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비트코인'

▲ 임경민 기자

19세기 독일의 역사학파 경제학자 게오르그 크나프(Georg Knapp)는 <화폐국정설>에서 ‘화폐는 법의 산물’이라고 했다. 카를 멩거(Carl Menger), 발라(Leon Walras) 등에서 이어져 온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상품화폐론’(theory of commodity money)과 대척점에 있는 주장이다. 상품화폐론은 화폐가 시장에서 교환의 매개 역할을 하는 재화의 한 종류로서 희소성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본다. 상품화폐론자에 따르면 화폐는 시장의 수요·공급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반면 크나프를 계승한 ‘국정화폐론’(theory of state money)은 화폐의 기원을 시장이 아닌 국가와 사회의 운영 과정에서 찾는다. 화폐는 시장경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 바빌론 문명이나 수메르 문명 등 고대 중앙집권국가가 지대와 조세를 쉽게 계산하려고 고안했다는 것이다. 화폐의 시초는 가축이나 곡식 등 현물의 형태를 한 조세의 명목 가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된 ‘계산화폐’이며, 사회구성원에게 조세 납부를 강제할 수 있는 국가권력을 통해 그 가치가 유지된다는 것이 국정화폐론자의 주장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등장한 비트코인은 국가 주도 중앙집권적 통화제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비트코인은 모든 참여자의 거래가 각 참여자의 정보 저장 단위인 노드(node)에 전달되는 블록체인(block chain)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지출된 코인은 비트코인 네트워크 사용자(채굴자) 중 과반수의 노드에서 유효한 거래라는 승인을 받아야 거래 상대방에게 전송된다. 개인간 거래를 중개하는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는, ‘탈중앙화’한 거래 시스템이다. 비트코인 개발자로 알려진 사토시 나카모토는 9쪽짜리 논문 ‘비트코인: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에 이렇게 썼다.

'(P2P 결제 시스템의 한계에 따른 이중지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각 거래가 이중지불이 되었는지 신용해주는 중앙기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각 거래 후에, 그 화폐는 다시 새로운 화폐로 찍어내기 위해 중앙기관으로 회수되어야 하고, 이중지불이 아니란 걸 믿을 수 있도록 중앙기관에서만 직접 화폐를 발행하여 쓰도록 한다. 이러한 방법의 문제는 화폐 시스템 전체가 바로 은행 같은 중앙기관에 모든 거래 내역이 거쳐가도록 하는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토시가 논문에서 기존 금융시스템을 비판한 유일한 대목이다. 그는 지면 대부분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P2P 결제 시스템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 대신, 관련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에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은행도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은행들은 신용 버블이라는 흐름에서 함부로 대출했다.’

2010년경 그는 종적을 감췄으나, 탈권력 전자화폐라는 구상은 사이퍼펑크(Cypherpunk)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이퍼펑크는 대규모 감시와 검열에 맞서 자유를 지키려는 방편으로 온라인에서 암호화 기술을 활용하는 사회운동가를 말한다. 케이시와 비냐가 쓴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화폐와 정보의 지배력을 소수의 강력한 엘리트층으로부터 그 네트워크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이양하며, 그들의 자산과 능력을 되찾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때 ‘소수의 엘리트층’이란, 발권력을 가진 국가와 금융 서비스를 주도하는 은행 시스템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적 통화체계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분권화한 신용 시스템을 새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비트코인은 발표 당시 목적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 최초 버블 현상으로 일컬어지는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과 함께 거론되며 가격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발표 직후 비트코인은 1 BTC 당 약 0.0025달러였으나, 올 4월 한화로 약 8천만원을 찍으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고 이후 3천만원 선까지 폭락했다가 27일 현재 4천만원 선으로 다시 올랐다.

2011년도에 마운트곡스 등의 거래소를 통해 거래가 활발해진 뒤 비트코인 가격 변화는 우상향 곡선을 그려왔으나, 2010년부터는 상승폭이 900만배 수준으로 커져 비정상 상태를 보였다. 가격 급등락이 하룻밤 새 20%를 오가는 등 전통 자산시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대체로 나스닥 지수를 따르긴 하나 코로나19 이후 세계적 초저금리 기조가 지속되자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광받으며 가격이 폭등했고 각국의 규제에 따라 강한 변동성을 보인다. 중국, 미국, 유럽연합 등을 중심으로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 도입을 추진하며 민간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거래소 단속이나 과세 논의 등을 통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가격 하락이 지속되는 추세다.

비트코인과 그 밖의 알트코인(Altcoin)들은 화폐 가치를 국가가 보증한 사회적 신용이 아니라 시장에서 희소성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는 ‘상품화폐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비트코인은 발행 당시의 설계에 따라 채굴량(발행량)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희소성을 담보한다. 상품화폐론에서 ‘신용’이란 철저하게 개인의 선호와 상호신뢰에 기반해 형성되는 것이다. 한번 교환 매개로 인정된 화폐가 앞으로도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이 신용을 보증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화폐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빠져 있다. 화폐의 탄생과 존속이라는 배경에 개인간 관계뿐 아니라 국가·사회라는 집단간 관계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생략해, 국가내 중앙은행이나 국가간 금융기관의 성립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암호화폐 거래 생태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사회적 관계를 생략한 통화체제는 존속하기 힘들다는 현실의 문제도 있다. 최초에는 비트코인 채굴과 거래 과정에서 모든 참여자에게 공평한 권력이 분배됐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소수 채굴장과 거래소 및 소수 자본가가 거래를 주도하는 모양새가 됐다. 초기에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암호화폐 전문가와 일반인의 지식 격차로 발언권에 차이가 났고, 비슷한 맥락에서 비대칭정보에 기반한 채굴자(공급자)와 구매자라는 일종의 계급이 생겨나고 고착됐다. 이제 대부분 사람들은 ‘거래소’라는 중개기관을 통해 구매자로서 비트코인 네트워크에 참여한다. 정부의 암호화폐 과세 방침에 반발하는 개인 투자자들은 시장이 국가와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나, 크나프는 반박한다. ‘화폐는 법의 산물’이라고.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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