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혁과제, 소설가·영화인한테만 맡길 건가
<유토피아>의 법관처럼 권위주의 가발 벗겨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판사의 일차 임무는 피고의 말을 듣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인데 그게 그렇게도 실천하기 어려운가?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은 피고가 재판관의 독단적 재판 진행에 피눈물을 흘렸을까? 설날 집 근처 영화관에서 <부러진 화살>을 보고 나서 떠오른 감상이다. 석궁 사건의 발단이 바로 거기 있었다. 테러를 당했다는 판사에 대한 증인 채택과 혈흔 검증만이라도 재판부가 받아들였더라면, 김명호 교수가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간단할 것 같은 피고의 요청은 애초부터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었다. 판사 사회와 사법체제, 크게 보면 한국의 기득권층 전체를 상대로 벌인 싸움이었던 탓이다. 동업자 심리와 전관예우, 권위주의 등이 만연한 사법부의 부조리를 바로 그 사법체제를 통해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가니>에 이어 <부러진 화살>이 뜨면서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사법개혁 이슈화의 주역이 돼야 할 주류 언론은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이 그런 현실을 제때 제대로 보도하고 의제 설정에 나섰더라면, 영화 없이도 일찌감치 시대적 이슈가 됐을 것이고, 소설과 르포가 출간되고 나서야 영화를 찍는 일도 없었을 터이다.

공지영은 인화학교 사건의 법정 풍경을 스케치한 인턴기자의 기사 한 줄을 보고 오랜 취재 끝에 <도가니>를 썼다. <부러진 화살>을 쓴 서형 작가는 김명호 교수를 포함한 1500명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20년간 혼자 법을 공부하며 법원과 싸워온 할머니 이야기를 <법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그들이 기자 역할을 다하는 동안, 훈련받은 기성 언론의 수백명 기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성 언론은 그런 사법피해자들을 검찰이나 법원이 내놓은 보도자료만 보고 ‘상습무고범’등으로 보도한 적도 많았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면 기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판사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데 언론의 도움을 받자는 변호사 말에 피고는 “기자들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라”며 불신을 드러낸다. 정지영 감독도 시사회에서 “열심히 취재하던 모 신문사 기자가 ‘정말 죄송하다’ 말하고 안 나타났다”고 전했다.

언론의 소극적 태도는 영화 개봉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 내용이나 양쪽 주장을 소개하는 데 그칠 뿐 무엇이 진실인지 파헤치려는 노력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겨레>는 인터넷판에만 싣는 ‘하니only’ 기사로 김명호 교수 인터뷰를 내보냈지만, 박홍우 판사, 아파트 경비원, 박훈 변호사 등을 만나 사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거나 ‘부러진 화살’의 행방 등을 추적하는 기사는 없었다.

진실을 알려면 이제 신문이 아니라 영화를 봐야 하나? 영화는 매체 특성상 각색과 과장으로 충격파를 가할 수는 있어도 진실을 파헤치는 데 한계가 있다. 언론은 취재보도라는 수단이 있고 의제 설정에 따라서는 재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 않은가?

내의에 묻은 피가 판사 것이 맞느냐는 쟁점은 혈흔 검증을 해보면 지금이라도 명쾌해질 수 있다. 영화의 감동을 현실에서 확인하기 위해 당시 재판기록들을 일일이 검색해 들어가니 영화보다 더 재미있다. 재판장이 “옷감에 있는 혈흔하고 대조할 피가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하자, 김명호 교수는 “박홍우 몸에 있죠”라고 대답한다. 재판장이 혈흔검증 신청을 거부했을 때 박훈 변호사의 반박은 웃지 못할 코미디다. “그러면 박홍우씨 뒤를 따라다니며 담배 피운 거라든가 침 뱉은 거라든가 그런 것들을 수거할 권한을 주시든지요.”

언론보도의 또 하나 문제는 사법개혁 관련 담론활동이 사법부가 아니라 주로 검찰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개혁은 국민이 동의한다. 특히 이명박 정권에서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데 이어, 한명숙 전 총리,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 미네르바 등을 무리하게 기소함으로써 권력의 시녀 노릇에 충직했다. 모두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언론은 ‘사필귀정’이라고 환영하면서 검찰을 비판했다(1월13일 사설 등).

그러나 법원한테도 정권 말기에 이르도록 소송 진행을 늦춘 데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늑장 무죄판결은 불법행위의 원상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칼춤에 당했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재판에서까지 법규 좋아하는 법원이 소송촉진특례법 21조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1심은 6개월, 항소심과 상고심은 4개월 안에 선고하게 돼 있다.

 

 

법원의 이런 행태는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충분한 위협효과를 발휘하게 한다. 재판이 직업이 아닌 일반인들은 권리 회복은커녕 그 과정에서 미네르바처럼 정신병을 얻어 파멸해간다. 김근태씨에 대해서도 당시 판사가 고문의 증거보전을 받아들이고 무죄 선고를 했더라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비극은 반복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면서 법원은 300억 원을 횡령한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에게 19일 또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계속 관용을 베풀고 있다.

법원과 검찰의 권위주의는 이들의 직급이 너무 높게 책정돼 있는 데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다. 고법 부장판사만 돼도 차관급이고, 법무부와 검찰에는 차관급이 54명이나 있다. 법무부는 주요 국장도 차관급이어서 부처 간 회의 때 아랫사람을 내보내는 버릇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올려준 건데 노무현 대통령이 되돌리려 했지만 반대에 부닥쳐 실패했다. 법조청사들을 보면 권위주의가 하늘을 찌른다. 검찰청사가 법원청사와 똑같은 높이로 지어진 것도 꼴불견이지만, 우러러보기도 힘든 두 건물의 위용에, 불려 들어가는 국민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법원장 등을 선출하고, 사법절차의 일익을 담당하는 국민참여 재판은 언제까지 딴 나라 얘기로 남아야 하나?

소설 <유토피아>에서는 법관이 가발을 쓰지 않고 법복도 입지 않는다. 권위주의로 치장하지 않더라도 판결이 공정하면 권위는 따라붙는 법. 자신도 법률가였던 토머스 모어는 영국의 사법 현실을 그렇게 풍자했다. 한국 언론은 언제까지 사법개혁의 과제를 소설가와 영화인, 수많은 사법피해자에게 맡겨둘 셈인가?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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