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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피해자라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요?
[언론윤리] 성범죄 보도 ‘2차 가해’ 안 되려면
2020년 12월 09일 (수) 21:35:35 조한주 기자 yourglim23@naver.com

2018년 3월 1일 <조선일보>는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교수들의 성폭력을 단독 보도했다. 박중현 전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교수를 포함한 해당 학과 남자 교수 6명 중 4명이 성추문에 연루됐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 <조선일보>는 다른 단독 보도를 냈다. 명지전문대 재학생 진술서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전하는 보도였다. 이 재학생 진술서는 피해자들이 비공개를 전제로 학교 측에 전달한 것이었다. 사적 비밀이었다는 뜻이다.

여전히 삭제되지 않고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조선일보>의 보도를 보면, 영상편집실을 ‘안마방’으로 만든 박 전 교수가 학생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세세하게 나와 있다. 외설 문학 수준의 표현도 즐비하다. ‘가명을 썼으니 괜찮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언론의 2차 가해다. 지극히 사적인 정보가 유출됐다는 것만으로 피해자는 큰 충격을 받을 수 있고, 자극적인 내용 덕에 빠르게 퍼진 내밀한 이야기를 피해자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박중현 전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교수가 쓰던 사무실 명패. ⓒ SBS

2차 가해는 모든 사람이 당사자 될 수 있어

이 기사를 쓴 기자가 ‘내가 해당 사건의 피해자라면…’이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나올 수 없었던 선정적 보도였다. 2018년 언론중재위원회에 접수된 성폭력 피해자 피해 상태 등 묘사 보도에 관한 시정권고는 전체 권고 중 285건(22.4%)에 달했다. 미투 관련 보도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시정 권고 건수가 늘어난 것인데, 달리 말하면 미투 등 성범죄 사건을 보도할 때 많은 기자들이 그만큼 신경을 안 썼다는 말이 된다.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지만, 2차 가해는 모든 사람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2차 가해 글은 SNS의 뜬소문보다 더 큰 피해를 준다.

언론 보도를 통한 2차 피해는 미투 운동이 있기 전부터 문제가 됐다. 언론사들이 지난 2012년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을 경쟁적으로 다루며 ‘해서는 안 될’ 보도를 하자,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는 같은 해 12월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마련했다. 인권보도준칙의 세부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전문에 이어서 7개 항목의 총강과 10개 항목의 실천 요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강은 성범죄 보도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에 대한 것을, 실천 요강은 구체적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권고 기준 전체가 사실상 언론 보도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 2012년 12월 12일 발표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의 일부. ⓒ 조한주

자극적인 소재일수록 구도를 신중히 잡아야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코치에게 폭력과 함께 성폭력을 당해왔다고 밝혔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수천 건의 기사가 나왔다. 대부분 제목에서 이 사건을 ‘심석희 사건’ 등으로 부르며 가해자인 조재범 코치보다 피해자인 심석희 선수에 더 집중한 보도였다.

기사에는 심석희 선수의 사진이 실린 경우가 많았고, 과거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코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터뷰를 언급하면서 ‘심석희 선수가 그루밍 성범죄를 당했다’며 그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먼저 피해자와 좋은 관계를 다진 뒤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방향을 잘못 잡은 기사들은 ‘성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는가’에 집중하기보다는 피해자인 심석희 선수가 입은 피해 내용에 집중하게 한다.

   
▲ 2018년 6월 18일 경찰에 소환된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가 경찰 조사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KBS

기사 소재가 자극적일수록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범죄 보도를 할 때 더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피해자를 부각하는 제목과 이미지 선택은 모두 피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2018년 한국기자협회가 여성가족부와 함께 마련한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 요강’에는 “언론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의 가해 방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고, 특히 피해자를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 선정적 묘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어떤 내용에 집중할 건지 처음부터 신중하게 접근하라는 뜻이다.

‘단독’이나 ‘특종’보다 정확한 보도

다른 언론사가 보도한 내용을 홀로 보도하지 않아 ‘물먹을’ 수 있다고 여겨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태도도 지양해야 한다. 당장은 보도하지 않아 손해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손해가 아니다. 2차 가해를 한 기사는 결국 해당 언론사의 평판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친다.

2012년 나주 아동 성폭력 사건 당시 피해자 가족이 피해자의 신상 정보와 범행 사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승소한 적이 있다. 재판부는 “아동의 여러 상해 신체 부위를 촬영한 사진을 자극적으로 보도한 것은 공익적 범죄 보도의 허용 범위를 벗어났고, 가족의 사적 영역을 과도하게 침해했다”며 피해자 가족에게 총 1억 2,500만원의 손해를 배상하고 위법성이 중대한 기사들은 삭제하도록 했다. TV조선, 채널A, 연합뉴스, SBS, 경향신문 등이 줄줄이 패소했다.

기사를 올리기 전에 ‘내가 피해자라면’ 생각해야

여성가족부가 한국기자협회와 제작해 배포한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에는 ‘낯선 사람의 접근만으로도 일상적 심리의 평온이 깨지고 불안함을 느끼는 피해자의 심리상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실천요강이 있다.

   
▲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배포한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 ⓒ 여성가족부, 한국기자협회

성범죄 관련 기사는 선정적인 내용을 담기 때문에 주목도가 높다. 나중에 수정한다고 해도, 이미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사가 퍼진 뒤에는 별 소용이 없다. 한번 잘못 쓴 기사로 피해자가 오랫동안 큰 고통을 겪기 쉽다는 뜻이다. 성범죄를 보도해서 사회적인 주의를 환기하고 엄정한 처벌을 촉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나 성범죄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형성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

헌법 제17조에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언론은 관찰자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성범죄 보도를 할 때 ‘내가 피해자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신중히 보도해야 한다.


편집 : 민지희 기자

[조한주 기자]
단비뉴스 청년부, 디지털뉴스부, 기획탐사팀, 전략기획팀 조한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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