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희망뚜벅이’

▲ 김현주 기자

포르투에서 산티아고까지 10여 일간 순례길을 걸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즐거웠다. 포르투갈 서쪽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 보이는 대서양은 한국의 동해와 다를 바 없었지만 괜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후줄근한 옷과 너저분한 가방을 걸치고 있으니 잔뜩 꾸민 관광객이 아니라 소박한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순례길은 여행에 가까웠다. 걸으며 만난 사람들은 대개 나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유보다는 여행을 목적으로 순례길을 걸었다. 

순례길은 본래 순례자를 위한 길이다. 순례자는 걸으며 신이 겪었던 고통을 체험한다. 일부러 고통을 더하는 방법을 쓴다. 리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인문학>에는 신발을 신지 않거나 신발에 돌덩이를 매달고 걷던 중세 순례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단식을 하거나 특수한 참회용 의복을 입은 채 걷기도 했다. 티베트에서는 3,000km 넘는 거리를 몸으로 재는 순례법도 있는데 바닥에 완전 엎드린 상태로 머리 끝부분을 표시하고, 머리 끝부분에 다시 다리 끝부분을 갖다 대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를 반복하는 식이다. 

▲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86년 7월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난해 12월 30일부터 복직을 위한 도보 투쟁을 시작했다. 다음달 7일 청와대에 도착할 예정이다.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진숙 지도위원이다. © KBS

걷기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이다.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는 36년간 복직 투쟁을 하다가 지난해 12월 31일 정년을 맞았다. 암 투병까지 한 그는 복직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취지로 12월 30일부터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걷는 ‘희망뚜벅이’를 시작했다. 김진숙의 걷기는 이 땅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순례다. 일하다 죽어가는 노동자,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다. 

김진숙 씨는 길을 걸으며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고용안정 없는 한진중공업 매각 반대를 외쳤다. 그가 걷는 동안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전국 사업체 중 약 80%를 차지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에서 제외되는 등 누더기가 됐다. 현대중공업 계열 조선소에서는 페인트칠 노동자들에게 피부병이 집단 발병했는데 피해자 90%가 하청노동자였다. 지난 11일에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추위에 떨며 일하다 죽었다.

언제쯤 김진숙 씨의 ‘순례길’이 ‘여행길’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을 때,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정진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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