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펙터클에 묻힌 ‘노르망디 코리안’의 이야기

전쟁터 3만리, 누구를 위해 떠돌았나

20세기 냉전의 세계사는 한 조선 청년을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소련군에서 다시 독일군으로 총을 들게 했다. 1938년 경성에서 일본군으로 징집된 뒤 포로로 3개국 군복을 입고 몽골 소련 독일을 거쳐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떠밀려온 얄궂은 운명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고증 자문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 <디데이>에 짧게 언급된 ‘노르망디 코리안’의 존재는 2005년 누리꾼들에 의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 101공수여단 로버트 브루어 중위는 유타해변에서 네 명의 동양인을 체포했으며, 사진 속 인물은 한국인으로 알려졌다.

▲ 2차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독일 군복의 한국인이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 SBS

독일 군복을 입은 이름 모를 ‘노르망디 코리안’은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강제규 감독과 배우 장동건이 한 번 더 호흡을 맞춘 영화 <마이웨이>의 ‘김준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강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인 <마이웨이>는 지구 반 바퀴에 이르는 12,000km(3만리) 전장을 가로지른 준식(장동건 분)의 여정을 따라간다. 노르망디 코리안은 전장의 비극을 온 몸으로 겪어낸, 모질게도 긴 자신의 목숨에 감사했을까?

‘시체 위에 시체가 포개졌고, 부상자들이 눈보라 속에 그대로 버려져 죽어갔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 덮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눈은 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하늘과 인간이 거대한 화폭의 추상화를 그리고 지우는 다툼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조정래 <오 하느님>

노르망디 코리안의 이야기는 <마이웨이> 속 김준식 이전에, 조정래 작가의 2007년 장편소설 <오 하느님>을 통해 ‘신길만’이라는 청년으로 먼저 대중에게 다가갔다. 두 작품 모두,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온라인 사이트에 실린 독일군 포로 동양인 사진을 추적한 2005년 12월 11일분 SBS스페셜 <노르망디의 코리안>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 <SBS스페셜>은 2005년 '노르망디 코리안'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조명했다. ⓒ SBS

기록의 공백 메운 소설과 영화의 상상력

방송은 결국 사진 속 실제 노르망디 코리안이 누구이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다만 러시아 군사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노몬한 전투에서 포로가 된 한국인의 명단과 독소전쟁에 참가한 125명의 고려인 명단, 독일 군사문서보관소에서는 히틀러의 전사가 된 중앙아시아 민족들로 구성된 100만 명 넘는 동방대대에 관한 기록, 미국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던 500명 일본군 소속의 한국인 포로들을 통해 격랑의 세계사 속에 휘말린 제2, 제3의 수많은 노르망디 코리안의 존재를 증명했다. <마이웨이>와 <오 하느님>의 김준식 신길만을 떠올릴 구체적 개인은 확인할 길 없지만, 전쟁으로 뒤틀린 조선 청년들의 비극적 인생 그 자체가 영화와 책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노몬한에서 소련군에 붙잡혔으나 일본진영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천호직, 노몬한 포로 출신으로 소련군 장교가 된 박성훈,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한국인 장교 최본트. 1939년 일본과 소련이 국경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만주 노몬한에서 강제 징집된 이는 주로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소작농 아들들이었다. 일본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노몬한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포로로 붙잡혀 소련군에 편입돼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과 대치하다 포로로 다시 독일군이 됐다.

▲ 식민 조선의 마라토너 청년 준식과 그의 라이벌 타츠오는 2차세계대전을 함께 하며 서로의 희망이 된다. ⓒ 공식홈페이지 
앰브로스의 <디데이>는 노르망디 코리안이 바다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에게 잡혀 미국에 끌려 간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다. 애초에 적군과 아군이 따로 없던 조선 청년은 어제 총부리를 겨눴던 상대군을 위해 오늘 싸우며 그렇게 고향에서 멀어져 갔다.

청년은 오로지 살기 위해 싸웠지만, 파란만장한 삶은 소련이나 독일이라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전쟁으로 뒤죽박죽이 된 ‘역사’에 저항하는 인간상을 만들어냈다. 처절하고 기구한 인생은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상상력은 곧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되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을 스크린으로 데려오면서 강제규 감독은 극적인 설정을 덧붙였다. 이름 모를 노르망디 코리안은 <마이웨이>에서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조선 마라토너 청년이 됐고, 일본 최고의 마라톤 대표선수이자 서로 강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하세가와 타츠오(오다기리 조 분)라는 라이벌도 생겼다.

일방적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전쟁

영화는 준식이 노몬한에서 일본군 대위로 재회한 타츠오와 끝나지 않은 전쟁의 경험을 함께 하는 운명을 그리고 있다. 마라톤 경쟁자이면서 일제 식민지배의 불편한 관계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전장 속에서 서로의 희망으로 변해간다는, 국적을 초월한 인간애가 <마이웨이>를 끌고 가는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적으로 만났지만 준식과 타츠오는 죽음 위협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일하고도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며 우정을 키운다. 강 감독이 식민지 시대 피해•가해국민의 동행이라는 설정을 <마이웨이>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는 전쟁의 무질서함과 개인의 비극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타츠오는 준식을 통해 점차 선한 인물로 거듭난다. ⓒ 공식홈페이지 
전장에서 냉혈한이던 전범 타츠오는 소련과 독일의 포로로 전락해 준식과 운명을 같이 하며, 거대한 폭력 안의 미약한 개인으로 변한다. 타츠오 대위는 일 제국주의의 첨병을 자청하며 노몬한 전투를 이끌지만, 밀려드는 소련•몽골 연합군에 후퇴하는 아군들을 천황에 대한 복종이라는 명목 아래 모두 죽이며 자멸한다. 이는 영화 중반 이후 포로가 된 타츠오가 적군의 병사로 전투에 내몰릴 때, 각국 지휘관 얼굴에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영화 <마이웨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갈등과 대립을 전쟁으로 끌고간 주범들이 있겠지만, 결국엔 피해자도 가해자도 함께 폭력의 역사 속에 뒤범벅이 되는 게 전쟁의 결말이 아니던가? 오직 승패에 따라 안위가 결정되는 곳이 전장이라지만, 그 운명 또한 손바닥 뒤집듯 요동치는 곳도 전장이라 최후의 승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승자는 없는 것이 전쟁의 본질이다.

준식의 가족 같은 친구로 강제 징집되어 함께 싸우다 소련 포로수용소 작업반장으로 권력을 손에 쥔 뒤 살기 위해 동료를 고발했던 종대(김인권 분). 원치 않는 새로운 전쟁 속으로 자꾸 휩쓸리지만, 반대로 광기 어린 눈빛에서 벗어나던 타츠오. 조선인 포로를 괴롭히다 자신 역시 포로군 신세로 남의 나라 전투에서 ‘오까짱(엄마)’ 외마디를 남기고 죽은 악질 일본군 노다(야마모토 타로 분). 끝없는 전쟁 속에서 저마다 변하는 모습과 국적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노르망디 코리안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하지만 <마이웨이>는 노르망디 코리안의 비극을 인간적이면서 강인한 면모를 가진 주인공 준식에게조차 제대로 녹여내지 못하면서 영화 집중도를 흐렸다. 또 영화는 친일 논란부터 한국 팬에게 엉뚱한 싸인을 해줘 불필요한 반일감정을 만든 주연배우 오다기리 조까지 영화 외적인 잡음으로 말이 많더니, 개봉 이후 반응은 극과 극이다. 대규모 전쟁신이 선명한 영화 주제를 오히려 산만하게 했다는 의견과 스토리를 압도하는 생생한 묘사라는 반응으로 나눠져, 관객별점은 개봉 이틀 만에 반 토막 났다.

전투 장면 리얼한데, 주인공은 불사조?

대작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초호화 캐스팅에 300억 원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최고 제작비가 들어간 <마이웨이> 역시 무한정 높아진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운, 블록버스터 특유의 부담감이 있다. 허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한국 영화 최초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고, 대규모 전장을 묘사하는 <마이웨이>의 촬영기술과 연출력은 가히 백미다. 맹렬한 화면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눈을 맹습한다. 황토빛 몽골 평야와 살을 에는 설원의 러시아 동토, 고요하고 한적한 바다가 되레 긴장되는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서 펼쳐지는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끊임없이 시신경을 자극한다.

▲ 한국영화 최고 제작비 300억원이 들어간 <마이웨이>의 대규모 전투 장면은 스크린을 압도한다. 사진은 위쪽부터 몽골 노몬한전투, 독소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묘사한 영화 속 전투 장면이다. ⓒ 공식홈페이지
하지만 과유불급이었던 걸까? 실전을 방불케 하는 장렬한 화면들이 이어지는데도 비극은 점층되지 않는다. 국가나 집단 이념과 상관없이 3개국 군복을 갈아입으며 사지로 내몰려야 했던 준식의 서러운 인생은 그의 죽음 앞에 잠깐 콧등이 시큰할 뿐이다. 오히려 스크린 속 전쟁의 광풍이 거세질수록 준식의 기구한 운명이 안타깝기보다는, 역으로 질긴 목숨을 의아해하는 잡념이 끼어든다. 짐짓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웅을 보며 꼭 살아남길 바라는 간절함보다 ‘불사조’가 먼저 떠오르는 히어로 영화를 연상했다.

<마이웨이>를 보고 일부 누리꾼은 ‘스펙터클의 과잉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 한다’고 평가했다. 향상된 연출력으로 전쟁의 참상을 스크린에 더 생생하게 구현한 것은 반갑지만, 그것이 전쟁 속에서 함몰되어가는 개인에 대한 관객의 공감을 불러오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전쟁영화의 스펙터클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후광이 너무 커 <마이웨이> 출연을 고심했다는 주연배우 장동건은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주는 인물 준식을 연기하다 보니, 전쟁 속에서 캐릭터가 변하는 타츠오 역의 오다기리 조에 비해 연기가 좀 밋밋하고 단편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두 배우의 카리스마가 145분의 대장정을 끌고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 판빙빙과 김인권은 조연이지만 선 굵은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공식 홈페이지 

관객들은 짧은 분량이지만 일본군에게 테러를 가하는 중국 여성 ‘쉬라이’를 연기한 ‘판빙빙’과 종대 역의 ‘김인권’의 연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둘 모두 초고에는 없었지만 시나리오 보완 과정에서 추가된 인물로, 특히 종대는 시종일관 같은 모습으로 '마이웨이'를 걷는 준식과 달리 정체성을 상실해가며 본능에 충실한 인물이다. 김인권의 호연이 캐릭터를 살렸다는 평가가 많다. 

강제규에 거는 기대와 아쉬움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마이웨이>까지, 내놓는 영화마다 ‘확장’을 거듭하는 강제규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역시 소재부터 영화의 규모, 촬영 무대까지 전작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마이웨이>는 세 번의 장대한 전투신과 할리우드 전쟁영화에 버금가는 스케일, 242일 촬영에 컴퓨터그래픽 장면을 포함해 전체 5441컷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거침없는 확장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원하는 건, 혁신을 거듭하는 강 감독 스크린의 위용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할 만큼 스케일이 커진 영화의 전투 장면을 병사 하나가 혈혈단신으로 누비고 다닌다면, 관객 중에는 주인공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전투 신 촬영에 투자된 돈이 아깝다는 느낌이 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인류애를 핵심으로 하는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우정에 설득력이 떨어지다 보니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 <마이웨이>는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강제규 감독과 배우 장동건이 8년만에 함께한 작품이다. ⓒ 공식홈페이지 

국내관객 천만을 목표로 하는 <마이웨이>는 지난 21일 개봉 이후 2일 현재 누적관객 수 173만 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기록하고 있다. <마이웨이>가 개봉 일주일 만에 100만을 돌파했지만, 흥행이 주춤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 개봉 사흘 만에 102만 명을 끌어들이고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웨이>가 강 감독의 전작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교해 동어반복이라거나 퇴보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능숙한 전쟁 묘사에 견주어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와 인물 설정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기 때문인 듯하다. 노르망디 코리안의 ‘기적’이 상징하는 바가 남다르기에 영화의 장황한 표현력에 묻혀버린 조선 청년의 ‘마이웨이’와 만든 이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관객수가 아쉽다.

‘전쟁의 광기가 바꾸어 놓은 것은 단 한 명 코리안의 인생만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코리안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취재팀은 일본군으로 남기보다 소련군이 되고자 했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번뇌를 실감했고, 소련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렸던 고려인들의 애환과 머나먼 이국땅에서 외롭게 죽어가야 했던 한민족의 죽음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20세기 격동의 세계사에 휘말려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싸움터에 끌려온 수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 SBS스페셜 <노르망디의 코리안>

▲ '전쟁의 광기가 바꾸어 놓은 것은 단 한 명 노르망디 코리안의 인생만은 아니었다.' ⓒ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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