와 학생회의 성명서. ⓒ 곽영신

모기업 주도 대학구조조정에 반발도 잠시

지난 6월 초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캠퍼스에는 학교 측이 발표한 ‘비전2020’ 계획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비전2020에 대한 문과대 교수 입장’, ‘문과대 학생들이 우리 교수님들을 지지합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도 곳곳에 보였다.

‘비전2020’ 계획이란 성균관대가 최근 수립한 대학장기발전운용계획이다. 10년 주기로 장기발전안을 만들어 운영해 온 성균관대는 1997년에 시작된 ‘비전 2010’이 올해 말 종료되기 때문에 새 계획안을 만들었다. 학문 융•복합 비전에 따라 기존 학부를 통합하고 연구중심대학으로 거듭난다는 게 핵심이다.

이 ‘학부 통합’이 논란의 불씨다. 성대는 현재 16개 학부를 문리과대학, 과학기술응용대학, 인문사회응용대학(경영), 의과대학, 약학대학, 사범대학’(모두 가칭)의 6개 단위로 통합할 계획이다. 이중 ‘문리과대학’ 안에 문과대학, 사회과학부, 경제학부, 예술학부, 자연과학부 등 기초학문 대부분인 10~12개가 포함된다. 문리과대학으로 입학한 신입생들은 1년 또는 2년 기초교양과정을 거친 뒤 문리과대학에서 세부전공을 선택하게 된다.

성대 문과대학 이강수(23) 총학생회장은 “문리과대학은 학문의 융•복합이 아니라 통폐합”이라며 “소위 말하는 문사철 학과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과가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별 고정 인원이 확보되지 않아 인기가 없는 과는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다.

위기감을 느낀 문과대 교수들도 성명서를 냈다. 지난 5월 19일 성균관대 문과대 교수 일동은 “비전 2010의 비현실적 목표로 이미 인문학의 황폐화를 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또다시 더욱 허황된 비전 2020으로 인문학과 인문학자들을 질식시키려고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 성균관대 교내에 붙어있는 비전2020 반대 현수막. ⓒ 곽영신

이러한 내용의 대학 구조조정은 성대뿐만이 아니다. 중앙대는 지난 4월 이사회에서 기존 18개 단과대학, 77개 학과(부) 시스템을 10개 단과대학, 46개 학과(부)로 바꾸는 내용의 구조조정안을 통과시켰다. 중복되거나 경쟁력이 낮은 학과 31개를 줄여 2018년까지 국내 5대, 세계 100대 명문대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구조조정으로 서울캠퍼스 인문대학 소속의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는 안성캠퍼스 노어학과와 함께 유럽문화학부로 통폐합된다. 일어일문학과와 안성캠퍼스의 중어학과는 비교민속학과와 함께 아시아문화학부로 통폐합된다.

당시 중앙대는 재학생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학교 측은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총학생회 간부 김모(25)씨를 구조조정반대공동대책위원회 발족식에서 교직원에게 폭언 및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퇴학시키고, 교내 신축공사 현장 타워크레인에 올라 시위를 벌인 독어독문과 노모(28)씨 또한 퇴학시켰다.

현재 중앙대 캠퍼스에서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어떤 현수막이나 대자보도 발견할 수 없다. 학생회 간부 안모(30)씨는 “학교 측의 구조조정안 강행으로 학내 반발은 이미 일단락된 분위기”라며 “가을부터 학문분야 통폐합과 관련해 학과 정원을 조정하게 되는데 학과별 이익이 걸린 사안이라 다시 논란이 불거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전경. ⓒ 곽영신

성균관대와 중앙대는 각각 삼성과 두산이라는 대기업그룹을 재단으로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구조조정안도 삼성경제연구소와 외부 컨설턴트사(엑센츄어)가 개입해 수립했다. 이들 대학의 변화가 기업식 구조조정이라는 눈초리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스펙’에 도움 안 돼 ‘안 팔리는 상품’

그러나 다른 사학재단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국대도 학과 구조조정을 단행해 2011학년도 신입생 모집부터 독일어문학, 러시아어문학, 프랑스어문학 전공을 신설 동화미디어콘텐츠학과와 국제학부로 통합하기로 했다. 건국대는 전공 희망자가 적다는 이유로 서울캠퍼스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를 EU문화전공학과로 통합했다가 이마저 2009년 폐지한 바 있다. 이들 과가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단국대와 동국대도 올해부터 독문학과를 폐지했다.

이름과 소속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 인문학 강사는 “현재 몇 개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고 있지만 수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들으려고 하는 학생은 가뜩이나 적은 수강생 중 반도 되지 않는다”며, “인문학이 계절 학기에 개설되면 수강생이 없어 모두 폐강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인문학이 수난을 겪고 있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09년 <취업통계연보>에 따르면 인문학 전공자의 정규직 취업률은 30.2%로 경영학 46.2%, 공학계열 52.9%를 한참 밑돈다. 특히 철학, 역사학의 정규직 취업률은 각각 27.3%, 26.1%로 최하위 수준이다. 소위 말해 인문학 전공자들이 자본주의 취업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이 진지하게 인간을 성찰하는 인문학에 매진하기는 어렵다. 현재 인문학도들이 경영•경제학 복수전공, 자격증, 어학연수, 토익•JPT 등 이른바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이유다. 자본주의 최고 핵심 자리에 있는 CEO와 변두리에 내몰린 노숙자들이 자기 삶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하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다. 

‘경쟁력 없는 인문학’? - 퇴출 대신 수준 높여야

물론 ‘CEO를 위한 인문학’이 경영, 지도, 처세의 논리를 인문학적으로 탈바꿈한 것에 불과하다거나 가진 자들의 ‘고급 교양’ 또는 ‘사교’의 장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숙자 및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 역시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강좌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인문학이 가진 긍정적인 속성을 ‘소비’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문학 소비를 통해 삶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만하다.    

문제는 인문학 소비재를 ‘생산’해내야 할 대학들이다. 대학은 경쟁력 없는 인문학을 퇴출하려고만 하지 말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학문의 수준을 높이고 지평을 넓힐 수는 없을까? 인문학을 통해 비즈니스에 대한 성찰을 얻었다는 CEO는 인문학적 식견을 충분히 갖춘 문학전공 졸업생을 사원으로 뽑을 수 있지 않을까? 토익과 회계 교과서를 붙들고 있기에 급급한 대학생들은 동서양 고전을 풍부히 읽고 그것을 자신의 경쟁력으로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 대학생들은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젊었을 때 배우지 못한 인문학 강좌를 들어야 할지 모른다.

곽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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