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완화로 저축은행 부실 방치, 저신용자는 ‘울며 사채쓰기’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 5부] 저당 잡힌 인생

부산 동래구에 사는 박한경(57‧가명)씨는 식당 주방 등에서 일하며 번 돈을 아껴 부산저축은행에 꼬박꼬박 예금했다가 이자는 물론 원금 일부까지 날렸다. 지난해 2월 이 저축은행이 부실경영으로 영업 정지되는 바람에 7개 통장에 저축했던 원금 5480만원 중 일부와 이자 등 약 2600만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현행법상 퇴출 금융회사의 예금주에게는 예금보험기금에서 원리금 합쳐 5천만원까지만 보상해준다.  

“세상에 그게 어떤 돈인데, 이자 못 받고 원금까지 손해 봐야 하다니....... 서민을 위해 문턱 낮춘 은행이라고 떠들 땐 언제고......”

부산 등 부실 저축은행의 예금 피해자 가운데는 박씨처럼 어렵게 번 돈을 떼이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한 푼이라도 이자를 더 받겠다고 저축은행을 선택했다가 피해를 입었다. 2011년 한 해 동안 문 닫은 저축은행은 모두 16곳. 9월 기준으로 총 64만 명이 11조원가량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청문회와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 등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당국은 지난 수년간 규제완화 정책 속에 저축은행들이 서민금융기관 본연의 소액대출을 외면하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 투기적 대출에 몰두하는 것을 방임했다. 또 금감원 임직원들이 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불법대출을 묵인하는 등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저축은행들이 당국의 묵인 속에 기업대상의 투기적 대출에 집중하는 동안 소액대출을 이용하기 어렵게 된 서민들은 대부업이나 사채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박한경씨와 그의 부인이 떼인 예금 대부분은 부부가 식당과 수산물시장에서 일하면서 번 돈이다. ⓒ 진희정

‘미소’와 ‘햇살’, ‘희망’이 되지 못하는 서민금융제도  
 
정부는 지난 2009년 말 ‘친서민정책’을 강조하면서 미소금융 등 저신용, 저소득층을 위한 대출제도를 잇달아 마련했다. 미소금융, 햇살론, 새희망홀씨대출 등의 이름으로 저소득층의 창업과 생활자금을 지원하는 금융상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막상 창구에 가면 갖가지 까다로운 대출 조건을 붙이거나 자금 제한 등으로 인해 이들 제도의 혜택을 받는 저소득층은 전체 수요자의 일부에 그칠 뿐이다.

▲ 현 정부의 ‘친서민정책’과 맞물려 2009년부터 서민대출지원제도가 늘어났다. ⓒ 진희정

미소금융은 창업 및 운영자금을 무담보 무보증으로 지원하는 소액대출인데 연 2~4.5%의 낮은 이자율로 신용 7등급 이하의 개인에게 빌려준다. 시중은행과 대기업 등이 연 2천억원씩 10년 대출을 목표로 재원을 조성했고 2009년 12월 이후 2011년 11월말까지 총 4614억원이 지원됐다. 햇살론은 저축은행과 새마을금고 농협 수협 등이 정부 신용보증지원을 받아 신용 6등급 이하 서민들에게 연 10%대의 금리로 생활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다. 지난 2010년 7월 대출이 시작된 이후 최근까지 약 1조9000억 원이 지원됐다. 16개 은행이 자체 재원으로 신용 5등급 이하, 연소득 4천만원 이하 서민들에게 대출해 주는 ‘새희망홀씨대출’은 지난해 10월말을 기준으로 약 1조2000억원이 지원됐다.

그러나 신용 7등급 이하 저신용자가 2010년 기준 800만 명을 넘어서 전체 인구의 약 20%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들 서민금융제도는 극히 일부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을 뿐이다. 긴급 생계자금이나 창업자금 등이 필요하지만 대출 창구에서 이런 저런 결격사유를 들어 거절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사금융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저소득층이 여전히 많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의 송태경 사무처장은 “서민금융 자체의 대출기준도 통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며 “이런 금융소외자를 위해 지원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으며, 자금 수요에 비해 여전히 부족한 공급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 대표적인 서민금융 대출지원제도

제도권서 소외된 저신용자 몰리면서 대부업 급성장

제도권 금융사들이 서민들의 급박한 자금수요를 외면하면서 고금리의 대부업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금융위원회 등에 따르면 2010년 12월 말 현재 1만4014개 등록대부업체들의 대출규모는 7조 5655억원으로, 1년 전의 5조9114억원에 비해 약 28% 늘어났다. 대부업체 이용자수도 같은 기간 167만4437명에서 220만7053명으로 약 32% 늘었다. 

▲ 대부업 영업증가 추이(단위: 개, 명, 억원). ⓒ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저소득층은 교육비, 의료비, 전월세보증금 등 생활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금융기관에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2011년 6월 말 현재 여러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쓴 다중채무자는 380만명에 달하며 이들의 대출액 중 56%가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 비은행권에서 빌린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의 생활자금이 부족해 돈을 빌린 저소득층이 연 39%나 되는 대부업체 이자를 갚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 중 상당수는 이 돈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대부업 대출을 쓰거나, 막다른 골목에서 사채업자를 찾아가기 일쑤다. 시민단체들은 그래서 대부업체들의 최고이자율을 현행보다 대폭 낮추어 ‘갚을 수 있는 범위’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이헌욱 변호사는 “대부업계에서는 금리를 내리면 대출이 위축돼 서민들이 더 자금난을 겪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는 대부업 이자를 갚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법정 최고이자를 더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이자제한법상 개인간 거래 등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최고이자는 연 30%이며, 등록 대부업체는 특별히 이보다 높은 39%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구인권운동연대 소속으로 <단 하루도 빚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를 쓴 서창호 활동가는 “97년까지 이자제한법에서 최고이자율이 연25%였는데, 그 때에 비해 시장평균이자율이 약 10%나 하락한 지금 법정최고이자가 오히려 5% 더 높다”면서 “생계자금을 빌리는 서민들에게는 1%의 차이도 엄청난데 이는 지나치게 높은 이자율”이라고 강조했다.

불법 채권추심 시달려도 공권력 보호 못 받아 

대부업체와 사채업자들에게서 고금리의 돈을 빌려 쓰고 제 때 갚지 못한 서민들은 무서운 채권추심에 시달린다. 금융감독원의 사금융애로종합지원센터에 접수된 채권추심관련 민원 건수는 2010년 한 해 1136건으로 2005년의 374건 대비 3배로 늘었다. 금융감독원은 ‘불법 채권추심 대응수칙’을 통해 채무자들이 적극 대응하고 고발할 것을 홍보하고 있지만 추심업자들의 위협에 심리적으로 위축된 채무자가 이를 활용하기는 어렵다. 또 채무자들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 금감원이나 경찰에 신고해도 증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피해 구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특히 경찰은 대부분 개인 사이의 채권·채무 분쟁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게 불법추심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 제도권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많은 서민들이 사금융을 통해 대출을 하고, 그 빚은 쉽게 채무 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불어난다. ⓒ 진희정
갈수록 경제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생활고에 몰린 개인들이 빚에 의존하게 되자 이 틈을 파고 든 불법 대출중개와 터무니없는 고금리의 ‘약탈적 대출’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단속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해 11월, 대출자를 알선해주고 받는 중개수수료율이 대출금의 5%를 초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부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했으나 불법중개업자들은 이런 규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서창호 활동가는 “정부의 적극적인 단속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시도 등 행정기관들이 대부업체의 법위반 행위를 보다 적극적으로 단속하고 수사당국 및 국세청과의 공조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창호 활동가는 “금융감독원의 지방분원에도 사금융피해신고센터 분소를 설치해야 하며 금융소비자 피해방지를 위한 교육과 홍보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시도지사가 맡고 있는 대부업체 감독도 금융감독원 등 보다 전문적인 기관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약탈적 대출’ 법적으로 개념 규정하고 적극 단속해야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2010년 한국금융센터에서 열린 ‘2010년 상반기 정책 심포지움'에서 미국의 ’약탈적 대출‘ 개념을 국내에도 도입해 적극적으로 금융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비정상적인 상환 조건을 설정하거나 채무자의 희생을 통해 채권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영업행위를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로 규정하고 이를 적극 단속, 처벌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공정채권추심법’을 두어 채권자가 빚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채무자의 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한다고 한다.

대부업을 엄격히 규제하는 유럽의 제도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대부업을 하기위해서는 면허를 취득해야 하며 중앙은행이 분기별로 발표하는 시장 평균 금리를 기준으로 1.33배 이상을 받으면 폭리로 규정해 단속한다. 독일도 대부업 면허가 필요하며, 독일 법원은 시장 평균금리의 2배를 넘는 이자를 폭리로 규정해 처벌한다.

▲ 일본계 대부업체 러시 앤 캐시의 선전광고.

일본은 대부업체 이자율을 연 29%에서 2010년에 연 20%로 낮췄으며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엔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다. ‘러시 앤 캐시’ 등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한국에 대거 진출한 것은 자국에서 싼 자금을 조달해 우리나라에서 훨씬 높은 이자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파산에 이른 개인들을 위해 채무구조조정과 회생을 지원하는 제도도 선진국들을 참고해서 보다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은 최근의 글로벌금융위기를 계기로 금융소비자 상담기구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면서 개인파산을 사전에 방지하는 노력을 강화했다. 소비자 상담기구는 대개 국가 지원을 받는 비영리 민간업체가 운영하는데, 미국의 소비자신용상담기구(CCCS), 영국의 소비자지원기구(CAB), 일본의 크레디트카운슬링협회(JCCA)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개인 부채에 대한 채무관리계획을 수립한 뒤 채권자와의 문제 해결을 직접 중재하거나 법률적인 조정, 파산절차를 대행 및 상담해주고 있다.

▲ 대표적인 해외 소비자 상담기구. 위에서부터 CCCS(소비자신용상담기구), CAB(소비자지원기구), JCCA(일본크레디트카운슬링협회).

의료 주거 교육 등 기초 복지 강화해야 ‘빚 의존’ 줄어 

전문가들은 그러나 많은 서민들이 고금리 대출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금융과 법률 지원 외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소득을 보충할 수 있는 일자리 대책과 필수분야의 복지 확충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민생연대의 송태경 사무처장은 “관리감독이 불완전한 서민금융제도를 확대하는 것은 과거 신용카드 사태처럼 금융채무불이행자만 양산할 가능성이 높고 근본적 대책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 이헌욱 변호사도 “아무리 충분한 재원으로 서민대출을 제공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빚”이라며 “자립을 위한 대출지원과 함께 국가는 근본적으로 소득불균형을 해소하고 빈곤층을 위한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스웨덴, 독일 등 복지선진국처럼 국민 개개인의 실질적 의료비 부담이 크게 낮아진다면 치료비, 입원비 등의 급한 목돈을 구하지 못해 사채를 썼다가 고금리의 덫에 빠지는 서민 가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충분히 공급되고, 주택가격이 국민 소득수준에 걸맞게 하향안정화한다면 전월세 보증금 인상 등 때문에 고금리 대출에 의존해야 하는 가계가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중산층에게도 부담이 될 만큼 비싼 대학등록금과 초중고생의 사교육비가 등록금의 실질적인 인하, 공교육의 강화 등을 통해 크게 줄어들어야 한다고 관련 단체들은 주장하고 있다.

채무자와 금융사의 도덕적 해이, 관료의 경직성도 경계해야 

전문가들은 서민금융제도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채무자와 금융사, 당국의 도덕적 해이와 관료적 경직성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민간차원의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신용대출) 사업을 펴온 사회연대은행 이종수 대표는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미소금융과 관련, “일반적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금융지원은 운영 과정에서 관료적 경직성을 벗어나기 힘들다”며 “미소금융 같은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철저하게 시장과 빈곤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유연하게 운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소금융이 오랫동안 빈곤층을 위한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을 해 온 민간단체들을 밀어내는 대신 이들의 현장 경험을 존중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은행 산하기관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는 대안금융자문그룹(CGAP)도 “정부는 직접적으로 대출이나 운영에 관여하기보다는 법적·제도적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 국내외 주요 마이크로크레디트 단체.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라민 은행(방글라데시), ACCION(미국), ADIE(프랑스), GLS은행(독일), 윤리은행(이탈리아), 사회연대은행(한국).

한국금융연구원 김동환 선임연구원은 “정부는 서민금융의 문턱을 낮추는 방안을 마련하면서, 동시에 금융권과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하는 대책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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