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문혁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삶을 영위하면서도 삶이 도대체 무엇인지 거의 모르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인간은 분명히 한심한 존재다. 흘러간 대중가요의 진부한 가사가 말하듯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인간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부와 명예와 권력이 인생의 목표로서 부질없다는데 동의한다면 인간들은 대체로‘바보짓’만 하다가 죽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때 TV 코미디를 향해 ‘너무 넘어지고 자빠지기만’ 한다는 비난을 쏟아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지적 속에는 사람들이 자신 보다 열등한 사람의 언행을 보고 웃는다는 ‘웃음의 이론’이 숨어 있다. 박근서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희극의 정의를 찾아내어 ‘우월론(superiority theory)’이라는 웃음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코미디는 사회적으로 열등한 대상을 다루며, 코미디를 수용하거나 그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심리적 우월감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우월감’이 바로 웃음의 원인”이 된다.

삶에 대해 무지한 채 ‘바보짓’만 하다가 생애를 마치는 우리 인간들은 오랫동안 희극배우들의 그 ‘바보짓’을 보면서 ‘살맛’을 느끼고 웃음을 얻어 왔다. 희극 배우들이 멍청하지도 바보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바보 연기’(!)를 보면서 웃어 재낀다. 우리는 메뚜기처럼 생긴 유재석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희죽거리는 연기를 보면서 웃어 주고, 툭 튀어나온 꺼벙한 눈을 가진 박명수의 거만한 입담을 비웃으면서 즐긴다. 실제로는 우리가 더 바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우스쾅스러운 연기를 보면서 우리는 열심히 웃어 왔고...어느 새 <무한도전>이 200회를 넘어 서고 있다. 
  
한심한 내 인생을 스스로 막 비웃고 싶을 때가 있다. 한번 작심하고 웃고 싶을 때가 있다. TV 외에 웃음의 공급처가 딱히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그럴 때 공중파 3사의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쇼들을 열심히 보는 수밖에 없다. <개그 콘서트>를 제외하고는 그럴 듯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기도 하려니와, 토· 일요일 저녁 편성으로 접근이 용이한 탓도 있을 터이다. 바로 그 리얼 버라이티 예능 프로그램의 원조가 <무한도전>이다. ‘무엇의 원조’라는 역사적 평가는 그리 간단히 획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 하기는 쉬워도 처음 시작은 어렵다.

<무한도전>은 애초에 기계와 인간의 무모한 대결을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출발했었다. 개그맨들의 의미 없는 대결과 경주와 게임은 실제로 부질없는 목표를 추구하는 우리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대중 목욕탕 욕조에서 벌어진 배수구 대 인간의 물 빼기 대결은 <무한도전>의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포맷에 속한다. <무한도전> 속에는 우리 자신이 있고 우리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런 우리 자신을 보면서 비웃고 즐거워 한다. 거기에는 유용한 정보나 뉴스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어떤 교훈을 찾아 낼 수도 없다. 그런데도 15%를 넘는 시청률과 마니아, 폐인이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고정 시청층이 몰려 든다.

못난 개그맨들이 벌이는 한심하고 무의미한 연기를 지켜보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 보는 엄숙주의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러한 반응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삶의 무의미를 구태여 외면하고 진지함으로 무장해야만 이 삶을 버틸 수 있는 사람들에게 TV 속의 유재석과 박명수와 정형돈과 정준하와 노홍철이 결코 그들의 분신일 수 없다. 그들이 애써 싸우고 경쟁하는 일이 현실에서 우리가 닿으려고 애쓰는 한심한 목표들과 그대로 닮아 있음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희극은 존립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매회 다양한 우리 삶의 단면들을 되살려 내면서, 매 번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하게 만들면서, 200회를 이어왔다. 지난 5년 동안의 방영분을 찬찬히 살펴보면 <무한도전>의 역사는 새로움을 갱신하는 역사였다. 그것은 언뜻 남발 된 듯 보이는 ‘특집’으로 채워진 목록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매회 특집을 표방했거나 실질적으로 특집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이 5년을 지속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고 어려운 일에 속한다. 나는 그 성과의 원천이 매회 특집을 만들겠다는 그 무모한 고집에 있다고 믿는다.

<무한도전>은 매회 다른 포맷과 아이디어를 선보여 왔다. 그것은 삶의 여러 부면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 200회 특집을 맞아 김태호PD는 “아직 최고의 특집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했다. 어느 기고문에서도 그는 “무한도전은 할 말이, 할 일이 많다.”고도 했다. 창의력이 어떤 대상을 새롭게 보는 능력이라면 그는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일이 습관화된 제작자라는 생각이 든다. 

TV프로그램의 성패를 말할 때‘새로운 것은 성공하고 낡은 것은 망한다’라는 오랜 기준이 있다. 흥행에 관한 수많은 격언이 있으나 이보다 더 명쾌하고 중요한 언명은 없어 보인다. <무한도전> 제작진이 이 단순하고 쉬운 흥행의 진리를 간과했다면 지금까지의 성과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번 <무한도전>의 ‘200회 특집’ 속에 담긴 ‘2,000회 특집’을 지켜보면서 정말 2,000회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섬찟한 예감이 든 것도 <무한도전>이  앞으로도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는 능력’을 잃지 않으리라는 든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현실 속에서 사람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삶은 지루하고 인간은 바보짓을 계속하겠지만 그 바보짓의 다양한 재연을 보면서 웃음과 재미가 지속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우리를 살맛나게 할 수 있다.

권문혁/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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