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광화문광장 개방 후 최대 집회...경찰 물대포는 자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무효를 주장하는 시민 2만여 명(주최측 추산)이 26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경찰의 봉쇄를 뚫고 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지난 2009년 8월 광화문광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개장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민 집회였다.

▲ 광화문광장에 모인 집회 참가자 2만 여명. ⓒ 정혜정

주최측은 당초 오후 6시부터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시작하기로 했으나 경찰 9천여 명이 3시간 전부터 광화문광장 일대를 둘러싸고 지하철역 입구 곳곳을 막아 시민들의 진입이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지하철역 입구를 막아섰던 한 경찰관은 “누가 (일반)시민이고 누가 집회 참가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모두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세종문화회관으로 나가는 지하철역 입구를 봉쇄한 경찰(위)과 광장 근처 도로를 점거한 경찰들. ⓒ 정혜정

주최측은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으로 집결지를 변경했고 이 소식은 트위터를 통해 번져나갔다. 오후 5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앞에 ‘비준 무효, 명박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고 한 시간 후 계단 아래 인도까지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촛불을 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한미 FTA 날치기 무효’ 손팻말을 든 젊은 엄마, 친구 손을 잡고 나온 고등학생들,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로 보이는 50~60대 남성들까지 집회 참가자는 다양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찰이 방송으로 해산을 종용하자 “(검찰과 다투고 있는) 수사권 확보에 국민 지지를 얻고 싶으면 집회를 막지 말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본격적으로 집회가 시작되자 ‘한미 FTA 비준 무효’ ‘한나라당 해체’ 등의 구호를 외쳤다.

▲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집회장소가 바뀌었다는 내용의 트위터 멘션들. ⓒ 정동영의원 트위터

야당 대표들 “한미 FTA 폐기에 모든 힘 쏟겠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 새진보통합연대 상임대표,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등 야당 정치인들과 민주운동가 백기완 선생 등도 대열의 앞에 자리했다. 손 대표는 저녁 7시쯤 시작된 연설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통과를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 앞에 다시 한 번 사죄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손 대표는 이어 “광화문광장을 경찰이 다 막는다고 해서 우리가 주저앉고 우리의 함성이 그칠 줄 아는 가 본데, 이명박 정부는 몰라도 한참 모른다”며 “이럴 때 일수록 야권이 단합해 한미 FTA를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손 대표의 발언 도중 일부 참가자들은 제1야당인 민주당이 비준안 날치기 통과를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 26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앞, 야당의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모여 한미 FTA 비준 무효를 주장했다. ⓒ 정혜정

이정희 대표는 한미 FTA 집회 참석 길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신대 권지현 학생을 위해 “지현아 사랑해”를 외치며 연설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의원직을 박탈당하더라도 한미 FTA는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력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며 “앞으로 오직 한미 FTA 폐기에 야당의 모든 힘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야당 대표들이 연설하는 동안 20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어버이연합 회원 150여 명이 이날 집회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회찬 대표는 어버이연합 시위를 제재하지 않는 경찰을 향해 “대한민국 경찰이 언제부터 어버이에 대한 효도심이 이렇게 깊었느냐”며 “한미 FTA 반대 집회에만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은 편파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 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광장을 향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 정혜정

▲ 한미 FTA 비준안에 찬성한 국회의원 명단이 실린 경향신문 1면을 보고있는 집회 참가자들. ⓒ 정혜정

저녁 7시 30분쯤 야당 대표들의 발언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대열은 경찰 병력을 뚫고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갔다가 종로1가를 돌아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왔다. 세종로 사거리를 가득 메운 2만 여 시민들은 마주선 경찰과 2시간가량 대치했다. “즉각 해산하지 않으면 물대포를 발사하겠다”는 경고방송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지만 참가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 횡단보도에 폴리스라인이 형성 돼 이동에 불편을 겪자 참가자들이 항의하고 있는 모습. ⓒ 정혜정

주말이라 수업이 일찍 끝나 집회에 나올 수 있었다는 박소라(17·고1)양은 “아빠가 자주 이야기 해 주셔서 평소에 FTA에 관심이 많았는데 집회에는 처음 왔다”며 “경찰아저씨들이 방패를 들고 강압적으로 서 있는 분위기는 무섭지만 다음에도 집회가 열리면 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왔다는 조성진(32)씨는 “FTA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큰일인데 충분한 설명도 국민적 합의도 없이 왜 이렇게 급하게 처리하는지 모르겠다”며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조건 막으려 하지 말고 우리가 왜 나왔는지 이야기 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 중이다. 경찰의 '물대포 발사' 예고 방송에 일부 참가자들이 앞쪽으로 나와 물대포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운데). ⓒ 정혜정

시위 대열 곳곳에는 비준안을 날치기 처리한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보수언론들을 비난하는 문구가 적힌 비옷이나 손팻말들이 눈에 띄었다. 또 문화방송(MBC)의 한 프로그램에서 집회에 참석한 장애인단체를 취재하자 참가자들이 “어차피 찍어가도 뉴스에 내보내지 않을 거면서 뭐하러 찍느냐”고 거부하기도 했다. 또 “공중파방송들은 취재하지 말고 인터넷뉴스에서 받아써라” “취재 안 해도 월급 나오잖아”하는 비난도 나왔다. 

한편 저녁 9시 30분쯤 야당의원들과 집회 해산을 논의하기 위해 시위대 속으로 들어온 박건찬 종로경찰서장이 참가자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안경이 벗겨지고 계급장이 뜯기기도 했다. 이날 경찰은 경고한 것과 달리 물대포를 쏘지 않았고, 집회 참가자들은 10시 30분쯤 자진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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