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칭찬하는 기자’가 되려는 환상은 버려야

▲ 심석태 교수

'취재원을 어디까지 챙겨야 하나' 고민하는 기자들

현직 기자들과 언론 윤리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현장에서 윤리적 고민을 깊게 하는 기자들이 정말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젊은 기자들도 적잖게 만나게 된다. 그런데 가끔은 그들의 고민에 아무런 답을 줄 수가 없거나,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를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어쩌면 그들에게 내가 덜 윤리적인 사람으로 비치거나, 혹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본적인 양식이 있는 기자라면 취재원,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취재원이 나의 취재와 보도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경우들이 있다. 아예 취재원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취재원을 위해 이것저것 알아봐주기도 하고 주선을 해주기도 하는 경우도 봤다. 취재와 보도가 끝난 뒤에 계속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개인적 상담을 해줬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말도 들었다.

심층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기자가 취재원과 어느 정도는 심리적 유대나 신뢰감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금 얘기했던 일들도 주로 심층 기획 취재를 했던 기자들이나 어떤 조직의 비리를 고발한 내부자를 취재원으로 둔 기자들에게서 들은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기자-취재원 관계가 보도와 관련한 신뢰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관계로 인식되는 부분이다.

기자-취재원 관계는 본질적으로 공적 관계

물론 기자와 취재원이 보도가 끝난 뒤에도 서로 인간적으로 친해져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기자가 한번 인연을 맺은 취재원을 보도와 관계없이 계속 만나서 인간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언론윤리적 측면에서 요구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이 계속 취재원의 이런저런 요구에 응하게 만든 것은 인간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이들은 취재가 끝나니 기자가 잘 만나주지도 않더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야박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자의 윤리적 책무는 취재원에게서 들은 내용을 제대로 검증해서 보도하는 것까지다.

언론윤리 규범은 기자들에게 취재 과정에서 취재원에게 속임수를 쓰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필요할 경우 보도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취재원을 보호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취재원 보호’는 어려운 처지의 취재원을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취재원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도록 비밀을 잘 유지하라는 것이다. 취재원으로부터 인간적인 기자라는 칭찬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까지 기자의 의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기자는 계속 취재 경험이 쌓일수록 감당할 수 없는 취재원 관리 부담에 치이게 될 것이다. 기자-취재원 사이의 공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사적 관계를 잘 정리하는 것도 기자가 해야 할 일이다.

▲ 기자에게 우호적인 취재원 관리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 이들의 요구는 때때로 부담이 되기도 한다. ⓒ Pixabay

환영받는 곳에서만 취재할 수 없는 숙명

어떤 신입 기자는 수습 기간에 가장 어려웠던 일로 영안실 등을 방문해서 유족에게 고인의 사망 관련한 내용을 취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기자들 가운데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 필자가 사건기자를 할 때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 기자라는 직업의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바뀐 것도 있는데, 요즘 현장 기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 같으면 별로 반발할 일도 아닌 상황에서 유족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언론 전반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많이 퍼진 때문으로 보인다. 유족의 마음을 더 잘 헤아려야 하고, 이들의 아픔을 덧내지 않도록 더 주의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해야 할 공적 쟁점이 있다면 찾아가지 않을 수 없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취재원의 아픔을 헤아리되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 그것이 기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다.

기자가 취재라는 공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유족의 아픔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유족의 상태가 그런 질문을 할 만한 상황인지, 유족 중에서도 그런 공적 접촉을 감당할 만한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등을 잘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사안의 시급성과 공적 가치 등도 함께 따져보아야 한다. 공적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시간과 장소의 적절성’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증 장애를 갖고 있거나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취재하면서 그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고생했다는 기자도 본 적이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물어야 한다면 그것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 기자로서도 유쾌할 리가 없다. 아무리 정중하게 말을 건네도 상대는 그런 것을 묻는 것 자체를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더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모조리 그대로 기사에 쓸 수도 없다. 검증은 기사를 쓰기 위한 기본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들 취재원은 자신들이 한 말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다시 확인하려는 기자의 질문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자랑하고 싶은 것만 갖고 기사를 써야 한다면 기자는 보도자료나 베끼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취재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긴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아무런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취재라면 그것은 치열한 공적 쟁점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취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취재원이 쓰지 말라는 내용은 어떻게 해야 하나?

취재원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 가운데는 취재원이 특정 부분은 기사에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아예 자기가 했던 인터뷰를 다 쓰지 말라고 할 때도 있다. 기자가 먼저 알고 찾아간 경우는 물론 제보를 해왔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취재원이 인터뷰한 내용을 쓰지 말라거나, 특정 부분은 기사에서 빼달라고 요구하는 경우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는 기자들이 있다. 과연 그것이 언론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결론일까?

어떤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사람이 주민에게 갑질 피해를 당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 경비원은 관리사무소에서도 제대로 자신을 지켜주지 않자 언론사에 제보를 했다. 언론이 취재에 나서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인터뷰했고 드디어 기사를 완성했다. 그런데 보도에 임박해 한창 편집을 하고 있을 때 이 경비원이 기자에게 연락해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비원은 취재 이후 가해자로부터 사과도 받았고, 기사가 실제로 보도되면 자신이 계속 일하는 데 부담이 될 것 같으니 이제는 보도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이 정도로는 판단이 쉽지 않다면 사례를 약간 구체화해보자. 이 경비원에게 갑질을 한 사람은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이었고, 경비원에게 기사를 막지 않으면 관리사무소에 압력을 가해 계속 일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겁을 줬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이 경비원은 언론에 제보를 해서 기사가 날 것처럼 만들어서 가해자로부터 통상적인 경우보다 더 많은 합의금을 받아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기자로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정이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언론 보도를 막기 위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압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론을 가해자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때문에 이런 사안에서는 조금은 원칙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 일단 기자가 정상적으로 취재한 내용은 원칙적으로 기자와 소속 언론사의 소유가 된다. 취재원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취재에 응한 경우 나중에 변심할 권리를 따로 유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렇게 되면 언론은 너무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취재원이 보도 직전까지 행여나 마음을 바꿔버리지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취재원을 속여서 취재에 응하게 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본적으로 이런 원칙에서 출발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원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말 사소한 공익적 가치를 갖는 보도인데 그 보도로 인해 취재원이 너무나 큰 피해를 보게 된다든지, 취재원이 무엇인가 큰 착각이나 오해를 했다든지 하는 등의 특수한 사정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정상적으로 취재한 내용은 해당 언론사의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보도할지는 편집권의 영역이다.

언론사에 따라서 일단 인터뷰 등 취재를 한 내용물은 해당 언론사 소유라는 점을 아예 내부 규정에 명시해 놓은 곳도 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더없이 상냥하던 기자가 기사를 쓰지 말라거나 이런 저런 내용을 좀 빼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더니 싸늘하게 거절한다면 취재원으로서도 쉽게 물러설 리는 없다. 기자가 취재원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보도했다거나, 특종 욕심에 취재원에게 피해가 가는 기사를 밀어붙였다거나, 퍼부을 수 있는 비난은 여러 가지가 있다. 최대한 언론의 본질과 기능 등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해야겠지만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원만하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쓰기는 어렵다.

▲ '공익'과 '취재원 보호' 사이에서 기자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 Pixabay

정치 영역도 마찬가지…비난보다 박수를 두려워해야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은 정치 영역이 기사에 대한 반응이 가장 열렬한 분야다. 취재원은 물론 취재원의 지지자들까지 열렬한 반응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유력 정치인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기사는 자칫 기자를 열렬한 박수와 동시에 강한 비난을 경험하게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 특정 대선후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기사를 쓰면 그 후보의 지지자들로부터는 온갖 공격을 받는 대신 경쟁 후보의 지지자들은 열심히 그 기사를 퍼 나르며 칭찬을 쏟아낼 것이다. 심지어 특정 후보자의 가족에 관한 사적 정보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음해성 기사를 써도 반대 후보 지지자들은 주저 없이 ‘좋아요’를 누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런 엉터리 기사가 아니라 제대로 특정 후보에 관한 공적 쟁점을 따지는 기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는 점이다. 정말 제대로 쟁점을 따지고 드는 기사에는 어느 후보도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칫 양쪽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어느 한쪽에서라도 확실하게 칭찬과 박수를 받고 싶다면 무엇을 하면 될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바른길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지금 어느 한쪽에서 아주 훌륭한 기자라고 칭찬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지점을 좀 돌아봤으면 좋겠다. 자신을 언론인이라고 칭하면서 SNS를 통해 시원한 ‘사이다’ 멘트를 날리고 특정 성향의 독자들이 보내는 환호를 즐기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그러고 보면 기자는 취재원과 그 주변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마음 편하게 지내기는 참 어려운 직업이다. 이웃은 물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기자를 하면 참 곤란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어제 웃으며 헤어진 사람에 대해 오늘 비판하는 기사를 써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비극과 상처, 또는 잘못을 들추기도 해야 한다. 대상이 된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기자는 인간적으로 참 힘든 일이다. 언론윤리는 왜 기자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고민에 빠진 기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함께 왜 지금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언론윤리가 사치재가 아니라 생존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 글은 <언론중재> 161호 ‘Journalism and Ethics’ 코너에 실린 것을 언론중재위의 허락을 받아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 박성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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