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콘텐츠] ⑨ 심혜정 영화감독, “다양한 형식의 영상, 나만의 내러티브”

지난 1일, 심혜정 영화감독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우리 시대의 콘텐츠’ 10강을 비대면으로 강연했다. 심 감독은 미술 작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문학을 전공했고, 주부로 살다 서른아홉 살에 미술대학원을 뒤늦게 들어가 서양화를 전공했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동시대 작품을 감상하면서 경계를 넘어 소통하는 예술에 관심을 두게 됐다. 심 감독의 주 무대는 ‘실험 영상’이다. 영화 문법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하고, 영화에 직접 출연해 연기하기도 한다. 그는 예술가이자 기록자고, 영화감독이면서 연기자다.

▲ 심혜정 영화감독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비대면으로 화상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현경아

심 감독은 강연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며 우리 시대 콘텐츠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혼성’을 꼽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가 서로의 속성을 나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결합하며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다. 그는 다양한 콘텐츠가 어떤 형식과 작업 방식으로 저마다 이야기를 만드는지 소개하고, 우리가 어떤 플랫폼을 통해 수용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끊임없이 질문할 때 콘텐츠는 혁신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남성용 변기가 있다. 이 변기는 왜 비쌀까? 변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예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미국 독립 예술가 협회가 연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내놓은 예술 작품, <샘>(Fontaine)이다.

▲ 1917년에 출품한 마르셀 뒤샹의 개념미술 작품 ‘샘’. 남성용 변기를 뒤집어 전시했다. 샘은 미술사학계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 개념을 창조해낸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 Artsy

<샘>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술은 경지에 오른 화가가 손으로 아름답게 그려 내놓는 작품이었다. 종이나 캔버스 등의 표면 위에 물감이나 흑연 따위의 또 다른 물질을 입히는 행위이기도 했다. 뒤샹은 미술계에 ‘미술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물었다. 1917년에 등장한 <샘>은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화장실이 아닌, 미술관에 전시된 변기는 변기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변기가 아니다. 논란 끝에 샘은 작품으로 인정받았고, 미술사의 대전환으로 기록됐다. 아이디어나 관념 그 자체만으로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됐다.

심 감독은 콘텐츠가 경계를 허무는 과정을 현대미술의 역사로 소개했다. 당시 새로운 장르였던 개념 미술과 이전 미술의 차이는 ‘물질과 비물질’이다. 그림은 물질 그 자체로 작품이지만, 샘은 변기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 작품이다. 이 시대 미술은 더 이상 물질을 다루는 정교한 기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나 관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예술은 항상 기존의 것에 의문을 품으며 혁신했다.

영상 콘텐츠의 변화도 예술사의 흐름과 같은 결을 공유한다. 영상은 필름이라는 물질에 기록된 연속사진이었다. TV가 발명된 후에는 전파를 타고 송출됐고, 지금은 데이터로 기록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영상을 송출하는 전파를 왜곡시켜 보여줬다. 대중매체에 지배당하는 사회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반박하며 매스미디어를 예술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작품을 보는 관객의 움직임이나 소리를 감지해 시각적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기성 작품처럼 작가가 일방적으로 완성해 전시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그는 수용자가 작품에 적극 개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다.

▲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일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해 생중계된 쇼다. © 백남준아트센터 누리집 갈무리

심 감독은 비디오 아티스트의 거장인 빌 비올라(Bill Viola)의 작품도 소개했다. 그의 대표작 <뗏목>(The Raft)은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시간, 이를테면 삶과 죽음 같은 일들을 비디오 아트로 드러낸다. 어떤 공간에 선 사람들에게 갑자기 거대한 물살이 들이닥친다. 물보라 안에서 사람들이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서로를 의지한다. 이들의 표정, 움직임을 드러내는 미세한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급작스러운 상황은 빌 비올라의 작품마다 드러나는 특징인 ‘슬로우 모션’으로 아주 천천히 이어진다. 수용자는 비현실적인 시간의 흐름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고, 생각할 수 있다.

▲ 빌 비올라의 <뗏목> 일부 갈무리.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 서 있다가 갑자기 거센 물길을 맞은 표정과 쓰러지는 몸짓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냈다. © Bill Viola

분화됐다 다시 융합하는 장르

심 감독은 “(미술의 역사가) 현대로 넘어오면서 장르가 분화되었지만, 요즘에는 분화됐던 장르들이 다시 결합하고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다큐멘터리 <아라비아인과 낙타>를 소개했다. <아라비아인과 낙타>는 극영화의 특징을 도입한 ‘혼성 다큐멘터리’다. 거동이 불편한 심 감독의 어머니를 돕는 재중동포 이주노동자 도우미와 10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가상의 인물과 사건을 연출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극영화와 달리 <아라비안과 낙타>는 실제 인물과 사건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이 있다.

그간 이주 노동에 관한 문제는 주로 이주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환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예컨대 농업, 축산업 등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을 생산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처우는 열악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고발하거나, 차별의 시선을 마주하는 이주 노동자 개인의 삶을 그리는 다큐멘터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심 감독은 이전의 것과 같은 형식의 콘텐츠가 아닌, 다른 형식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주민을 왜 꺼리고 배척하는지, 원주민의 시선에서 문제를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 감독은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약 10년 동안 도우미와 함께 생활하면서 어머니의 집이 점점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도우미의 집처럼 느껴졌다. 낙타를 천막 안에 조금씩 들이다 바깥으로 쫓겨나는 이솝 우화를 떠올렸다. 심 감독은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고민했고, 그 과정을 극영화의 특징으로 담았다.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재중동포 도우미의 돌봄 노동은 이질적이다. 싱크대 옆에서 도마를 쓰지 않고 음식을 만들거나, 화분을 옮기자고 제안했더니 식물을 꺾어버린다. 도우미가 중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심 감독은 자신이 느낀 이질적인 감정을 관객도 느꼈으면 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극영화를 찍듯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영화가 사실을 기록했는지, 연출한 건지 명확히 알 수 없게끔 연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주로 촬영하던 촬영 감독에게 다큐멘터리 촬영을 맡겼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어머니의 집을 오가는 심 감독의 움직임을 예상한 듯 움직인다. 친밀한 공간에서 마음 편히 움직이는 딸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외부인을 멀찍이서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연출해냈다.

심 감독은 <아라비아인과 낙타>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면서 다양한 실험들을 제작자가 어떻게 선택해 도입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의 역사에서 영향을 받았다. 백남준이 박물관에 미동도 없이 전시되어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작품에 의문을 품고 매스 미디어의 생방송 방식을 도입한 것과 같다. 다큐멘터리에 영화의 특징을 도입하면 추상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심 감독은 기존 콘텐츠 제작 관행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다른 방식을 섞어 풀어내는 식으로 콘텐츠를 제작한다.

2014년에 내놓은 실험댄스영화 <춤추는 사냥꾼과 토끼>는 영화와 퍼포먼스를 결합시켰다. 심 감독은 무용가 남현우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춤추는 동작을 중계하기만 하는 것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남 씨와 함께 재미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뮤지컬 요소가 강하게 가미된 인도 발리우드의 영화를 떠올렸다. 발리우드 영화는 일상을 그리다가도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식의 연출이 특징이다. 심 감독은 영화에 직접 등장해 그가 자주 가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무용가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심 감독은 남 씨의 근황을 묻고, 이야기를 듣는다. 카페테라스에서 "여자 문제냐"고 묻는 심 감독의 질문에 남 씨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잘 모르겠네"라고 말한 뒤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느릿한 동작으로 비틀거리다가, 제자리에서 반쯤 앉은 자세로 한 바퀴 돈다. 춤을 추는 남 씨를 심 감독은 턱을 괴고 바라본다. 카메라는 바닥에서 그의 발동작을 면밀히 주목하다가도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관조한다. 남 씨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춤으로 그의 감정을 설명한다. 영화는 일상의 공간을 예술의 공간으로 확장하고 뒤바꿔 놓는다.

▲ 심 감독의 실험댄스영화 <춤추는 사냥꾼과 토끼> 일부 갈무리. 심 감독과 찻집에서 자신이 속한 무용단이 힘들지만 즐겁다고 이야기하던 무용가 남 씨는 갑자기 공간을 바꿔 식당에서 춤을 춘다. © <춤추는 사냥꾼과 토끼> 갈무리

좋은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심 감독은 최근 OTT 오리지널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등 다양한 콘텐츠와 플랫폼이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콘텐츠 경쟁력의 원천은 ‘이야기의 힘’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야기를 구상할 때는 필연적으로 제작자가 겪은 일들이나 주변의 일들이 녹아들게 된다. 제작자가 직접 경험한 '내 이야기'가 상상해서 꾸며낸 모호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진솔하다.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에도 실제로 군 복무 시절 탈영병을 추격했던 원작자 김보통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심 감독은 최근 제작자들이 '어떻게 인기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가'에 주목했다. 방법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 이야기를 콘텐츠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유튜브 채널 <박막례할머니>도 김유라 PD가 할머니와 추억을 쌓기 위해 시작한 콘텐츠다. 자매들이 치매로 고생하는 것을 본 박막례는 자신도 치매를 앓아 가족들을 고생시킬까 걱정했다. 김 PD는 할머니가 치매를 예방할 만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자신과 추억을 쌓길 바랐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박막례할머니>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흔히 '막장 드라마'로 불리는 주말 연속극을 보며 구수한 욕설을 내뱉는 박막례의 모습을 보며 수용자들은 가족을 떠올렸다. 이전까지는 콘텐츠의 중심인물로 고려되지 않던 할머니가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키자 <BBC> 등 외신에서도 주목했다.

▲ 박막례 씨가 손녀 김유라 PD를 바라보고 있다. 김유라 PD가 치매를 걱정하는 할머니와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추억을 담기 위해 제작하기 시작한 <박막례할머니>에서는, 할머니와 손녀가 나누는 대화도 콘텐츠 소재가 된다. © 박막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갈무리

<박막례할머니>에서도 '혼성' 제작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김 PD는 시장에 가기 전에 화장하는 할머니를 MZ세대 뷰티 유튜버의 방식으로 담았다. 기성 방송사에서도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콘텐츠들이 이제는 가능하다.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결합하고, 유튜브 콘텐츠의 특징이 기성 방송사로 옮겨온다. 심 감독은 <EBS>의 <가만히, 10분 멍TV>를 대표적인 예시로 소개했다. 10분가량을 화면 전환 없이 장작불이나 동물, 풍경 등을 멍하니 볼 수 있도록 구성된 콘텐츠다.

심 감독은 좋은 제작자로서 역량을 다지기 위해 “자기 주변의 이야기들을 어떤 형식으로, 어떤 플랫폼에 담을 것인가”를 다양하게 고민하고, 다양한 장르에서 영감을 받기를 권했다. PD 지망생이라 하더라도, 방송이나 영상 콘텐츠에만 집중하기보다 연극이나 무용 등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것이다. 심 감독은 전혀 다른 장르에서도 비슷한 감정이나 시대정신을 느낄 수 있고, 이를 통해 표현 방식을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연극을 보고, 춤사위를 보며 감동한다. 연기자나 무용가가 무대 위에서 벌이는 행위는 영상과 다르다. 힘겨운 동작을 이어나갈 때 숨을 몰아쉬는 어깨의 들썩임을 보며 느낄 수 있다. 관객은 그 작은 움직임에도 에너지를 느낀다. 심 감독은 몸의 움직임이 어떻게 사람을 감동시키는지 제작자 스스로 느낄 때, 수용자에게도 그 감동을 전달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심 감독은 제작자로서 콘텐츠를 대할 때 창작하는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살아오면서 경험한 나만의 이야기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기존의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기를 드는 행위다. 예술은 변신 과정을 통해 자신을 혁신하고, 역사를 새로 썼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콘텐츠를 요구한다. 그 중심에 경계를 허문 장르 혼성이 있다. 콘텐츠의 장르 혼성을 실험하는 작업 역시 인간이 감동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연구해 새로운 혁신을 이끄는 일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콘텐츠가 세상의 제작자에게 던지는 화두다.


디지털모바일 시대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콘텐츠가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된다. 레거시미디어는 생존 기로에 서 있다. 이 시대에 콘텐츠는 무엇인가. 제작자는 무엇을 고민하며, 어떤 기술과 실험으로 세상을 그려내는가. 콘텐츠는 시대정신을 담는다. 제작자는 시대를 읽는다. 오늘을 대표하는 콘텐츠와 제작자를 초청해 진행하는 <방송제작세미나> 강의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지금은 다큐시대 - 장해랑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2. 나의 지역콘텐츠 이야기 - 안윤석 목포MBC PD

3. 히든싱어, 팬텀싱어, 슈퍼밴드로 보는 음악 예능 - 조승욱 JTBC PD

4. 펭수를 성공시킨 '퍼스트 펭귄' 정신 - 이슬예나 <EBS> PD

5. 편집 일기, 편집 읽기 - 유수빈 <경향신문> 기자

6. 숏폼 서사, 언더독의 생존 전략 - 윤성호 감독 

7-1. 메타버스 세상이 온다 - 고찬수 PD 

7-2. 인공지능으로 만드는 미래 콘텐츠 - 고찬수 PD

8. 웹 콘텐츠 홍수 속 기획자로 살아남기 - 박한순 PD

9. 경계 허문 콘텐츠, '예술 정신'을 담다 - 심혜정 영화감독

편집: 김병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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