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텀블러 표면 납 검출 정부 1년 넘게 방치

정부의 일회용품 사용규제 이후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는 텀블러 표면에서 기준치의 수백배가 넘는 납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 1년 4개월이 넘도록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텀블러 사용자들이 중금속 중독 등 위험에 방치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기관인 한국소비자원이 “텀블러 표면 중금속 오염 여부 조사 결과 기준치의 최대 884배가 넘는 납이 검출됐다”며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용기표면에 관한 유해물질 관리기준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식약처는 “용기 안쪽만 우리 소관”이라며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아 텀블러 사용자들이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 서울의 한 생활용품 매장에 진열돼 있는 각종 텀블러들. 정부가 텀블러에서 다량의 납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이후 텀블러 안전에 관한 소비자들 우려가 깊어 지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 없음). © 김신영

“텀블러 표면 납 검출 기준치 884배”…1년 4개월 방치

공정거래위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소비자원은 작년 6월 커피전문점 6곳과 대형마트 4종 등 모두 24종의 페인트 코팅 텀블러의 납과 카드뮴 함유량을 조사한 결과, “24개 조사 대상 중 4개 제품의 텀블러 페인트 코팅에서 ‘어린이 제품 공동안전기준(90mg/kg)을 최대 884배 초과하는 납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조사대상 커피전문점 텀블러 9개 중 2개, 생활용품 전문점 판매 텀블러 3개 중 1개, 온라인 판매 텀블러 5개 중 1개에서 각각 어린이 제품 안전기준의 520배, 291배, 45배, 884배에 이르는 납이 검출됐다는 것이다.

소비자원은 “정부의 일회용품 사용규제 이후 유명 커피 전문점의 텀블러 판매량이 전년보다 53% 증가하는 등 보온∙보냉 텀블러 머그 이용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텀블러 표면의 페인트 코팅 등에 중금속이 함유돼 있을 경우 사용자의 피부나 입을 통해 몸안으로 들어갈 우려가 있어 조사한 결과 이런 문제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소비자원은 “텀블러 용기 내부는 주로 스테인리스 재질을 사용하는 반면, 외부 표면은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등을 사용하는데, 스테인리스 재질의 경우 광택과 장식 등을 위해 페인트 코팅을 많이 하는데 이때 많이 사용하는 열경화성 아크릴 우레탄 수지 도료 등에 납성분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소비자원은 “납은 신경계를 손상하고 두통, 복통, 청각장애, 구토 등을 일으키며,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어 국제암연구소에서 인체발암가능물질로 분류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어린이가 납에 노출되면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성년이 된 이후 질병 발생 위험이 커질 수 있으며, 혈중 납농도에 따라 인지능력과 활동능력 손상, 충동 공격성 등이 증가할 수 있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는 어린이의 허용 가능 노출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을 정도라는 것이다.

▲ 2015년 써모스코리아와 한국 갤럽에서 전국 15세 이상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이다. 약 10명 중 8명은 텀블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신영

소비자원 "표면관리 규정 없어 식약처에 기준 마련 요청”      

소비자원은 그러나 “텀블러는 식품위생법상 식품용기로 분류돼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 제2019-2호 ‘기구 및 용기 포장의 기준 및 규격’에 따라 식품과 직접 접촉하는 면에 한해 납은 0.4mg/L 이하로 제한하고 있지만 용기 표면의 페인트 코팅에 관한 규제는 없다”고 밝혔다. 소비자원은 따라서 “식약처에 텀블러 표면에 대한 유해물질 관리 기준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외부 디자인이 있는 텀블러의 경우 납 및 그 혼합물의 함유량을 90mg/kg 이하로 규제하고, 캐나다는 소비자제품 전반의 페인트 및 표면 코팅에 납과 그 혼합물을 90mg/kg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우리도 그 같은 기준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것이었다.

소비자원 발표 뒤 1년 4개월이 넘은 지난 8일 <단비뉴스> 취재팀이 소비자원 담당자에게 텀블러 표면 관리기준 마련 여부를 질문하자 담당자는 “지난해 텀블러 표면에 납이 검출된 이후 식약처에 기준 마련을 요청했으나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 안전감시국 제품안전팀 신국범 팀장은 “텀블러 외부 표면은 관리 사각지대”라며 “기준 마련의 필요성은 분명히 있지만 앞으로 식약처가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 서울 한 커피전문점에서 고객이 매장에 진열돼 있는 텀블러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 속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김신영

식약처 “텀블러 표면 안전성 우려 없어 기준 불필요”

소비자원 설명처럼 식품의약안전처는 텀블러 표면에 관한 관리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식약처 담당자는 지난 8일 <단비뉴스> 취재팀에 “텀블러 표면은 (식약처의) 관리 대상이 아니다”라며 “텀블러 외부 표면은 안전성 우려가 없어 관리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첨가물기준과 김동규 연구관은 “식약처는 식품용 기구 용기 포장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식품과 접촉하는 부분만 기준규격이 있다”고 말했다.

식품위생법 제3장 제8조는 ‘유독∙유해물질이 들어 있거나 묻어 있어 인체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기구 및 용기∙포장과 식품 또는 식품첨가물에 직접 닿으면 해로운 영향을 끼쳐 인체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기구 및 용기∙포장을 판매하거나 판매할 목적으로 제조∙수입∙저장∙운반∙진열하거나 영업에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식품과 직접 접촉하는 면인 용기 내부에 한해 납은 0.4mg/L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연구관은 ‘텀블러 외부 표면에서 납이 검출된 것이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냐’는 질문에 “보통 코팅한 것은 평소 사용할 때 벗겨지기 어렵기 때문에 텀블러 외부는 안전성 우려가 없다고 판단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작년 (소비자원의) 검사는 메틸렌 클로라이드 액체로 텀블러 표면의 페인트를 다 벗겨 조사한 것”이라며 “전문용액으로 페인트 표면을 다 벗겨낸 것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일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텀블러 표면을 핥을 일은 없어 위험성이 없다고 본다”며 “전기밥솥이나 다른 제품들도 페인트칠 돼 있는 것이 많은데 모두 다 기준을 정해 관리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은 작년 텀블러 납 검출 결과 발표 때 “호흡이나 입 또는 피부접촉을 통해 체내로 흡수된 납은 혈액을 통해 뼈에 축적되며, 혈중 납의 반감기는 30일 정도인 반면 뼈에 축적된 납의 반감기는 10~30년에 이른다”며 납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 세명대 문화관 로비에서 학생들이 텀블러에 담은 음료를 마시면서 담소하고 있다. 일회용품 사용 규제가 강화되면서 텀블러 사용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사진 속 텀블러는 기사 속 특정내용과 관련 없음). © 김신영

소비자원 “위험” 식약처 “괜찮다” 누구 말 믿어야 하나

소비자들은 소비자원은 “어린이 허용 기준의 8백배가 넘는 납이 검출돼 위험하다”고 하고 식약처는 “표면은 안전에 관한 우려가 없다”면서 정부기관끼리 서로 다른 말을 하면 어느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며 황당해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 이우진(24) 씨는 “텀블러 표면에 그렇게 많은 양의 납이 검출됐는지 몰랐다”며 “그런데 식약처는 안전하다고 하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윤준하(25) 씨는 “텀블러는 이제 필수 휴대품이 됐는데 그 표면을 핥아 먹지 않아 안전하다니 기가 막힌다”며 “그렇다면 외국에서는 왜 텀블러 표면에 관한 관리기준을 만드느냐”고 되물었다. <화학 물질의 습격, 위험한 시대를 사는 법>을 출간한 계명찬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텀블러 외부라 하더라도 납이 검출됐다면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며 “텀블러를 손으로 만지고 음료를 마실 때 외부 표면에 입을 댈 수 있는 만큼 텀블러 표면에 관한 관리기준은 당연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써모스코리아와 한국갤럽이 지난 2015년 전국 15세 이상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중 8명이 텀블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텀블러를 포함한 보온병은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되는데, 2011년 보온병 수입액이 3,270만 달러이던 것이 2017년에는 5,887만 달러로 6년 만에 약 80%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는 등 텀블러 등 보온병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또 스타벅스코리아에서는 지난 2018년 텀블러 판매량이 전년보다 53% 증가하고 같은 해 1~7월의 텀블러 이용에 따른 할인 건수가 300만건을 넘었다. 지난 2일에는 충남 아산시가 ‘더 좋은 실천, 텀블러 사용’ 캠페인을 벌이는 등 텀블러 사용은 급증하고 있는데도, 정부의 텀블러 안전대책이 없어 수많은 텀블러 사용자들이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편집 : 유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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