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 제정임 원장

2016년 11월 8일 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윤곽을 드러내자 <뉴욕타임스> 정치담당 기자들은 혼비백산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확신한 나머지 반대 상황엔 아예 대비하지 않았는데, 투표함을 열어보니 승자가 도널드 트럼프였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을 지낸 질 에이브럼슨은 저서 <진실의 상인들>(Merchants of Truth)에서 당시 1면에 ‘마담 프레지던트’(여성 대통령) 기사를 준비해두었던 기자들이 황망하게 책상으로 뛰어가던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은 여론조사를 믿었던 데다, ‘여성혐오 발언과 성추행을 일삼던 남자가’ ‘탈세 등 의혹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놀람 속에 집권한 트럼프는 세 가지 ‘퇴행’으로 미국 사회에 내상을 남겼다. 첫째는 과학을 부정하고 전문가를 불신한 일이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속히 퍼질 때, 트럼프는 방역책임자의 판단을 무시하고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트럼프 추종자들의 방역 비협조, 백신 음모론과 취약한 의료보험시스템이 겹쳐 미국에선 지난 2년간 3억 3천만 인구 중 80만 명이 코로나로 숨졌다. 우리나라 청주시 인구만큼이 사라진 것이다.

트럼프의 두 번째 퇴행은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깨고 지구적 과제 해결을 방해한 것이다. 그는 2017년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기후변화 부정론자였던 그는 탄소배출 규제가 기업의 이익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 이어 탄소배출 2위인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기후위기 대응 동력은 떨어졌고, 기후재난은 가속화했다.

그의 세 번째 퇴행은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고 사회갈등을 부추긴 것이다. 그는 여성을 비하했고, 장애인을 조롱했고, 유색인종·이주민·난민을 범죄자로 몰았다. 백인 경찰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억울하게 죽인 데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발포 위협도 했다. 그가 ‘코로나19는 중국 탓’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한 후 미국 곳곳에서는 한국인 등 아시아인을 겨냥한 ‘이유 없는 폭행’이 급증했다.

▲ 트럼프는 세 가지 퇴행으로 미국 사회에 상처를 남겼다. 내년 대선을 앞둔 한국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 <연합뉴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 트럼프는 엄중한 교훈을 준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재난 상황에서 국민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수 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지구적 과제 해결을 망치는 ‘민폐 국가’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쟁취한 인권과 민주주의도 잃을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석 달간 우리는 ‘퇴행’이 아닌 ‘전진’의 길로 나라를 이끌 사람이 누구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따져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여론지형은 걱정스럽다. 후보의 가치관과 정책을 검증하기보다 가족을 둘러싼 추문 공방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가족이, 특히 세금으로 활동을 지원받게 될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따져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이 될 인물의 생각과 정책을 검증하는 일보다 중요하진 않다. 연간 수백조 원의 예산과 군대, 경찰, 행정 조직을 움직이는 책임자를 뽑는 일이다. 과연 민생과 인권, 민주주의를 개선할 사람인지, 아니면 뒷걸음치게 할 사람인지 살피는 데 우리는 더 집중해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최저임금제 후퇴를 시사했고, “주 120시간 바짝 일하고 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발언 등으로 노동인권 침해 우려를 샀다. 기후위기를 막기엔 정부의 탄소감축 목표가 낮다고 환경단체들이 비판하는데도, 그는 기업을 위해 더 낮춰야 한다는 의중을 보였다. 또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지 않았다”며, 기본적 사실관계도 모른 채 탈원전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국토보유세 기반의 기본소득을 공약했다가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하겠다’고 물러섰다. 부동산 불로소득 차단을 외쳤지만 이를 위한 공시가격 현실화에 제동을 걸어, ‘표를 위해 원칙을 허무는 사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그는 탈원전을 공약하고도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검토를 시사하는 등 모호한 행보를 보인다.

언론은 이런 문제들을 집중 점검해야 한다. 후보들의 진짜 생각은 무엇이며, 실제 추진할 정책은 어떤 것인지, 날카롭게 따져 물어야 한다. 그래서 퇴행이 아닌, 좀 더 안전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나라로 전진하게 할 대통령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이 글은 <한겨레> 12월 21일 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 김병준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