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편리한 통합형 '오디오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하라

"30년 전에도 ‘라디오가 위기’라고 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MBC)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MBC) 등을 연출했던 정찬형 PD가 2015년 '넥스트라디오포럼’에서 처음 방송사에 입사한 1982년을 회상하며 꺼낸 말이다. 당시에도 라디오에 대한 위기의식과 부흥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라디오는 여전히 위기다. 달라진 것은 위기가 지상파 TV를 포함한 레거시 미디어 전체의 고민으로 번졌다는 점이다. 유명한 노랫말처럼 “‘비디오’(TV)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지만, 이제는 TV마저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에 밀리는 판세다. 하지만 '오디오 콘텐츠’로 관점을 돌리면 형세는 달라진다. 영상의 시대에도 전 세계 오디오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다. 이제 라디오는 ‘라디오 수신기’로 대표되는 하드웨어 중심의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오디오 콘텐츠 생태계를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오디오 콘텐츠를 생산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지도 모른다. 

낮아진 매체 위상, 존립도 장담 못 해

라디오의 위기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는 라디오 이용률 하락이다. 2020년 지상파라디오진흥자문위원회가 발간한 '라디오 방송 진흥을 위한 정책건의서'에 따르면, 라디오 이용 빈도(해당 매체를 주 5일 이상 이용하는 비율)는 2010년 16.2%에서 2019년 8%로 하락했다. 매체 중요도(해당 매체를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는 같은 기간 3.3%에서 0.4%로 하락했다.

▲ 라디오를 주 5일 이상 이용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2010년 이후 10년 사이 50% 넘게 하락했다. ⓒ 지상파라디오진흥자문위원회 '라디오 방송 진흥을 위한 정책건의서'

라디오 시장 규모도 빠르게 축소하고 있다. 2010년 3373억 원에서 2019년 2933억 원으로 13% 감소했다. 전체 방송 매체 중 가장 큰 감소세다. 주요 수입원인 광고 시장의 위축도 심각하다. 라디오 광고 시장은 2010년 2541억 원 규모였는데, 2019년엔 1608억 원으로 36.7%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체 방송 광고 시장 감소율(10.2%)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다.

광고 감소는 라디오 채널을 운영하는 방송사의 경영 수지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심각하다. 2010년과 비교하여 2019년 영업이익이 감소한 방송사는 49개 방송사 중 35개에 달한다. 라디오 방송사 영업이익은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이며 이로 인한 부채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수치는 라디오가 지닌 매체 영향력에 대한 염려를 넘어 생존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악화한 경영 수지가 개선되지 않으면 라디오 방송사는 머지않아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이를 것이다.

OTT 등 뉴미디어의 등장과 스마트 기기 보편화 등으로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면서 전통적 방식의 라디오 이용률은 하락하는 추세다. 최상훈 한국방송협회 정책협력부장은 "라디오 이외에 미디어 소비자들의 흥미를 끄는 대안들이 등장하면서 라디오 산업에 상대적인 침체가 발생했다"며 "지상파 TV의 광고 매출 감소가 그와 연계된 라디오 광고 매출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라디오는 혼자 죽지 않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0 언론수용자조사’에서도 2011년 34.6%이던 라디오 이용률이 2020년 16.5%까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조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같은 시기 종이신문과 잡지 이용률 또한 급격히 하락했다는 점이다. 라디오 이용률 하락 원인은 레거시 미디어 전반의 하락 추세 속에서 진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 이후 매체와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라디오 이외에 이제 수많은 엔터테인먼트 대안들이 생기면서 라디오 이용률의 하락 또한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그러나 신원섭 KBS 라디오 편성기획 국장은 수용자가 미디어를 이용하는 패턴이 변화하면서 10년쯤 전부터 라디오를 포함한 TV, 신문, 잡지 등의 레거시 미디어 이용률이 꾸준히 하락했지만, 라디오 콘텐츠 자체는 다른 레거시 미디어에 비해 크게 하락하지 않았다고 본다. 최상훈 한국방송협회 정책협력부장도 라디오 산업이 침체한 것은 맞지만,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본격화되기 전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침체라고 보고 있다. 

최 부장은 지상파 TV의 광고 매출 하락이 라디오의 침체를 가속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라디오의 광고 수익은 지상파 TV와 연계돼 일정 부분 확보돼 왔는데,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 글로벌 OTT의 부상으로 TV가 광고 경쟁에서 밀리면서 라디오의 몫 또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경영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침 시사 프로그램이나 음악 프로그램 등 라디오 콘텐츠 자체에 대한 고정된 청취 층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레거시 미디어 전반의 이용률은 하락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2020미디어수용자조사'

오디오 콘텐츠 전성시대

레거시 미디어 전반이 침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오디오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2021년 상반기 돌풍을 일으킨 ‘클럽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3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클럽하우스는 음성을 기반으로 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기존 이용자의 초대가 있어야 가입할 수 있는 특성에 더해 ‘대화방’이라는 유례없는 오디오 기반 서비스는 대중들에게 참신하게 다가와 이 서비스는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클럽하우스를 시작으로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음성 기반 SNS 시장에 뛰어들었다. 트위터의 ‘스페이스’에 이어 페이스북은 이번 여름 ‘라이브 오디오 룸’을 선보일 예정이다. 카카오도 지난달 8일 다자간 음성 소통 플랫폼 ‘음(mm)’을 출시했다.

‘스푼 라디오’나 ‘윌라’ 등 음성 기반 콘텐츠를 제공하는 온라인 기업들의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는 지난해 동기 대비 18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지난 2019년 220억 달러(한화 28조8600억 원)이던 오디오 콘텐츠 시장 규모는 오는 2030년 753억 달러(한화 85조 890억 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신 국장은 “음성 기반 기업이나 서비스의 가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오디오 수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시장 진입 시기나 대중의 니즈를 제대로 맞추면 오디오 콘텐츠는 여전히 충분한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글로벌 투자은행 UBS에 따르면 글로벌 오디오 콘텐츠 시장은 연평균 2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오디오 콘텐츠 수요 증가에 따라 국내에서도 네이버 오디오 클립이나 팟빵, 윌라 오디오북 등의 플랫폼 사용자 수와 이용 시간이 점차 느는 추세다. ⓒ Pixabay

오디오 콘텐츠 열풍 속에서 지상파 라디오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개별 방송사가 개발하고 운영하는 라디오 앱이 대표적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앱을 이용한 라디오 이용자가 증가했다. 라디오 수신기에서 FM 주파수를 맞춰서 방송을 청취하는 이용자는 감소했지만, 스마트폰 앱으로 라디오에 접근하는 사람은 증가한 것이다. KBS는 스마트폰에서 라디오를 듣는 비율이 2010년 3.0%에서 2020년 10.8%로 증가했다. 최 부장은 라디오가 광고주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로 접근할 수 있는 라디오 플랫폼이 지금보다 더 강화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자동차 내부 소프트웨어로서 라디오 활성화 방안도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 라디오 이용자 다수가 주행 중 자동차 안에서 듣기 때문에 미래 운송수단과 협업한다면 라디오 역시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자동차는 오늘날 라디오 청취자들과 라디오 방송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접점이다. 2019년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라디오 이용 장소와 청취 방식을 묻는 질문에서 각각 "자가용"(72.8%)과 "실시간 자동차 라디오 청취"(73.8%)가 가장 높은 응답을 기록했다. 사진은 자동차에 설치된 라디오 수신기. ⓒ 김동우

디지털 전환으로 활로 찾은 해외

해외 라디오 시장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남는 전략으로 ‘디지털 라디오’를 택했다. 디지털 라디오는 오디오를 디지털 신호로 압축해 전송하는 기술 표준이다.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고품질의 오디오를 보낼 수 있고 채널을 쉽게 신설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주파수를 다르게 맞춰야 하는 불편도 해소할 수 있다.

영국은 라디오 청취율이 약 90%에 이르는 ‘라디오 강국’이다. 영국에서는 정부가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디지털 라디오 사업을 추진했다. 2009년 6월 영국 문화미디어스포츠부와 산업혁신기술부는 글로벌 디지털 경제를 주도할 미래 전략을 담은 보고서(Digital Britain: final report)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Going Digital'(디지털을 향하여)이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방송의 향후 정책 비전을 ‘방송사와 청취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디지털 라디오 방송’으로 설정했다. 보고서 발간 이후 영국 문화미디어스포츠부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디지털 라디오로 전환하기 위한 세부적인 임무와 추진 체계를 담은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 미디어 규제 기구인 오프컴(Ofcom)은 2010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디지털 라디오 현황을 발표했고, 지난 12년 동안 영국의 디지털 라디오 청취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RAJAR(영국의 라디오 청취율 측정 기관)에 따르면, 영국의 작년 1분기 디지털 라디오 청취율은 58.6%로 2009년 1분기 20.1%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지난 12년 동안 전체 라디오 청취율도 88%~90%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 영국이 2009년 6월에 발표한 보고서. 라디오 부문은 ‘Going Digital’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 Digital Britain: final report 갈무리

디지털 라디오는 송출 방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적 변화와 더불어 콘텐츠 변화도 수반한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199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라디오 기술을 적용한 후 지속해서 디지털 라디오의 범위를 확장했다. 2002년 디지털 라디오 전용 채널을 개설하고 이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해 전 세계에서 BBC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라디오, 팟캐스트 등을 통합해 모바일 기기에서 이용할 수 있는 ‘BBC Sounds’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다. 플랫폼 이름을 ‘Sounds’라고 지은 것을 통해 전통적인 라디오 방송에서 오디오를 다루는 콘텐츠로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실제 BBC는 디지털 전용 채널에서 전통 라디오로는 시도하지 않았던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BBC 1Xtra는 흑인 음악 전용 채널이고, BBC Asian Network는 18~34세 영국아시아인의 삶과 관심사를 반영한 콘텐츠를 만든다. 콘텐츠의 특성에 맞게 주요 청취자층을 세분화해 더욱 다양한 청취자층을 포섭하기 위한 시도다.

미국도 라디오 콘텐츠의 디지털화를 추진했다. 미국 라디오 방송사는 스트리밍, OTT 등 새로운 미디어 소비 환경에 걸맞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에 적극적이다. 2014년 언론계 디지털 전환의 교과서가 된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를 번역한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은 디지털 환경은 방송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내용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주어진 방송 시간을 채우기 위해 넣어야 했던 불필요한 내용을 제거하고 핵심만 남길 수 있다는 뜻이다. 박 발행인은 라디오 디지털화는 콘텐츠에 대한 접근을 새롭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사연과 음악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전통적인 라디오 포맷에 획기적인 변화를 디지털 라디오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라디오는 기술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미래는 청취자 곁에 있다

라디오의 미래를 위해 라디오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현재 방송국마다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라디오 앱을 통합하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 ‘미니’(MBC) ‘콩'(KBS) ’고릴라’(SBS) ‘레인보우’(CBS) 등 라디오 앱을 하나의 앱으로 통합하여 청취자들이 모든 방송사의 라디오 채널과 프로그램에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로 개별 앱의 설치 및 실행에 대한 불편함, 배터리 소모 문제, 데이터 이용 부담, 앱 조작 어려움 등을 해소함으로써 이용자는 편리하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 청취자가 다양한 라디오 채널과 방송에 더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현재 개별 방송국이 운영하는 '라디오 모바일 앱'을 통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 스마트폰 화면 갈무리

오랫동안 논의 수준에 머무는 디지털 라디오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디지털 라디오 전환에 대한 논의는 1997년부터 이어지고 있지만, 라디오 시장 축소로 방송사는 막대한 디지털 전환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소비자가 비용 지출과 번거로움 등을 이유로 디지털 라디오 수신기 구매를 꺼리면 방송사가 들인 투자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청취자가 기기 구매 없이 기존 장치를 활용해 디지털 라디오를 수신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이 있다. 이미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어 다채널 방송 송출이 가능한 TV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채널의 일부를 디지털 라디오 방송을 위한 오디오 채널로 운영하도록 정부에서 허가하면, 추가적인 비용 지출 없이 가정에 설치된 TV가 디지털 라디오 수신기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라디오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있다. 방송 청취를 위한 전파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안테나와 칩을 통해 직접 수신하되, 이동통신 데이터를 통해 다양한 쌍방향 서비스도 동시에 제공하는 방식의 라디오다. 데이터 사용 없이 스마트폰으로 라디오를 실시간으로 청취하면서 한편으로 게시판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방송에 사연을 올리거나 선곡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 배터리 사용량이 적고, 재난 상황 시 통신망 상태와 무관하게 재난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국내에서는 CBS가 2019년 이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쉽게 라디오에 접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동형 오디오 콘텐츠에 대한 선호가 증가하고 있고, 재난방송 등 실생활 활용도도 높기 때문이다. 오디오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모든 플랫폼으로 라디오의 개념을 확장하는 일은 이제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편집 : 김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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