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수신료 인상 전제조건

방송통신위원회는 2020년 지상파 방송사업 재허가 심사에서 KBS 2TV의 조건부 재허가를 의결했다. 방송사업자는 4년마다 재허가 심사를 받아야 한다. 기준은 1000점 만점에 650점 이상이다. KBS 2TV는 이번 심사에서 647.13점을 받았다. 방통위가 조건부로 내건 항목 중 하나는 ‘방송콘텐츠의 공공성 제고 및 콘텐츠 차별성 확보 계획’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국민이 수신료를 내는 공영방송이 방송콘텐츠의 신선함과 공공성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방송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SBS도 조건부 재허가를 받았지만, KBS가 공영방송임을 고려하면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국민이 보지 않는 '국민방송' KBS

이번 심사에서 대부분 방송사가 650점은 넘었지만, 700점에는 미달하는 저조한 결과를 받았다. EBS(713.65점)만 예외다. 지상파방송사업자의 방송 환경이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허가 심사 기준이 변화한 방송시장에 맞게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심사기준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이 공영방송의 존재가치를 외면한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이다. 작년 청와대 게시판에는 ‘KBS 수신료 전기요금 분리 징수 청원’이 올라왔다. 동의한 인원만 21만명에 이르렀다. KBS의 존재가치가 위기에 처했다.

왜 국민은 수신료에 부정적일까? 영국 옥스퍼드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조사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에 따르면 KBS 신뢰도는 50%에 불과했다. 핀란드 Yle (84%), 네덜란드 NOS(81%), 영국  BBC(64%), 일본 NHK(60%)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치다. ‘브랜드 신뢰도' 평가에서도 KBS는 JTBC, MBC, YTN에 이어 4위에 그쳤다.

실험 정신 잃어버린 KBS 2TV 프로그램

KBS 1TV는 공익광고만 하지만, 2TV는 상업광고 수익이 허용된다. 뉴스·다큐멘터리·드라마 등 공익적 프로그램 위주로 편성하는 1TV와 달리 예능과 드라마 등의 콘텐츠를 폭넓게 편성한다. 2TV가 재허가 심사에서 낮은 점수를 얻은 까닭은 KBS가 시청자보다 KBS를 위한 콘텐츠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뉴미디어의 등장은 이런 제작 행태를 두드러지게 했다. 영화관이나 방송 채널에서나 접하던 수준 높은 외국 콘텐츠를 요즘은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은 이런 경향을 가속했다. 몇몇 방송사가 가진 콘텐츠 선별과 유통 권한을 시청자가 행사하면서 세계 각국의 콘텐츠를 국내 시청자가 직접 고르고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KBS 예능 프로그램은 ‘실험 정신을 잃은 지 오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더 추구하면서 KBS 예능에 타 방송에서 본 듯한 내용이 제목만 바꿔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 년간 재정 적자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런 유사 프로그램 제작 현상은 더 심각해졌다. <미디어오늘>은 201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상민 의원이 양승동 KBS 사장에게 “KBS조차 ‘모방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며 타 방송사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8개 이상 꼽았다고 보도했다. 

KBS 2TV가 고전하는 이유는 콘텐츠 제작에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 OTT 서비스와 각종 뉴미디어를 통해 파격적인 콘텐츠가 수없이 등장하는 가운데 타 방송사와 유사한 프로그램 제작을 고수한다면, 시청자가 KBS 2TV를 봐야 할 매력이 떨어진다. 20~40대층이 TV를 보지 않는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KBS는 작년 9월 넷플릭스에 대항해 국내 지상파 3사와 함께 통신사와 제휴해 국내 OTT 플랫폼 ‘WAVVE’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플랫폼 확장만 꾀해서는 안 된다. OTT 서비스를 통한 콘텐츠 소비시장 확장도 중요하지만, 독보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시청자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영국 BBC iPlayer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내가 본 콘텐츠’를 저장해 시청자가 영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시즈리 물인 경우 바로 다음 편을 이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콘텐츠 이용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 BBC iPlayer 화면

시대 흐름에 따라 세계 최대 공영방송 BBC도 이미 고객 맞춤형 콘텐츠를 제작해 보급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당신이 봤던 프로그램 이어 보기’와 같이 시청자의 취향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들에게 최적의 콘텐츠를 선별해 권유한다. 시의성을 띠는 ‘크리스마스에 볼만한 프로그램’, 개인의 소비성향을 파악해 ‘박장대소하고 싶을 때 보는 프로그램’처럼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재분류해 시청자가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시청자는 자신의 요구와 성향, 프로그램 특성을 분류해 제시하는 플랫폼에 꾸준히 머물게 된다.

▲ BBC는 시청자가 이용하고 '찜' 해놓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시청자의 취향을 분석해 관련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효율적으로 콘텐츠를 노출하면서 시청자가 iPlayer에 머무는 시간도 늘린다. ⓒ BBC

KBS 2TV는 분류 항목이 시청자 중심이 아니라 프로그램 중심이다. 시청자 편의보다 생산자가 중심인 ‘최신 VOD’ ’KBS 종영 프로그램’ ‘KBS 인기 프로그램’ 등으로 분류한다. KBS는 공영방송이기에 시청자가 당연히 볼 것이라는 발상에서 콘텐츠를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시대착오적 인식이다. 콘텐츠 선택의 폭이 넓어진 시청자와 방송사의 관계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의 책임과 역할보다 공영방송의 지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뉴스처럼 필수적인 정보보다 상업적인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KBS 2TV는 채널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콘텐츠의 강점을 분류해 제공할 필요가 있다. 수신료가 중요한 재원이 되려면 생산자보다 시청자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 첫 번째다.

‘국민에 의한 수신료, 국민을 위한 방송’

한상혁 방통위원장은 이번 재허가 심사 결과를 내놓으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것”도 촉구했다.  방송사가 내부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비정규직 인력을 단기로 채용해 콘텐츠를 제작하는 비효율성을 지적한 것이다. 작년 7월, 양승동 KBS 사장은  다섯 가지 핵심 내용을 담은 경영혁신안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로 조직의 활력과 건강성을 위해 신입사원은 꾸준히 채용하되 직원을 1000명 축소해 인건비 비중을 35%에서 30%로 줄이겠다고 공표했다. 수신료를 인상해 KBS 재정의 70%까지 그 비중을 높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처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콘텐츠 제작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지는 않았다. 단순히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국민은 수신료 인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KBS의 주인이자 감시자인 국민은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한다. 이번 재허가 심사는 KBS의 존폐가 국민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다. KBS는 강도 높은 자구 노력으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긴축과 절감만으로 극복하기에는 그 골이 너무 깊다며 '수신료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9년 동안 2500원으로 동결된 수신료는 물가 상승과 지상파 방송의 고립에 따라 인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수신료 인상이 KBS의 재정난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의 존재가치를 설득해야 하는 게 먼저다. 시청자를 위한 콘텐츠 개발과 제작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시청자 중심으로 중심축을 전환해야 할 때다.


편집 : 조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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