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 정착촌 실태 보고서] ④ 63만 1000원

가난의 문턱

아픈 무릎을 이끌고 빗물을 받으러 나왔다. 문턱이 산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음이 나왔다. 집 앞을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이마의 땀이 턱 끝까지 내려왔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붉은 양동이를 옮겼다. 구름 낀 하늘이 어두운 게,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받은 빗물은 화장실에서 쓸 생각이었다.

최순이(88·가명) 씨는 아홉 살에 고아가 됐다. 가난이 싫어 일찍 시집을 간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그는 손과 발이 자꾸 부어 병원에 갔다. 의사는 몸에서 나균이 나온다고 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둘 사이엔 어린 아들이 있었다. 얼마 뒤 집에 새로운 여자가 들어왔고 최순이 씨는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다. 스물여섯에 경북 칠곡, 산 중턱에 있는 칠곡마을로 왔다.

최 씨는 병원을 찾아 마을로 왔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준 방에서 15명이 같이 살았다. 계속 그곳에 살 순 없었다. 친동생의 도움으로 근처에 집을 지었다. 둘이서 직접 벽돌을 하나씩 올렸다. 시멘트가 비싸서 모래를 많이 섞었다. 경사 위에 올린 집이 아슬아슬했지만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동생은 집을 지어주고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마을에서 혼자 살았다. 매일 밤 두고 온 아들이 눈에 밟혔다. 울어서 부은 눈이 아침에 잘 떠지지 않았다. 

나라에선 돈이 아니라 밀가루를 줬다. 그걸로 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가끔 안남미도 줬다. 넉넉하게 주진 않았다. 하루 쌀을 먹으면 이틀은 밀가루를 먹어야 했다. 살기 위해 돈을 벌었다. 한센인 여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처음에는 주인 없는 밭에서 난 호박을 주워다 죽을 쒀 팔았다. 산에서 꿀밤을 따다가 묵을 만들기도 했다. 시장이 있는 대구로 가려면 걸어서 반나절이 걸렸다. 대구 시장에서 고기를 사 돌아와 마을에서 팔기도 했다.

그래도 한평생 가난했다. 

정착촌으로 떠밀리다

최순이 씨가 사는 칠곡마을은 병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졌다. 1968년까지 경북 칠곡에는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던 ‘국립 칠곡 병원(칠곡 애생원)’이 있었다. 이외에도 정착마을이 만들어진 배경은 다양하다. 성심마을이나 도성마을은 선교사 등 종교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희망마을과 같이 정부가 만든 한센인 마을도 있었다.

▲ 전남 여수 도성마을은 인근 병원 원장이었던 선교사 스탠리 토플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센인 정착마을은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경우, 종교 단체의 도움을 받은 경우,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경우 등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신현우

1961년부터 정부는 적극적으로 한센인 정착마을을 만들었다. 한센인을 마을에 정착시켜 그들을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1968년 11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을 신설하면서 정부는 익산과 칠곡, 부평에 있는 국립병원을 폐쇄했다. 국립병원 환자 수를 줄이고 소록도만 남긴 뒤 다른 병원을 폐쇄하면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센인을 시설에 수용하면 1년 기준 1인당 약 2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반면 정착사업으로는 1인당 1500원만 지원하면 됐다. 정부는 병원에서 퇴원한 한센인들을 인천과 김제, 경주 등에 이주시켜 마을을 만들었다. 정착촌 안에서 축산업에 종사하는 한센인을 지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한센인 정착촌을 유지했다. 

정착촌에 자리잡은 한센인들은 완전히 사회로 복귀한 것도, 완전히 시설에 격리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이유로 시설에 계속 살 수 없었던 한센인들이 세상으로 나왔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는 없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센인 정착촌 주민들은) 일반 사회에서 보면 격리된 상태이고, 시설에서 보면 사회로 복귀한 상태였다. ‘준격리’ 또는 ‘절반의 복귀, 절반의 격리’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배운 게 그것뿐이라

대부분 축산업에 종사하던 정착마을 한센인들은 1980년대 축산업의 쇠퇴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나이가 들어 일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에는 총 2505명의 한센인이 82개 한센인 정착촌에서 살고 있다. 평균연령 80.5세로 대부분 일하기 어렵다. 

희망마을에 사는 박점례(86·가명) 씨는 “배운 게 그것(축산업)뿐이라 이제 와서 다른 걸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령이 된 한센인들은 새로운 일을 하기 쉽지 않다. 정근식 교수는 “한센인들은 특별한 기술도, 자본도 없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자녀들에게 도움 받지 않는 한센인들은 (일반 노인들보다) 더 생활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센인 대부분은 자신의 낙인이 자녀에게 대물림될까 우려했다. 정착촌에 사는 고령의 한센인들은 자녀와 자주 왕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취재진이 만난 한센인 2세들도 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들의 대부분은 한센인 부모를 두었다는 이유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부모를 따라 축산업에 종사하던 2세들은 축산업을 못 하게 되면서 더욱 가난해졌다. 성심마을에 사는 이영훈(47·가명) 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과거 한센인 부모를 따라 돼지를 키웠지만 현재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한센인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

칠곡마을의 경우 2021년 1월 기준 총 110가구, 13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63가구에 한센인이 사는데, 61가구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다. 2021년 기준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선정 기준은 중위소득 30% 이하다. 1인 가구 기준 월 소득이 54만 8349원 이하인 사람은 생계급여를 받는다. 

취재진이 방문한 희망·성심·도성·칠곡마을 16가구 가운데 15가구가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와 한센인 위로지원금 등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지난 2009년부터 한센인 피해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위로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시설에 감금·폭행·학살당하고 간척사업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이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이다. 경주 희망마을에 사는 허순옥(89·가명) 씨와 남편 김종근(97·가명) 씨는 취재진이 만난 이들 중 지원비 총액이 100만 원을 넘긴 유일한 사례다. 16가구 가운데 최소 6가구는 2명 이상의 식구가 있어도 100만 원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한 <고령화 측면에서 본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정착마을에 사는 한센인 가운데 기초생활수급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82.4%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센인 1인당 한 달 평균 수입은 63만 1000원에 불과했다.

▲ 지난 2019년 기준 정착마을에 사는 한센인 가운데 82.4%가 1인당 한 달 평균 63만 1천 원의 수입으로 생활한다. ⓒ 신현우

이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지난해 4월 국민권익위원회는 전국 68개 지방자치단체 등 관련 단체와 정착마을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합동 실태조사를 한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관할 지자체, 기획재정부, 환경부 등과 협의해 개선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재성 국민권익위원회 복지노동민원과 사무관은 “매각이나 환경 관련 문제 등 주요 현안이 있는 정착마을을 우선적으로 조사하고 있다”며 “조금씩 다른 마을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센인의 격리 제도와 낙인·차별에 관한 연구>를 쓴 김재형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현재 권익위가 진행하는 조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전염병 통제라는 국가적 사업 때문에 한센인들을 특별 관리했고, 낙인과 차별이 발생했다"며 "따라서 국가는 한센인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센인 개개인마다, 마을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김 교수는 “평생 살아온 마을에서 떠날 수 없다는 의견, 낡고 부서진 마을을 재개발해달라는 의견, 노인 시설을 만들어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 등 각자 원하는 바가 다양하므로 잘 듣고 실현 가능한 선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은 끝나지 않는다

돈은 모일 만하면 사라졌다. 칠곡마을에 사는 최순이(88·가명) 씨는 장사하다 다리를 다쳤다. 수술하는 데 큰돈이 들었다. 수술 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 다리도 안 좋아졌다.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하느라 또 돈이 들었다. 허리는 늘 아팠다. 그는 이제 약으로 버틴다.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이 열 알도 넘는다.

▲ 최순이 씨가 침대에 걸터앉아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한 달 54만 9천 원으로 생활한다. ⓒ 신현우

최 씨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한다. 무릎이 아파 집 밖을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 그는 한 달에 생계급여 54만 9천 원으로 생활한다. 매달 수도세와 전기세, TV 시청료를 내야 한다. 식용유와 간장, 세제 등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는 데도 돈이 꽤 든다. 마을 교회에 십일조까지 내고 나면 그에게 남는 돈은 거의 없다. 아끼고 아껴서 모은 약간의 여윳돈으로 안경을 맞추거나 집을 수리하는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한다. 얼마 전에는 수의를 지었다.

양동이의 물을 한 번에 옮길 수는 없었다. 문턱은 여전히 산 같다. 수차례 산을 넘은 최순이 씨가 잠시 숨을 돌린다. 시멘트 벽돌 사이 갈라진 틈이 보인다. 그의 소원은 벽에 단열 벽지를 붙이는 것이다. 올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지 그는 걱정이다.

정착촌 한센인

정착마을 주민들은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했다. 취재진이 찾은 16가구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마을에 흘러들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스스로 들어오거나 가족을 따라서 왔다. 서른 해 넘게 닭과 돼지를 키웠지만 축산업이 쇠락하며 가계가 기울었다. 이웃들은 떠나거나 늙어서 죽었다. 빈집을 곁에 두고 살았다. 갈 곳을 정하지 않아 축사처럼 늙어갔다.

떠나야 할 방향도 저마다 사정으로 달랐다. 젊은 축에 드는 60대 한센인들은 다시 닭과 돼지를 길러 돈을 벌고 싶어 했다. 돈을 벌면 변변한 집을 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한 60대 한센인은 지금껏 고생했으니 겨울이 와도 따뜻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어디로 흘러갈지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래 전 마을에 온 70~80대 한센인들에게 선택지는 적었다. 사회에서 떠밀려 왔든, 정부가 강제로 옮겼든, 정착촌에서 평생 한센인으로 살았다. 이제 와 다른 마을에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어려웠다. 살던 터를 떠나 요양원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경주 희망마을에서 54년을 산 80대 한센인 박점례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마 이 땅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이 나이에 내가 또 어디 가서 살겠능교.” 

취재팀은 취재 과정에서 한센인과 한센인 정착마을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센인의 격리 제도와 낙인·차별에 관한 연구> 논문 등을 쓴 김재형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에게 한센인 정착마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해 질문했다. 지난해 8월 10일 서울 종로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만나고, 10월 12일 줌 화상회의로 추가 인터뷰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 현 시점에서 한센인 정착마을 사업을 평가한다면?
= 먼저 한센인 정착마을이 처음에 왜 만들어졌는지부터 고려해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음성 나환자’라고 불리던 사람들 중에서 노동력이 있고, 외모에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정착마을에 모았다. 당시 낙인과 차별이 너무 심해서 바로 사회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을 모여 살게 했다가, 추후에 사회로 복귀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이 사회로 복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착마을 사업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는 과정 없이 한센인들을 정착마을에 이주시켜서 지역사회와 갈등이 발생했다. 낙인과 차별도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평가할 수도 있다. 1960~1970년대에 한국에서 ‘자립’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했고, 한센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랑 한센인들을 자립한 한센인으로 만들겠다는 구상 아래 국가가 여러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1980년대까지는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농촌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한센인 정착마을도 함께 쇠퇴했다. 일반 농촌 주민에게는 자식이 부양하는 등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한 선택지가 있었지만 한센인 마을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센인 정착마을은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봤을 때 한센인 정착마을 사업은 실패했다고 판단한다. 

- 이미 완치된 한센인들을 국가에서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나.
= 실제로 <고령화 측면에서 본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보고서>를 쓸 때 국가인권위원회 내부에서 그런 논의가 나왔다. 인권위 입장에서는 지원해야 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많다. 반면 한센인의 경우에는 2005년에 많은 자원을 동원해 조사 사업을 벌여 특별법까지 만들어졌는데, 인권위가 또 추가 지원을 해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이건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한센인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도움을 줘야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니 지금이라도 보상해야 할 대상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다. 당시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한센인들은 사회와 격리되고 권리를 제한당했다. 그 기간도 잠깐이 아니라 수십 년이었다. 다수를 위해 희생된 소수의 한센인들에게 국가와 공동체는 당연히 사과하고 보상해야 할 의무, 책임이 있다. 

- 그렇다면 정착마을에 남아 있는 한센인들에게 앞으로 어떤 지원을 해야 하나?
= 일단 정착마을 한센인들은 대부분 고령이고, 자녀들과 소통이 어려운 분들이 많다. 이분들은 살던 마을에 계속 살고 싶으니 마을 환경을 개선해달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노인시설을 만들어 어울려 살던 한센인들을 같이 이주시켜 달라고 하기도 한다. 마을 외부에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렇게 욕구가 다양하다. 낙인과 차별이 심했던 지역에서는 비한센인과 교류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경북 김천의 삼애원같은 모델이 좋다고 본다. 좋은 시설을 지어서 한센인 어르신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살아왔던 마을에서 살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마을에서 합의를 이룬 뒤 정부에서 지원을 해 줘야 한다. 


한센병을 앓고 있거나 병력을 가진 사람을 ‘한센인’이라고 한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펴낸 <고령화 측면에서 본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보고서>는 한센인의 거주 형태를 정착마을, 시설, 재가로 분류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착마을에 사는 한센인은 시설에 있거나 사회에서 비한센인들과 함께 사는 한센인보다 주거 환경, 경제 상황 모두 열악했다.

<단비뉴스>는 ‘한센인 정착마을 취재팀’을 구성해 그 실상을 밀착 취재했다. 지난 7~10월 동안 한센인 정착마을 여덟 곳을 총 11차례 방문하고, 한센인 1세 24명을 포함해 38명을 대면 인터뷰했다. 그 가운데 16가구는 거주자의 허락을 받아 실내 구조를 살펴보고 가구 현황과 거주 기간 등을 취재했다. 전문가 9명을 인터뷰했고, 1천여 쪽에 이르는 논문과 보고서도 참고했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모두 5회에 걸쳐 연재할 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 주최 제4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편집자주)

프롤로그 - 여기에 사람이 산다
발암물질에 포위된 마을
불덩이와 냉동고의 집
사라진 가축과 스러진 사람
④ 오래된 가난의 삶

편집: 남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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