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나]

▲ 민경욱 앵커 (KBS '열린 토론'진행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7시 20분부터 9시까지 100분 동안 진행되는 KBS 열린 토론에서는 전화와 인터넷, 휴대전화 문자, 그리고 트위터를 통해 청취자들의 의견을 받아 토론에 반영한다.

 “샤프야, 샵이야?” 이 질문은 “# 9730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성우의 안내 로고를 듣고 신입 구성작가가 물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9730’을 ‘샵 9730’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샤프 9730’이라고 읽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는 질문이었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성우가 “샵”이라고 읽는 걸 왜 진행자는 “샤프”라고 발음을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였다.
 
이 간단한 질문이 어떤 상황을 이끌었을까? 결론만 짧게 얘기하면 맥주 집에서 고성이 오가는 논쟁이 있었고, 토론의 과정에 마음에 씻기 힘든 상처가 남았고, 그 분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20년 가까운 방송기자 생활과 ‘KBS 바른 언어대상’ 수상 경력, 또 토익 990점 만점이 증명하는 언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걸고 말한다. #는 우리말로 ‘샤프’라고 읽어야 하는 외래어다. 지금 라디오에서 성우가 안내멘트를 통해 그 기호를 뭐라고 읽든, TV 광고에서 건설회사가 우아한 여성 모델의 걸음에 맞춰 그 아파트를 뭐라고 광고하든, 또 전화기 자동응답기에서 ‘#’를 뭐라고 부르며 안내를 하든, 나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처럼 말한다. 그래도 ‘#’는 ‘샤프’다.
 
샤프는 영어 ‘날카롭다’는 뜻의 ‘SHARP’에서 유래된 외래어다. 외래어라는 것은 외국에서 들어온 말을 우리말로 삼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특정 법칙에 따라 우리말로 정착하는 과정을 겪었고, 일단 우리말로 정착한 이상 외국어와는 달리 취급하고 발음해야 한다. 영어로는 [sha:rp]라는 발음기호로 표시되지만 우리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r] 발음은 탈락하고, 대신 [아] 모음을 길게 발음해야 하는 원칙이 남게 된다. 그래서 짧게 발음되는 ‘샵’이 아니고 ‘샤프’라고 해서 긴 모음의 형태를 남긴 것이다. 영어 sharp를 원음대로(그게 영국식 영어가 됐든, 미국식 영어가 됐든) 발음해보면 ‘샵’보다는 (촌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샤프’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또래가 이 ‘샤프’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일단 초등학교 음악시간을 통해서다. 반음내림표 ‘b(플랫)’의 반대인 반음올림표 ‘#(샤프)’가 있었다. 또 내가 중학생 때쯤 일본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샤프펜슬’이 있었다. 쓰다보면 연필심 끝이 뭉툭해지는 일반 연필과 달리 항상 연필심이 날카로운 연필이라는 뜻의 ‘샤프펜슬’이 대중화되면서 사실 ‘샤프’는 우리 귀에 익숙해지게 됐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전화 안내나 TV와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와 방송 등에서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현재는 ‘샵’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은 발음인 것으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파급력이 큰 대중매체에서 왜 옳은 발음으로 방송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한 예라고 하겠다.
 
다른 원칙을 다 양보한다고 해도 국어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샤프’로 발음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면서 ‘현학적’이며 ‘궤변을 주워섬긴다’는 조롱과 공격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말을 사랑하고 꾸준한 관심을 갖는 방송기자로서 나의 고집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흔히들 일본어가 얼마나 외국어 발음을 표기하는데 불편한가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가 있다. McDonald... 우리가 ‘맥도날드’라고 읽고 표기하는 걸 그들은 ‘마쿠도나루도’라고 읽고 쓴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른 건 몰라도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외국어와 외래어를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자국의 언어를 지키려는 일본인들의 ‘샤프’한(?)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인처럼 멋들어지게 ‘맥다널’이라고 발음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어 속에 정착된 외래어인 이상 자기네 표기법에 맞게 ‘마쿠도나루도’로 발음하도록 가르침으로써 모국어를 지켜가려는 뜻임을 알기 때문이다.

민경욱 앵커/ KBS 라디오 '열린 토론'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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