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문학에 부는 훈풍과 삭풍 (1)

대학 관련 기사 첫 회로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부는 ‘인문학 열풍’과 대학 캠퍼스 내에서 보이는 ‘인문학 외면’ 현상을 두 차례 나눠 싣습니다. 앞으로 대학 취재팀은 전국 대학가의 젊은 소식과 이슈를 발굴해 독자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대학언론인을 비롯한 대학생, 일반 독자 여러분은 직접 기사를 작성하거나 제보를 통해 <단비뉴스>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CEO들, 인문학적 상상력에 매료되다

현재 인문학에 불고 있는 훈풍과 삭풍은 우리에게 생각해볼 과제를 던진다. ‘인문학(humanities)’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인간다움’을 뜻하는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인문학 홀대 주장을 반박이라도 하듯, 잘나가는 CEO부터 노숙자와 같은 소외계층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대학 강의실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각종 CEO 대상 인문학 강좌와 노숙자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이 생기면서부터다.

▲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을 수강하는 CEO들이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 곽영신

CEO들이 인문학에 빠졌다. 지난 6월 8일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TP: Ad Fontes Program)’ 강의실. 고급양복을 입은 40여 명의 CEO들이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박종수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강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과 러시아 사회 전반에 대해 깊이 있는 얘기가 오고 간다. 노트북에 강의 내용을 받아 적는 중년 남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2007년 시작된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은 CEO 대상 인문학 강의로는 원조격이다. Ad Fontes Program에서 ‘Ad Fontes’는 라틴어로 ‘원천으로’라는 뜻. 이 강좌는 매 학기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며 국내 CEO들 사이에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 김낙회 제일기획 사장, 이건영 빙그레 사장 등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이번 제6기 과정도 신청자가 쇄도해 정원을 초과한 47명을 받았다. 커리큘럼을 보면 ‘선비정신과 선비문화’, ‘도덕경을 통해 본 리더’, ‘셰익스피어 사극을 통해 본 지도자상’, ‘오디세이아를 통해 본 인간의 자기 이해’ 등 동서양 고전을 망라했다.

▲ 노트북에 열심히 강의내용을 받아 적고 있는 CEO 수강생. ⓒ 곽영신

이와 비슷한 강좌로는 고려대 ‘문화예술 최고위과정’, 성공회대 ‘CEO와 함께하는 인문 공부’, 한국예술종합학교 ‘최고경영자 문화․예술 과정’, 충남대 ‘예술최고위과정’ 등이 있다. 이들 강좌는 다른 나라의 깊이 있는 정치•문화사 탐구를 위해 국외답사를 떠나기도 한다. 각종 문화예술 공연을 관람하고 전통문화를 체험해보는 프로그램도 있다.

CEO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인문학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AFT 1기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은 이 과정 홈페이지 추천사에 “인간의 소비욕구를 보다 섬세하게 파악하고 소비자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썼다. 6기 과정을 수강 중인 임정강 스틱인베스먼트 대표이사(46)는 “치열한 시장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면 무한한 기회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변창구 인문대학장은 “효율과 경쟁, 성공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경영자들이 인문학을 통해 삶과 인간, 그리고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러한 성찰을 기업경영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변 학장은 “특히 최근 금융위기처럼 예기치 않는 위험이 존재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복잡한 사회에서 CEO들이 인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이 가진 힘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반인 대상 인문강좌도 다양

일반시민과 학생을 위한 인문교양 강좌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철학아카데미’와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은 오래 전부터 다양한 인문강좌를 개설해왔고, ‘문지문화원 사이’도 2007년부터 계절마다 아카데미를 열어 인문강좌를 제공하고 있다. 이달 23일 시작하는 ‘2010 여름 아카데미’에서는 ‘노자 읽기’ ‘지젝 읽기’ ‘동서양의 몸을 보는 시선’ ‘21세기의 가요; 듣기와 읽기’ 등의 인문강좌를 8회씩 연다.

제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서울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인문교양특강’등 교양특강들은 국내 최초로 대학이 일반에 무료 개방하는 교양강좌여서 자금사정이 넉넉지 못한 언론인지망생 등의 참여도가 꽤 높다. 고미숙 진중권 정희진 김영민 이택광 등 저명한 인문학자들이 세 차례씩 연속으로 강의한다.

소외계층, 끼니 걱정을 잠시 떨치고

여기 다른 이들도 있다. 같은 날 한국외대가 주관하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실. 이 과정을 수강하는 기초생활수급자 위모(51)씨가 강사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따금 강사가 질문을 던지면 배시시 웃는다. 오늘 강의 제목은 ‘동양철학과 지혜로운 삶’. 맹자 왈 공자 왈 어려운 한자가 쏟아진다.

▲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 대상인 한국외대 주관 ‘희망의 인문학 강의’. ⓒ 곽영신

“신이 내렸다고 하는 규범이나 윤리가 꼭 절대적인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필요에 따라 특정 윤리를 강요하는 면이 있는 건 아닐까요?”
“아따 선생님 큰일 날 말씀 허시네.”

중년 남녀 스무 명 남짓이 모인 강의실에 웃음보가 터졌다.

하루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노숙자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시민이 책을 펼쳤다. 잃어버린 희망을 찾기 위해서다. 서울시가 서울 5개 대학(경희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성공회대, 한국외대)과 손잡고 추진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이다. 이 과정은 빈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철학, 역사, 문학(글쓰기) 등 인문학 수업을 통해 삶의 의미와 긍정적 사고를 되찾게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작년 1천210명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수필집 <거리의 남자, 인문학을 만나다>로 언론에 알려진 안승갑씨가 이 과정을 통해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생의 희망을 발견한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는 지난 3월 23일 동국대에서 330여명의 수강생이 모인 가운데 입학식을 치렀다. 서울시립대•한국외국어대(26일), 경희대(29일), 성공회대(30일)도 순차적으로 강의를 열었다.

▲ 희망의 인문학 강의에 열중하고 있는 수강생들. ⓒ 곽영신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미국의 작가이자 언론인 얼 쇼리스가 창립한 ‘클레멘트 코스’를 본 딴 것이다. 그는 1995년 소외계층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뉴욕 인근의 노숙자, 마약중독자 등을 대상으로 인문강좌를 열었다. 이 코스를 이수한 상당수 노숙자들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일자리를 얻었다. 치과의사, 철학박사, 간호사, 패션 디자이너, 영문과교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인문학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꿈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날 희망의 인문학을 강의한 대학강사 윤모(37)씨는 “노숙자나 소외계층에 속하는 분들이 인문학을 통해 주체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 삶을 바꾸려는 태도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의를 들은 사람의 반응은 더 절박하다.

“우리야 뭐 한 자라도 더 배우니까 좋지 뭐. 배운 적이 없으니까…….”

곽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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