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 무분별한 익명보도 줄일 구체적 조치 필요

1970년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딥 스로트’(Deep Throat)라고 불린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닉슨 대통령의 불법 도청 사건을 보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중요한 정보가 내부 고발자인 익명의 취재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처럼 익명 취재원으로 진실에 다가간 보도도 있지만 익명 취재원을 조작해낸 보도도 있다. 2003년 5월 11일 미국 <뉴욕타임스> 1면은 자사 기자인 제이슨 블레어(Jayson Blair)가 그동안 어떻게 인터뷰를 조작하고 다른 언론의 기사를 표절했는지 밝히며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제이슨 블레어가 익명의 취재원을 근거로 보도한 기사에 나오는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와 가족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로 드러났다. 

▲ <뉴욕타임스> 제이슨 블레어 기자가 2003년 다른 사람이 한 인터뷰를 표절해서 쓴 기사 ⓒ <뉴욕타임스>

위기를 혁신으로 극복한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는 제이슨 블레어 기사 조작 사건을 계기로 익명 취재원 보도와 관련한 윤리 규정을 재정비했다. <뉴욕타임스>는 2005년 “독자의 신뢰 확보”(Preserving Our Readers’ Trust)라는 문건에서 익명 보도를 하려면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첫째는 믿을 만하고 뉴스 가치가 있는 정보를 실명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다음으로 그런 정보는 보도를 늦출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시급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 정보를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을 때이다.

<뉴욕타임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절차도 명시했다. 기자는 취재원에게 적극적으로 실명 보도를 요청하고, 데스크는 기자가 실명 취재원을 찾도록 촉구하라고 돼 있다. 익명 보도가 불가피하면 기자는 익명취재원에 관한 정보를 반드시 데스크에게 전달해야 하며, 편집 간부들은 익명 취재원의 신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데스크가 익명 취재원의 신원을 알아야 기자의 취재원 조작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 데스크는 불필요한 익명 보도는 추가 취재를 지시해 실명 보도로 만들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언론사 차원에서 기자의 불필요한 익명 보도를 막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도 익명 보도를 완전히 금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익명보도를 할 때, 기자는 익명 취재원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고, 왜 이 정보를 제공하는지, 익명으로 보도해도 될 자격이 있는지를 독자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실명 취재원을 찾다 보도가 늦어지더라도 취재원 인용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다. 특종에서 잃게 될 손실보다 독자의 신뢰를 지키는 데서 오는 가치가 더 크다는 확신에서 나온 정책이다.

한국의 익명보도는 믿을 수 있나  

한국에서도 인터뷰 조작 사건이 있었다. 부산경남 지역 민영방송인 KNN의 한 기자는 2018년 부산신항 관련 기사에서 자기 목소리를 변조해 부산항 터미널 관계자, 정부 관계자 등의 인터뷰인 것처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방송사는 중징계를 받았고 기자는 해고됐다. 이처럼 언론에서 익명 보도는 중요한 내부 정보를 전할 수 있는 길이면서 조작 가능성이라는 위험성을 지닌 것이다.

인터뷰 조작 사건이 있어도 한국 언론사는 <뉴욕타임스> 같은 변화는 없었다. 한국은 취재 여건과 실명 보도를 다루는 법적 기준이 미국과 달라 <뉴욕타임스>의 방식을 온전히 따르기 어렵다. 한국에서 익명 보도를 쉽게 접하는 배경에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특성도 한몫한다. 시민들은 익명 보도를 비판하지만 막상 취재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은 가려달라고 한다. 별로 예민한 내용의 인터뷰가 아니라도 보도가 된 뒤 예기치 못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실명 보도로 법적 소송에 걸릴 수 있는 기사에서 익명 보도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익명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처럼 기자와 데스크가 함께 익명보도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가피하게 익명보도를 하더라도 취재원의 신상을 데스크가 확인해 최소한 인터뷰 조작은 없어야 한다. 

신문윤리강령과 함께 언론윤리 규정을 공개한 <조선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KBS>, <JTBC>의 언론윤리 규정을 찾아봤다. 

▲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채택한 신문윤리강령 제5조에 명시된 익명 보도의 조건 ⓒ 한국신문협회

신문윤리강령에는 실명보도를 원칙으로 하고 익명보도는 예외로 두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익명보도는 줄이고 실명보도를 늘리는 방법은 명시돼 있지 않다. 기자가 데스크에게 익명 취재원의 신상을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도 없다. 

언론윤리 규정을 찾아본 5개 언론사는 모두 실명 표기를 원칙으로 하고 예외로 익명보도를 인정했다. 데스크가 기자와 함께 익명보도를 최소화한다는 조항은 5개 언론사 모두 없었다. 또 <조선일보>, <한겨레>, <JTBC>의 윤리규범에는 익명 취재원에 대한 신상을 부서장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반면, <한국일보>, <KBS>에는 이 조항이 없다. 

물론, 언론윤리 규정에는 없어도 내부적으로 데스크가 기자와 함께 익명보도를 줄이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익명 취재원의 신상을 데스크에게 보고하는 절차 역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언론윤리 규범으로 명시해 기자들이 자사의 언론윤리를 실천하는 노력을 독자와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매일 신문과 방송에는 익명의 관계자가 수없이 등장한다. 국민들이 한국 언론의 신뢰가 낮은 상황에서 익명 관계자가 누구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익명 보도의 기준이나 내부 절차라도 명시해놓고 이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시청자와 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가 아닐까?

익명 보도 때문에 크게 혼쭐이 난 <뉴욕타임스>는 “신뢰를 훼손하는 주범”이라고 명시해 놓았을 정도로 익명 보도가 언론의 신뢰도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도 언론윤리 규범에 익명 보도에 대한 내부 절차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익명 보도가 불가피한 경우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부 확인 절차를 거쳐 보도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기사에 나온 출처가 명확할수록 기사를 읽는 독자에게 신뢰감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노력이 하나씩 쌓이면 한국 언론의 신뢰도 자연스레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 : 방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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