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② 데느스가 목격한 전투와 전쟁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새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다 싶은 순간, 우크라이나 제95공수여단 중위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머리, 가슴, 팔, 그리고 다리를 만졌다. 그것이 아직 몸통에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안도의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귓속을 찢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겨우 눈을 들어 주변을 보았다. 숨을 거둔 채 널브러진 동료들이 있었다. 검은 연기도 보였다. 목구멍이 조여져 숨쉬기 힘들었지만, 냄새를 맡았다. 뜨거운 화약 가루와 불꽃에 타들어 간 살갗의 냄새였다. 죽음의 냄새였다.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33살의 데느스 안티포우(Denys Antipov) 씨는 그제야 실감했다. 

그는 한국말을 곧잘 한다.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국립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한국어를 가르치며 소품 가게를 운영하던 데느스 씨는 지난달 25일 우크라이나 군에 징집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돌진한 지 하루 만이었다. ‘제95공수여단’에 중위로 입대한 지 12일 만인 3월 9일, 그는 러시아 군이 쏜 포탄에 쓰러졌다. 허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동료를 여럿 잃었다. 

데느스 씨는 26일 현재 우크라이나 중부의 드니프로(Dnipro)에 위치한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다. <단비뉴스>는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와 온라인 메시지를 이용해 지난 21일부터 3일간 데느스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국내 언론 가운데 이번 전쟁에 직접 참여한 우크라이나 군인을 취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지 상황이 허락한다면, 추가 취재를 통해 데느스 씨의 이야기를 다시 전할 예정이다. 이번 기사에는 12일에 걸쳐 그가 목격한 전선(戰線)의 실상을 담았다.

▲ 데느스 씨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쟁(왼쪽)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오른 쪽)에 참전했다. ⓒ 데느스 안티포우

한국에 유학했던 공수부대 장교

데느스 씨는 키이우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대학교(이하 키이우 국립대)에서 한국어문학을 전공했다. 도중에 키이우 국립 사관학교에도 입학해 영어 통·번역관 과정을 이수하고 장교로 부임했다. 우크라이나어, 한국어, 영어 등 언어에 두루 능통한 엘리트 군인이었던 그는 교환학생으로 2008년 서울대학교, 그리고 2011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각각 방문해 공부했다. 우크라이나로 돌아간 뒤에는 한국어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수료했고, 2015년부터 한국어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그는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교류를 이끌 엘리트로 살았을 것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접경 지역인 돈바스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데느스 씨는 군에 징집됐다. 박사 학위는 잠시 접었다. 2016년, 중위로 제대한 뒤, 데느스 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범한 일상을 시작했다. 기념품과 군용품 등을 파는 작은 소품 가게를 수도 키이우(Kyiv)에 열었다. 온라인 매장까지 열었다. 그 무렵부터 키이우 국립대학에서 한국어 시간 강사로 주 1회씩 강의를 나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평화로웠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 러시아 침공 이전인 2021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돈바스 참전 병사 포럼’에 참여한 데느스 씨. ⓒ 데느스 안티포우

2022년 2월 24일 새벽 5시, 평화가 무너졌다. 하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곧이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같은 도시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러시아 군의 침공이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아들이 참전해야 할 것 같구나.”

군인이었던 아버지와의 대화는 담담했다. 이미 데느스 씨는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푸틴에게 조금의 이성이라도 남아있길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시작됐고, 저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 든 부모는 다른 도시로 대피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소품 가게에 갔다. 임시 폐업 준비를 시작했다. 공군부대 동기였던 데느스 씨의 동료 역시 징집 대상자였다. 그들은 소품 가게 홈페이지에 공지글을 띄웠다. ‘우리는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키고자 합니다. 곧 다시 찾아뵙길 바랍니다.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영웅들에게 영광을.’

▲ 군에 입대하기 전날인 2월 24일, 데느스 씨는 ‘ua.gifts’ 누리집에 임시 폐업 공지글을 올렸다. ⓒ ua.gifts 누리집 갈무리

철갑과 헬멧, 그리고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

창고에서 오래된 군복을 꺼냈다. 그 옆에 군장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데느스 씨는 철갑과 방탄 헬멧, 장갑판 등을 차례대로 챙겼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자신의 따뜻한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전쟁 발발 다음 날인 25일 오전, 데느스 씨는 신병 모집 행정 사무실에 찾아가 참전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그는 제95공수여단에 배치받았고, 중위가 됐다. 군용 트럭에 올라탄 데느스 씨의 부대는 군 기지가 있는 북동쪽의 도시 지토미르(Zhytomyr)로 향했다.

기지에 도착한 병사들은 구경 5.45 밀리미터(mm)의 74년식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AK-74)을 한 정씩 받았다. 군복이 없는 사람들은 군복을 받았다. 충분치는 않았지만, 군장도 있는 대로 나눠 받았다.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부대를 찾아왔다. 소량의 긴급 식량과 뜨거운 음료 등을 군인들에게 전했다. 다음 날인 26일, 데느스 씨의 부대는 돈바스 지역, 최전방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내다본 세상은 하루 만에 달라져 있었다.

“도로는 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민간인들은 전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우리는 전선으로 향하고 있었죠. 세상이 이상하고 끔찍하게 변해있었어요.”

함께 이동하던 병사들은 덤덤하고, 침착했다고 데느스 씨는 말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전쟁에 대비한 군사 훈련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지키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따르더라도 적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 3월 22일 오전 1시경(한국시간), 데느스 씨가 <단비뉴스>와 줌(ZOOM)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화살표는 데느스 씨가 징집된 후 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10여 일에 걸친 이동 경로다. ⓒ 유제니

하늘을 가로지르는 러시아 무인항공기

돈바스 지역 인근에 도착한 제95공수여단은 순찰과 민간인 보호로 며칠을 보냈다. 지시에 따라 여러 번 전략적으로 장소를 바꿔 주둔하고, 빈 건물을 대피소로 만들거나 도시 외곽에 캠프를 설치해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했다. 작은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수프와 쌀 같은 반조리 식품이나 통조림, 건조식품 등을 소량으로 먹었다.

“러시아 군에 발각되지 않도록 불과 연기를 최대한 가려야 했어요. 어두운 건물 내부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가며 조심스레 끼니들을 해결했죠.”

▲ 데느스 씨가 소속된 부대의 점심 식사 장면. ⓒ 데느스 안티포우

입대한 지 12일 만인 3월 9일 오후 3시, 돈바스 지역 인근 도시 이지움(Izyum) 외곽에 주둔해있던 데느스 씨의 부대는 러시아 군의 공격을 받았다. 데느스 씨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러시아 군의 정찰기를 봤다.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었다. 곧이어 재빨리 건물 안으로 피했다. 그때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데느스 씨가 촬영한 그 무인항공기가 세 발의 포탄을 떨어뜨린 것이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찰나였다. 

폭발의 충격으로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등으로 바닥에 추락했다. 머리 위로 벽돌과 시멘트 조각들이 쏟아졌다.

“커다란 폭발음 뒤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순간 세상은 고요했어요. 그러다 고음의 이명이 귀를 찢듯 울렸어요. 폭발음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귀가 손상된 것이었죠.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다가 곧 무너져내린 건물의 잔해가 보였어요.”

데느스 씨는 온몸을 더듬거려보며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했고 이내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사람의 피부가 불에 타 썩는 냄새가 났다. 동료들이 죽어있었다. 그때 한 동료가 뛰어와 데느스 씨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그는 드니프로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다. 머리와 얼굴에 크고 작은 타박상을 입었다. 허리 부분이 크게 손상돼 당분간 천천히 걷는 것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상당 기간 치료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 3월 9일, 돈바스 지역 인근 도시 이지움(Izyum) 외곽에서 발견된 러시아 군의 무인 항공기를 데느스 씨가 직접 촬영했다. ⓒ 데느스 안티포우

걸을 수만 있어도 다시 전쟁터로 

“폭격 5분 전까지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누던 동료들이 죽었어요. 누군가는 저보다 더 큰 부상을 입었고요. 그게 저였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살았어요. 이곳은 전쟁터이고 이제 앞으로 가는 일밖에는 떠올릴 수 없습니다.”

전쟁 발발 10여 일 만에 데느스 씨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그의 고향은 이바노 프랑키비츠(Ivano-Frankivsk)다.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인구 22만 명의 아름다운 도시라고 그는 설명했다. 전쟁 발발 첫날인 2월 24일 이바노 프랑키비츠 공항에 여러 차례의 포탄 공격이 이어졌다. 고향은 쑥대밭이 됐다.

며칠 뒤인 27일에는 세계 최대 항공기로 알려진 ‘안토노프-225 므리야’(AN-225 Mriya)가 러시아의 공습으로 파괴됐다. 몸체 길이가 84m에 달하고 최대 250톤(t)에 달하는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데느스 씨의 아버지가 군 시절 직접 운항했던 수송기다. 므리야 항공기는 데느스 씨의 가족,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랑이었다. ‘므리야’는 우크라이나어로 ‘꿈’을 뜻한다.

동료, 가족, 고향, 그리고 꿈이 산산조각 나는 일을 온몸으로 치른 데느스 씨는 퇴원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퇴원하면 다시 부대로 복귀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에서는 3천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죽었다. 수백 곳의 학교가 무너져 내렸다.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시민들, 안전하게 출산할 수 없는 임산부들, 학교가 파괴돼 공부를 멈춘 아이들, 그리고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며 분노합니다. 전쟁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를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와 연대해주시길 국제 사회에 부탁드립니다.”

전자 신호로 연결된 화면 속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 러시아 군의 무인항공기에 폭격 당한 뒤, 데느스 씨의 방탄 헬멧은 망가져 버렸다. ⓒ 데느스 앤티포브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전쟁의 참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은 기사를 연재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나, 그들의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⑥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한 한국인 사진가

편집: 임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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