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벽’

▲ 김현주 기자

대학 합격증을 받아 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살 곳을 찾는 일이었다. 입학한 대학과 본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 걸리니 통학은 불가능했다. 기숙사는 1순위 주거 공간이었다. 학교 주변 원룸과 비교해 월세가 약간 싸고 보증금이 없었다. 다행히 기숙사 신청 공지에는 ‘서울, 경기, 인천 외 지역 거주자’를 1순위로 뽑겠다고 적혀 있었다. 혹시 몰라 기숙사 행정팀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ㅇㅇ시에 사는데 기숙사 선정이 될까요?” 담당자는 “당연히 될 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발표된 기숙사 입소자 명단에 나는 물론이고 함께 신청한 고교동창생의 이름도 없었다. 우리는 그제야 부랴부랴 살 곳을 찾으려 상경했다. 서울 집값은 비쌌다.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 딸린 집을 구하려 했는데 내가 살던 지역의 2배에 버금가는 월세를 달라고 했다. 부족한 시간과 돈에 등 떠밀린 나와 친구는 함께 살기로 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라도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집에서 매일 함께 지내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늘 서로를 신경 써야 했다. 집이 좁아 칸막이나 커튼을 설치할 수도 없었다. 이어폰을 빼고 영화를 보는 일, 같은 과 친구를 데리고 오는 일은 포기했다. 둘 중 하나가 밤 늦게까지 과제라도 하는 날엔 일찍 잠든 다른 사람은 스탠드 불빛에 방해를 받으며 잠들어야 했다. 오전 강의 듣고 오후 아르바이트 하고 집에 와도 온전한 내 공간이 없으니 답답했다. 

그 친구와 2년을 살고 난 뒤 구한 하숙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내가 살던 층에는 5개 방이 있었다. 방 사이를 분리하는 벽이 있었으니 친구와 살 때보다는 나았지만 나만의 시간을 갖기란 어려웠다. 어느 날은 옆방에 들릴까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기보다는 대답을 주로 하며 친구와 통화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옆방 언니가 시끄러우니 조용해 달라고 방문을 두들겼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그 언니가 ‘엉엉’ 우는 소리가 벽을 뚫고 내 귀에 꽂혔다. 다음 날 언니는 취업 압박에 울었는데 시끄러웠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 제대로 된 '벽'이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껏 울 수도 없다. ⓒ KBS

벽은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단절의 수단인 동시에 ‘나’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수단이다. 벽은 타인과 나의 삶을 분리해 온전한 휴식과 재충전을 보장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벽 없는 집이 너무 많다. 부촌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이 있는가 하면, 주거 취약계층이 주로 사는 쪽방촌이나 고시원에 있는 벽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대학생들이 몰려 사는 원룸촌이나 하숙집의 사정도 같다. 

제대로 된 벽이 있는 집이 필요하다. 나와 친구, 그리고 하숙집 옆방 언니가 겪은 불편은 셋 중 누구 탓도 아니다. 벽 없는 집에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문제다. 지난해 말 정부가 부동산 대책 일환으로 호텔 전세를 발표했다. 사용하지 않는 호텔을 개조해 임대하겠다는 정책이다. 비싼 임대료와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회 초년생이나 1인 가구를 위한 부동산 정책으로는 적절하다. 하지만 집은 단순히 사방이 막히고 천장과 바닥이 있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유념해야 정부의 호텔 전세가 제대로 된 벽을 갖춘 집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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