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낙태’

▲ 김정민 기자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대학생 가비타는 불법 임신 중절을 하려고 친구 오틸리아와 함께 허름한 모텔을 찾는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불법임신중절시술업자 베베를 만나지만 가비타가 임신 2개월차라고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나 위기에 처한다. 베베가 가비타의 배를 보자마자 4개월을 넘긴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겁에 질린 둘은 돈을 더 주겠다고 사정하지만 베베는 자신이 다 큰 아기를 죽일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적다며 성상납까지 요구한다. 불편한 침묵이 흐른 뒤 망설이던 오틸리아는 가비타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 잠시 후 가비타는 간신히 임신중절시술을 받는다. 

영화는 1980년대 차우셰스쿠 정권 치하 루마니아에서 낙태하려는 여성들이 얼마나 적나라한 폭력에 노출됐는지 숨막히는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차우셰스쿠 정부는 피임과 낙태를 철저히 금지했고 주기적으로 임신 여부를 검진하는 ‘생리경찰’과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에게 ‘금욕세’라는 세금까지 물렸다. 임신을 피하지 못한 여성들은 원치 않은 아이를 낳거나 목숨을 걸고 낙태시술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루마니아에서 임신중절이 금지된 1966년~1989년까지 23년 동안 해마다 500여명이 불법임신중절시술로 사망하며 모성사망비가 7배로 치솟았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의 임신출산 통제는 여성들 건강과 생명을 크게 해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국가가 왜 여성의 임신출산을 통제했을까? 태아의 생명이 소중해서? 낙태는 살인이라서? 답은 ‘아니다’. 근대국가에서 출산과 낙태는 인구조절정책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차우셰스쿠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임신을 강요하고 낙태를 금지했다. 중국은 2015년까지 산아제한정책을 사용해 인구를 줄였다.

▲ 국가의 인구통제정책은 실존하는 여성의 삶을 궁지로 내몰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아이를 낳거나 없애야 했다. ⓒ 영화 <4개월,3주 그리고 2일>

한국 정부는 1973년 비상입법절차를 통해 제한적 낙태허용 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을 제정해 낙태를 통한 인구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공공의료 지원 예산이 부족하고 태아 생명 수호라는 사회윤리적 규범의 영향으로 낙태를 완전히 합법화하지는 못하고 ‘처벌하지 않는’ 방식으로 묵인한다. 1970년대 정부는 ‘먹는 입’을 줄여야 한다는 판단 아래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내용의 표어를 걸고 체계적으로 낙태를 종용한다. ‘태아의 생명권’ 논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애초 한국에서 여성이 낙태죄로 처벌받기 시작한 시기는 1912년 일제강점기 ‘조선형사령’에 의해 일본형법이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되면서였다. 600년 전에 제정된 조선시대 법도 낙태한 여성을 처벌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조선은 임신한 지 90일 넘지 않은 여성을 구타하거나 다치게 해 낙태하게 만들면 ‘상해죄’로, 90일 넘긴 여성을 낙태하게 만들면 ‘낙태죄’로 처벌했을 뿐이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은 ‘군사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했다. 

여성의 몸은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라 지속적이고 노골적인 통제를 받았다. 2016년 말 박근혜 정부는 저출산대책으로 지역별 가임기 여성 지도, 곧 ‘출산지도’까지 발간했다. 여성 당사자의 출산계획은 고려되지 않고 국가에 의해 마치 가축처럼 집계가 된 것이다. 게다가 ‘저출산’이라는 말 자체가 국가노동인구 감소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표현이라는 지적도 있다. 중국과 일본은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객관적인 뜻을 담은 ‘소자화(少子化)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법조문이 같은 행위를 두고 각각 어떤 단어를 써서 구분하고 있는지도 흥미롭다. 임신 중단을 범죄로 규정하는 형법에서는 ‘(떨어질 락)落’자를 사용해 부정적 어감을 드러내는 ‘낙태’라는 용어를 쓰며, 예외로 임신 중단을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에서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를 사용한다. 같은 행위를 두고 표현에 구분을 두는 것은 국가가 임신중단이라는 행위의 허용 여부에 따라 어떻게 달리 규정하는지 말해준다.

▲ 2016년 말 박근혜 정부 행정자치부는 지역별 '가임기 여성 숫자'를 기록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간한다. 이어 여성은 '아기 자판기'가 아니라는 항의가 빗발치고 '가임거부 시위'가 개최되기도 했다. ⓒ 행정자치부

문제는 형법상 ‘낙태죄’가 여전히 범죄 행위의 규범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013년에 어쩔 수 없이 낙태한 여성들 사연을 모아 <있잖아 나 낙태했어>라는 사례집을 발간했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생긴 아이, 연년생으로 생긴 아이, 집안 형편 때문에 키울 수 없는 아이, 헤어진 남자친구나 이혼한 남편의 아이, 혼외정사에서 생긴 아이 등등 이유도 제각각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음에도 죄책감과 우울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흔히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은 무책임하고, 성적으로 방종하며, 윤리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피임을 100% 통제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치 않은 임신은 여성이 일상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이다. 낙태는 언제나 조용히 속삭여야 하는 은밀하고 죄스러운 주홍글씨다. 추산되는 숫자만 기십만에 이르는 이들의 경험은 발설되지 않고 고통과 후유증은 공유되지 않는다. 수많은 여성들이 ‘우연히 발생한 사건’ 때문에 자신의 온 미래를 걸고 저울질한 뒤 고통스러운 책임을 진다. 그리고 그런 취약한 상황을 혼자 견뎌낸다. 낙태가 옳지 않은 일이나 수치스러운 ‘범죄’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낙태반대론자들은 낙태를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단순하고 폭력적인 이분법적 규범은 실존하는 여성의 삶을 벼랑으로 떠밀 뿐이다. 강간이나 기형아에 따른 낙태도 ‘살인죄’로 처벌하는 엘살바도르에서는 10대 여성 자살 원인의 절반 이상이 ‘임신’이다. 

낙태를 ‘생명권 대 자유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는 생각의 틀도 옳지 않다. 태아와 모체는 단절된 개인이 아니니까 태아의 인권과 모체의 인권은 제로섬 게임처럼 경합할 수가 없다. 태아는 단지 잉태됐다고 해서 생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독립된 개체로 생존할 수 있다. 모체는 태어날 아이의 양육환경을 비롯해 자신의 건강과 수입, 가족상태까지 종합해서 아이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최선에 가까운 선택을 한다. ‘책임질 수 없으면 낳지 않는 것’이 태아를 위한 최선의 복지일 수도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제2의 성>에서 사회가 낙태를 대하는 태도가 위선적이기 짝이 없다고 지적한다. 프랑스에서 매년 출산과 같은 수의 낙태가 이뤄질 정도로 낙태가 일반화했는데도 사람들이 낙태를 흉악하고 추잡한 범죄로 취급하며, 작가가 낙태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면 인간을 비열하고 품위 없게 묘사한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태아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이토록 열성적인 사회가 태어난 아이들에 관해서는 매우 무관심한 채 낙태한 여자만을 추궁한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뼈아프다.

▲ 보부아르는 태아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이토록 열성적인 사회가 태어난 아이들에 관해서는 매우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출산은 여성의 의무이고 양육은 여성의 사생활로 치부되는 셈이다. ⓒ Signe Wilkinson

보부아르 말대로 한국에서도 ‘출산은 여성의 의무이고, 양육은 여성의 사생활’로 취급된다. 사람들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감정이입을 하지만 그 누가 뱃속아이와 탯줄로 이어진 엄마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겠는가? 누가 양육의 책임을 떠안고 반평생을 오롯이 바쳐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사람인가? 태아의 ‘생명권’ 운운하며 강요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책임이다.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것이 마땅하다. 적절한 임신중단 조처를 받지 못해 무작정 낳은 영아를 방치하고 학대하거나 키우지 못해 유기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수술대에 눕는 여성은 없으리라.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받으며 어려운 선택을 한 여성에게 죄책감까지 심어주는 것은 옳지 않다. 낙태죄 비범죄화가 필요한 이유다. 

갈 길은 멀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유엔 인권이사회와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도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정부는 낙태죄 조문에 관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임신 14주 이내 임신중지는 허용하고, 24주 이내 임신중지는 일정한 사유가 있을 경우만 허용하기로 결정한다. 의무상담과 숙려기간도 도입된다. ‘낙태죄’를 존치하겠다는 예고다. 

일각에서는 여성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중단 허용기간을 최대 24주로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처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사가 위험성을 충분히 고지한다면 여성 스스로 자신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판단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암이나 다른 불치병은 사망 위험이 높은 수술이라도 본인 의사만 있으면 감행하는데 왜 낙태는 그러지 못하는가?  

낙태를 전면 허용한다고 해서 낙태율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안전한 낙태가 많아질 뿐이다. 캐나다는 32년째 임신중단에 관한 어떤 규제도 없는 상태지만 낙태가 ‘남용’되기는커녕 한국보다도 낙태율이 낮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12~14주로 주수제한을 규정하는 국가들은 1960~1970년대에 법을 제정한 데가 많고 2010년대 이후 법을 개정하는 대부분 국가는 낙태죄 처벌 규정을 아예 없애거나 상담 및 숙려기간을 폐지하고 있다. 한국처럼 주수제한, 사유제한, 의무상담 등 온갖 제한을 덕지덕지 붙이는 방식으로 법이 개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낙태죄 개정안의 본질은 국가가 여성의 몸에 여전히 통제권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의 비혼 출산이 화제가 된 이유는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상가족’ 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홀로 정자를 제공받아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권리인 것처럼 임신중단도 당사자의 권리다. 핵심은 여성이 오롯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문명사회라면 어떤 인간도 타인을 목숨을 위해 자신의 장기를 공유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 신체적 자유권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왜 유독 여성만 원치 않는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요받아야 하는가? 왜 여성의 몸만 자기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사회의 통제에 구속돼 아이를 품는 ‘자궁’으로 치환되는가?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여성으로 취급된다’고 말했다.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낙태죄가 존치하는 한 여성의 몸은 여전히 ‘최후의 식민지’로 남을 것이다.

자연에서 수태할 수 있는 암컷 성체는 오로지 종의 재생산을 위해 존재한다. 꿀법 군집의 여왕벌은 벌들을 이끌고 다니고 일벌의 보살핌을 받지만 실제로 군집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아니다. 노동을 통해 먹이를 조달하고 벌집의 파수꾼 노릇을 하며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성원은 일벌이다. 여왕벌의 진정한 정체는 ‘산란벌’이며 이들은 생식을 시원찮게 하면 일벌에게 숙청당한다. 생태계의 잔인한 논리다. 그러나 인간은 종의 번식과 국가의 영속을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존재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문명사회의 인간은 자기 삶을 위해 재생산을 포기하고 아이를 지울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살아갈 권리가 있다. 

▲ 미국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에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배우 로즈 번). ⓒ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런던의 의사인 존 샤프 박사는 1957년 인도로 가는 길에 낙태를 의뢰하러 온 스물두 살 미국 여성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다. 그는 그 여성에게 “누구한테도 내 이름을 말하지 말고, 살면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고 당부한다. 그 여성은 나중에 20세기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이자 저널리스트가 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이었고 2016년 발간한 자서전 <길 위의 인생> 서문에 이렇게 썼다.   

“샤프 선생님, 선생님은 당시 법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저는 살면서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타이넘이 파혼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더라면 미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길 위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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