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에 가족 등 돌리고 백혈병 재발에 지원 끊겨 절망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 4부] 아프면 망한다

어린 남매 잇단 발병에 남편과도 멀어져

바람이 조금만 차다 싶으면 어린 종호(11ㆍ가명)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에게 곧잘 전화를 걸었다.

“할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보일러 사줄게요.”

친가 식구들은 정 많은 종호를 유난히 예뻐했다. 종호가 아프기 전엔 화목했던 가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9년, 9살이던 종호가 병색이 완연해진 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종호 아빠가 ‘애들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한 탓인지 친가 어른들도 전 같지 않았다. 
  
딸 은희(10ㆍ가명)가 지난 2004년 ‘미토콘드리아근병증’ 판정을 받아 병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차차 나아질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종호까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서영미씨(37ㆍ가명)의 신경이 온통 아이들에게 쏠리자 아빠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아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아내가 자신에게 소홀하다고 투정했고, 아픈 아들이 ‘보고 싶다’고 전화해도 일이 바쁘다며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픈 애들이 정신이 들면 늘 아빠를 찾았어요. 며칠 만에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애 아빠랑 떨어져 산지 2년 정도 됐는데요, (애들이) 차라리 모르고 이렇게 지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 엄마 서영미씨가 건강한 남매의 사진을 보고 있다. ⓒ 정혜정

아이들이 앓고 있는 미토콘드리아근병증은 몸속에서 에너지가 잘 만들어지지 않고 근육에 전달되지 않아 서서히 무력해지는 증상이다. 종종 심한 두통과 경기, 발작을 동반한다. 모계 유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씨도 아직 본격적으로 발병하진 않았지만 잠재적 인자를 갖고 있다. 두 아이는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럴 만한 병원이 본래 살던 경북 영주에는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은희를 업고 다니는 길이 늘 까마득했다. 종호까지 발병한 뒤에는 더욱 힘들어졌다. 지난해 10월, 서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인천에 있는 여동생네로 거처를 옮겼다. 

▲ 종호는 하루종일 침대형 휠체어에서 생활한다. 종호가 좋아하는 장난감 차가 휠체어에 놓여있다. ⓒ 정혜정

방 2개짜리 52m²(16평) 남짓한 곳에서 여동생과 세 식구가 함께 살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편하다. 종호는 병의 진행속도가 빨라 현재 말도 못하고 잘 움직이지도 못하며 청력만 조금 남아있는 상태다. 은희는 ‘엄마, 물’ 정도의 간단한 의사표현을 한다. 둘 다 제대로 걷지 못한다. 서씨도 ‘약간 금이 간 정도’로 건강에 이상이 있지만 두 아이들 때문에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다.

종호는 초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진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2009년 상태가 나빠진 뒤부터는 집과 병원만을 오간다. 처음에는 아이들 교육을 걱정했던 서씨지만 이제는 이렇게라도 아이들이 살아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소망한다.

“종호가 기차를 타고 싶어 했어요. 애들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여행을 못 간 게 아직까지도 미안하고 가슴 아파요. 기차타고 여행가자고 종호가 며칠을 졸랐는데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못 갔거든요. 혼자서라도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것 많이 보여줄 걸 그랬어요.”

▲ 활동보조선생님과 함께 쓰는 종호의 성장일기. ⓒ 정혜정

인천으로 온 뒤 복지시설과 연결되면서 좋아진 점이 많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뒤척이는 것도 힘들었던 종호가 동사무소에서 지급한 욕창방지용 매트 위에서 생활하면서 조금씩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공립 정신지체인 교육시설인 인천 A학교의 활동보조선생님이 1주일에 4번, 하루 50분씩 직접 집에 와 음악 치료와 만들기 수업을 함께 해준다. 은희는 계양구의 B복지관에서 재활치료를 받는데, 복지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계양구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5만원의 복지관 이용료를 지원해준다. 여기서는 석 달에 한 번 남매가 병원에 갈 때 차량을 내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인천에서 서울까지 7500원만 내고 갈 수 있어 좋지만 돌아올 때는 일반 택시를 이용해야 해 부담이 크다. 

정부지원금 140만원으로 약값, 분유값에 생활비까지 

종호네는 기초생활수급비 40만 원과 두 아이 분 장애수당 100만 원 등 월 140만원을 정부에서 지원받는다. 지원금 대부분은 아이들 약과 분유값으로 쓴다. 두 아이가 일반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특수 분유 2통을 사야 한다. 1통에 4만원 하는 분유와 기저귀 값으로 한 달에 50만 원 가량이 든다. 남매는 미토콘드리아근병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 중에서도 심각한 상태라 챙겨 먹어야 할 약이 많다. 특히 ‘데카키논’은 필수적으로 먹어야 할 치료약인데 남매의 약값이 석 달에 130만원 정도 든다.

▲ 미토콘드리아근병증 치료를 위해 먹는 약(왼쪽)과 특수분유. ⓒ 정혜정

'데카키논'과 '엘칸'은 미토콘드리아근병증을 완치시킬 수 있는 약은 아니지만 병의 속도를 더디게 해주는 유일한 치료제다. 지금은 이 약이 보험처리가 돼 환자가 30%만 내면 되지만, 2009년까지는 약값의 100%를 부담해야 했다. 심장병 환자의 경우 ‘데카키논’을 보험 적용하지만 미토콘드리아근병증에 대해서는 유효한 치료제라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적용을 안 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토콘드리아근병증 환자 가족들이 2007년부터 2년 반 동안 눈물겨운 투쟁을 벌인 끝에 보건복지부로부터 보험적용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약이 나와 있는데도 너무 비싸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환우 10명이 세상을 떠난 일은 환우 가족들 사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 코를 통해 특수분유를 섭취하고 있는 종호. ⓒ 정혜정

남편에게 받는 돈이 없고 고정적인 수입이라고는 정부지원금뿐인 상황에서 생활비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만 서씨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두 아이 중 하나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데려가야 할 때 나머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쩔쩔맬 때도 있다. 함께 사는 동생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 부탁할 수가 없다. 살 곳을 내준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도록 집안 청소라도 열심히 하는 게 현재로선 서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이를 맡길 곳이 있다면 아픈 애를 좀 더 빨리 치료받게 할 수 있을 텐데, 주위에 마땅한 보육시설이 없는 게 아쉬워요.”

엄마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애들은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담당 의사는 “아이들의 뇌혈관이 일반인에 비해 미세하고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힘든 상황이 온다”며 서씨가 늘 가까이 있어줄 것을 당부했다. 담당 의사는 종호네 어려운 사정을 알고 환자가족 지원금으로 200만원을 병원에서 후원받게 해주었다. 

▲ 힘이 빠진 종호를 안아주는 엄마 서영미씨. ⓒ 정혜정

“차라리 암이였으면 수술이라도 하고 고칠 수 있을 텐데...... 이 병은 수술도 안 되고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주위에서 얘들은 미래가 없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다고들 말 하지만 그런 말에 얽매이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해요.”

서씨는 종호의 상태가 많이 나빴을 때 절망스런 마음에 영정사진까지 찍어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고 있어 ‘내일도 오늘 같기만 해라’ 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마흔을 넘기기 힘들다고 알려진 병이지만 의학의 발달에 기대를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의료민영화니 뭐니 해서 치료비 부담이 커지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고,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돌보는 데 지금보다는 덜 고생스럽도록 복지제도가 확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스무 살 넘었다고 지원 중단... 저는 그냥 죽어야 하나요”
 
“제 피가 아닐 거라고 했어요. 다시 검사하겠다고 응급실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죠. 백혈병이 재발하면 더 독한 약을 써야한다고 들었는데, 치료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치료받기 싫으면 같이 한강에 빠져 죽자는 거예요. 둘이 죽으면 아빠랑 남동생은 산다고....... 억울했어요. 이 나이에 죽기는 싫었어요. 눈물을 닦고 엄마한테 말했어요. 다시 치료받겠다고요.”

지난 2010년 6월, 박수민씨(22)와 어머니 함은희씨(47)는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이제는 완치됐다는 소식을 기대하면서 채혈을 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얘길 들었다. 백혈병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처음 발병했을 때보다 충격이 더 컸다. 수민씨는 독한 항암치료를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설움이 복받쳤다.

▲ 중학교 때 백혈병이 발병한 수민씨는 지난해 병이 재발해 다시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하지만 성인(만18세 이상)이 되면서 정부 의료비 지원이 대폭 줄었다. ⓒ 박수민

지난 2004년 처음 백혈병이 발병한 뒤 수민씨네는 병원치료비로 많은 빚을 졌다. 2004년 한 해 동안 치료로 1000여만원이 들었다. 그나마 2005년 정부의 암환자 의료지원이 확대되면서 수민씨가 항암치료를 받던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어렵지 않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혈병이 재발한 뒤에는 다시 많은 병원비를 부담하게 됐다. 그가 성인이 돼 국가의 의료비지원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의료급여 수급권자’에게 만 18세까지는 연간 최대 3000만 원을 지원하지만 19세부터는 한 해 최대 220만 원으로 줄어든다. 수민씨네는 그동안 쌓인 빚만 2000만 원이 넘는데, 앞으로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수술비가 4000만 원이 든다고 한다. 빚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 6월 수민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분홍색 털실로 짠 털모자를 벗어 보였다. 민머리가 드러나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올해 스물 두 살의 여대생. 대학 3학년이던 지난해 6월 백혈병이 재발해 힘겨운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작년 7월쯤이었어요. 항암제를 맞고 나서 병원에서 머리를 감았는데 머리카락이 죽죽 빠지는 거예요. 눈썹까지 다 빠졌어요.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입원실에 있던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랐어요. 한 남자아이는 제 머리를 보고 ‘골룸’이라고 놀렸어요.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는 게 아니라 듬성듬성 남았거든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나니까.”

▲ 박수민씨가 지난 3월 촬영한 증명사진. ⓒ 박수민

재발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절망했지만 수민씨는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힘들어 할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앓고 있는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우리나라에서 흔한 편인 혈액암이다. 림프구에 이상이 생겨 발병하고 소아의 경우 완치율이 70~80%, 성인은 30~40%다.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민씨 아버지 박상희(51)씨는 4급 언어장애인이다. 13년 전 퀵서비스 일을 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목을 다쳤다. 그때 이후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팔도 다쳐서 힘쓰는 일은 잘 못한다. 아내 함씨의 오빠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 일을 도와주며 돈을 벌고 있다. 함씨는 수민씨를 간호하느라 옆을 떠날 수 없다. 기초생활수급자라 월 생활보조금 60만원이 나오는 게 수민씨네 주 소득원이다. 수민씨가 어렸을 때 들어두었던 민간암보험이 그동안 치료비에 작은 보탬이 됐지만 그 유효기간도 올해 12월까지다.

“지난해 병이 재발한 뒤 지금까지 2000만원이 넘게 돈이 들었어요. 치료비가 한 달에 적게는 80만원, 입원이라도 하는 달에는 150만원이 나와요. 보험이 안 되는 검사가 많아서요. 성인이 되면 정부에서 지원되는 의료비가 한 해 220만원인데, 그 중 120만원은 저 같은 의료보호대상자에게는 해당 없거든요. 한 해 100만원 지원이 다인 셈이죠.”

그는 단순히 나이만 갖고 치료비 지원을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에 어머니와 함께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러 보건소에 찾아갔다. 하지만 보건소 직원은 ‘여섯 살 난 아이를 살리겠냐, 예순 살 노인을 살리겠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재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어린이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의료지원 관련 협회에서도 성인은 우선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저는 소아 때 발병해서 재발한 거잖아요. 소아 때도 병원비 많이 쓰고, 성인 되면서 민간보험도 끊겼어요. 그런데 지원금이 끊기니까 ‘병원비 없어서 치료 못 받고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암치료 지원비 고작 ‘1년 100만원’

어머니 함씨는 한창 연애도 하고 예쁘게 꾸미고 다닐 딸이 아파서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다. 딸이 자고 있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난다. 힘들 때면 옥상에 올라가 소리 내어 운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병마와 사투를 벌여온 딸이 가엾어 가슴이 미어진다.

수민씨에게 처음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04년 11월, 중학교 3학년 기말시험을 마친 며칠 후였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백혈병 진단이 나왔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상태였는데 입원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결국 병원에서 고입 시험을 치렀다.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1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병원에 실려 가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제 시간에 약을 못 먹으니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억지로 깨웠어요. 8시 반까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곤 했죠. 1교시 끝나면 학교에서 전화가 와요. ‘수민이 어머니, 수민이가 또 쓰러졌어요.’ 이런 날이 반복됐고 그렇게 3년을 다녔어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꾸준히 항암치료를 한 끝에 고3이던 2007년 5월 항암치료를 마쳤다. 대학에도 진학했다. 좋아하던 역사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 사학과로 갔다. 이제 3년간 정기검진만 받으면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 긴 터널의 끝 부분에서 재발 소식을 들은 것이다. 수민씨네는 아버지의 교통사고 전만 해도 그럭저럭 살 만했지만 이후 형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해 수민씨 병 치료 과정에서 더욱 어려워졌고 지금은 빈곤층이 됐다.

▲ 함은희씨는 딸이 아픈 후 항상 그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다. ⓒ 박수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항암제를 맞고 나서 그의 고관절에도 이상이 생겼다. 지난해 10월 다리 수술을 받았다. 11주 동안 못 걸었다. 후유증으로 발가락에 감각이 거의 없다. 3년은 지나야 살짝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집에서는 기어서 다니거나 바퀴가 달린 의자로 이동한다. 어머니의 보조 없이는 밖으로 다닐 수 없다. 지난해 12월부터 지난 4월까지는 매주 월, 수, 금요일에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5월부터는 매주 한 번씩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그 외에도 항암치료로 몸이 약해져 호흡기과나 소화기과를 들락날락거리며 일주일을 보낸다. 수혈을 받고 항암제를 오랫동안 맞다보니 철분 수치가 높아져 매번 주사로 철분을 빼내기도 한다. 일주일 중 병원에 안 가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다.

병원치료도 힘들지만 매번 병원까지 오가는 것도 모녀에게는 고역이다. 강북구 미아동에서도 경사진 꼭대기에 집이 있다. 네 식구는 방 세 칸짜리 15평 규모의 집에 살고 있다. 그나마 위암 투병 중인 집주인이 동병상련을 느낀다며 싸게 빌려줬다. 하지만 구석진 골목에 집이 있어서 콜택시를 불러도 좀체 올라오려 하지 않는다. 병원에 갈 때마다 드는 택시비만 왕복 2만원, 게다가 택시기사들의 눈치를 봐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조금만 큰 길로 내려가면 택시잡기가 수월하지만 그에게는 조금 더 걷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수민씨는 병이 재발되기 전 시각장애인 봉사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이젠 친구들도 만나기 어렵다. 다시 투병을 시작한 뒤 지난 4월에 처음으로 친구들은 만났다. 예쁜 치마를 입고 나서려 했지만 불편해서 결국 트레이닝복을 입고 길을 나섰다.

“친구들을 거의 1년 만에 만났으니까 반가웠어요. 시각장애인 봉사동아리 친구들이요. 걸을 때는 힘들었죠.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제 다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어요. 옆에서 부축해주지 않으면 걷기 힘들어요. 친구들이 이해해주고 도와줘서 고맙죠. 커피숍에서 다섯 시간 내내 웃고 떠들었어요.”

▲ 수민씨는 친구들과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 박수민

최근에는 동아리 친구가 집으로 놀러왔다. 가끔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문자를 주고받는 게 그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하는 그는 병이 나으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아픈 처지에서 보니까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그 분야에서 공부하면 경험을 살려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건복지부에 들어가서 잘못된 것들은 모두 바꾸고 싶어요.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서 문제를 해결할 거예요. 우선 암환자 치료비 지원을 나이로 구분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상황을 먼저 고려할 수 있도록 바꾸고 싶어요.”

수민씨는 항암치료로 약해진 폐에 곰팡이균이 생겨 지난 8월에 수술을 받았고, 가끔 우울한 증상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혈모세포(골수)이식수술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가시에 찔린 상처 하나만 있어도 이식수술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수민씨가 스웨덴에 있었다면

수민씨네는 약 4000만 원이 드는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비를 생각하면 앞이 까마득하다. 만약 수민씨가 복지선진국 스웨덴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는 항암 치료에다 각종 약값 그리고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비까지 다 합쳐서 2700크로나(46만원)만 내면된다. 스웨덴은 국민 의료비 부담이 한 해 진료비와 약값을 합해 최대 2700크로나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소득과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몸에 쌓인 철분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조장비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수민씨네는 1년 동안 이 장비 구입비로 약 375만원을 쓰고 있다. 스웨덴은 의료 보조 도구와 기타 장치에 대해 환자부담 상한선을 1800크로나(30만7000원)로 두고 있다. 수민씨네는 약 345만원을 아낄 수 있다. 통원치료 교통비도 아낄 수 있다. 수민씨네는 일주일에 약 10만원을 택시비로 부담하고 있다. 한 해 500만 원 정도다. 스웨덴은 장거리 진료의 경우 한 해 교통비 1400크로나(23만9000원)를 넘는 부분은 정부가 모두 지원한다.

스웨덴은 세금을 많이 거둬 공공의료를 중심으로 국가보건서비스 체계를 운영한다. 재정은 지방세(71%)와 정부보조금(16%), 환자부담(3%), 기타(10%)로 구성돼 있다. 공공의료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병이 나도 의료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잘 갖춰져 있지만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실제치료비의 평균 60%선에 불과해 큰 병에 걸리면 엄청난 의료비 부담으로 가계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민간보험회사에 따로 암보험 등 실손보험을 드느라 각 가정이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고,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가정은 치료비가 없어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최근에는 정부가 추진하려는 의료민영화정책으로 건강보험당연지정제가 무너지고 의료비 부담이 증가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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