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지현

▲ 이지현 기자
여태껏 내가 안아본 여자 중 가장 따뜻한 품을 가진 이는 ‘다른 남자의 여자’였다. 그녀의 품은 풍만하고 평화로웠다. 지치고 힘들 때 난 언제나 그 품에 안겼다. 그때마다 그녀는 날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소중함을 잘 몰랐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기다려줬기 때문이다. 항상 나를 위해 따뜻한 품을 내주는 그녀는 바로 내 어머니다.

내가 어머니를 따뜻하게 느꼈던 때는 뱃속부터라고 해야겠다. 세상 모든 아기들이 모태 속 양수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낄 테니 말이다. 흔들림도 없다. 부족함도 없다. 때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들에게 이틀 정도는 모유수유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만큼 어머니 뱃속이 평화롭고 풍족했기 때문일 거다, 마치 섬진강이 그러하듯이.

지난 여름이 끝날 무렵 기차를 타고 남도여행을 했다. 섬진강은 남도여행길에 꼭 들르는 곳이다. 항상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어머니를 찾아가듯 발길이 끌린다. 섬진강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낀다. 들판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은 하동마을과 지리산을 따뜻하게 감싸 안은 듯하다. 강줄기 따라 펼쳐진 백사장의 고운 모래는 또 얼마나 따사로운가? 강변에 펼쳐진 갈대와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는 포근함을 더해준다.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섬진강에 한 발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포구에 배를 대는 사람, 소쿠리를 옆에 끼고 재첩을 캐는 사람, 쏘가리를 잡기 위해 낚싯대를 던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보며 강물로 밥을 짓고 나물을 씻어먹는 장면을 상상한다. 강과 함께 그들의 삶이 영글어 가는 듯하다. 사람들은 물에서 생명을 얻고 유지한다. 그래서 강을 ‘생명의 젖줄’이라 부르나 보다.

하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은 물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이 강에 손을 대면서부터다. 구조주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본래 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싹을 틔우고 샘을 넘치게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 강은 그렇지 않다. 강 밑바닥을 파내고 보를 쌓았다. 심지어 물길도 바꿔버렸다. 굽이굽이 흘러야 할 것을 똑바로 흐르게 하고, 끊임없이 흘러가야 할 것을 가두었다. 오늘 22일 4대강에서 4개 보가 동시 개방돼 축제판이 벌어졌다.

섬진강이 4대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강마저 개발의 삽날 아래 제 몸 온전히 지킬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물 퍼가는 몇 놈’을 ‘후레자식’이라고 미리 욕해두었지만, 개발주의자들이 시집을 읽을 리도 만무하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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