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태 칼럼] 언론 보도에서 프라이버시권 보호의 기준

언론보도와 관련해서 많이 쟁점이 되는 부분이 프라이버시권을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언론이 보도해도 되는 공적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나는 사생활의 비밀 보호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기자나 PD는 없다. 하지만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고, 그것은 사생활의 비밀이라는 가치와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개별적으로 이 문제를 판단하기는 참 어렵다. 그래서 기준이 뭘까 항상 고민하게 된다. 사람들의 반응도 사안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 십상이다. 때문에 결론을 내기는 더 어렵다. 사후적으로 ‘그 때 꼭 그런 식으로 보도했어야 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만,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혼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르는 기준이 뭔지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언론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 5월호에서 프라이버시, 개인정보 보호 등에 대한 기획을 했는데, 그 기획의 일부로 썼던 글을 <신문과 방송> 측의 동의를 얻어 단비뉴스에 전재한다. <신문과 방송>에 실린 글의 제목은 “[공적 영역은 어디까지, 언론 보도와 프라이버시권] 사안별로 출렁이면 기준이 아니다”였다.


▲ 심석태 교수

다음의 몇 장면들이 기억날지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던 언론은 한동안 유병언 일가를 뒤쫓았다. 유병언 일가의 도피를 돕던 여성들 얘기는 급기야 한 여성을 ‘호위 무사’로 지칭하며, “킬러 교육을 받았다”는 방송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2012년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신체 부위나 일기장 등을 보도하고, 피해자의 주거지 내부를 무단 촬영한 여러 언론사들이 결국 손해 배상 책임을 졌다.

자살한 정치인과 여성 연예인의 시신 운구 과정이 생중계됐고, 유가족의 비공개 요청에도 빈소를 ‘단독’ 보도한 언론이 있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무시하고 유서로 추정되는 메모를 공개한 공영방송도 있었다. 조국 전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 보도에서는 자녀의 성적 등이 공개됐고, 국정 농단 사건 때는 정유라의 가족 관계까지 파헤쳐졌다.

대법원이 지난 2013년, 사생활 보도의 기준으로 △정당한 공적 관심사 △공익 목적 △정당한 방법으로 보도한 경우라는 위법성 조각 기준을 제시했지만 이런 추상적인 기준으로는 보도 현장에 명확한 지침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1)

연예지의 경우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른바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형 사건을 진지하게 취재하던 언론이 수시로 공적 영역과 비밀 보호가 필요한 사적 영역을 헷갈리는 이유는 뭘까? 언론의 부주의함도 있겠지만 기준 자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단순히 언론을 비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만큼 기준 자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프라이버시권: 내밀한 자아 형성의 영역을 침해받지 않을 자유

사생활권 또는 프라이버시(Privacy)권은 개개인이 독립적 인격체로서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지 않는 내밀한 영역에서의 평온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사람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보호되는 자신만의 영역이 필요하다. 그것은 공간적인 것일 수도 있고, 타인과의 관계 등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기는 하지만 타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히 자신만의 내밀한 영역이 없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프라이버시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독립적 개체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헌법 제17조가 규정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바로 이런 나만의 영역이 함부로 침범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인 셈이다. 헌법 제10조의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하지만 완전히 사회생활을 거부하고 무인도나 깊은 산속에 숨어 살지 않는 한 누구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호기심을 갖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서로 어지간한 집안 사정들을 훤히 알고 지낸다. 문제는 대중 매체의 등장으로 작은 공동체 안에서 끝나던 호기심 충족의 범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고, 엄청난 전파 속도에 심지어 기록되고 검색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 헌법 제17조가 규정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언론인에게 취재와 보도에 있어 늘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 Pixabay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거부할 수 있는 내밀한 나의 사적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나에 관한 모든 정보는 온전히 나의 지배하에 둘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어느 사회에서나 참 어려운 문제다.

프라이버시권 인정 불구하고 공적 영역 폭넓게 인정하는 미국

서구 사회에서도 프라이버시는 항상 논란거리다. 유명인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관심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꼽히는 논문 Right to Privacy(2)가 나오게 된 배경에도 이른바 ‘황색 저널리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 저자인 워런의 딸 결혼 축하연에 대한 지역 언론의 상세한 보도가 논문을 쓰게 된 계기였다는 얘기이다.

프라이버시권은 1960년에 나온 프로서의 논문을 통해 체계화됐다.(3) 프로서(William Prosser)는 프라이버시 침해를 △사적인 영역에 대한 침범(intrusion), △사적 사항의 공표(disclosure), △왜곡된 공표(false light), △영리적 사용(misappropriation)으로 유형화했다.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1965년에 이르러 프라이버시권을 독자적인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했다.(4)

하지만 공인의 명예훼손을 잘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미국 사회 특유의 공적 영역에 대한 강한 인식은 프라이버시권에서도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공적 기록에 올라 있는 내용은 ‘공적 정보’라는 이유로 프라이버시 보호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 등은 공적 정보이므로 언론의 판단으로 실명과 사진을 보도할 수 있다. 심지어 성폭행 피해 사실이 공적 문서에 기록돼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보도한 것이 프라이버시 침해는 아니라는 판결도 있었다. 성매매 사건 수사 발표를 하면서 피의자들의 사진과 실명, 거주지까지 공개하기도 하고, 구치소장이 수감자의 사진을 걸고 인기투표를 벌이기도 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비판에도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은 ‘공적 정보’는 프라이버시 영역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공적 영역과 사생활 영역을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합리적으로 프라이버시를 기대할 수 있느냐이다. 사무실이라도 칸막이가 쳐져 있는 등 외부 시선이 차단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면 프라이버시 침해가 인정됐다. 취재를 위해 불법 진료를 하는 가정집에 손님을 가장해 들어간 경우도 침해가 인정됐다. 반면 병원에 환자를 가장해 들어가서 불법 진료 현장을 촬영한 경우, 또 식당의 옆 테이블에서 녹음을 한 사건에서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기대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해가 인정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내용적으로는 공적 정보에 대해, 장소적으로는 일반인의 접근과 시선에 노출된 곳은 프라이버시권을 기대하기 어려운 공적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 한국 언론은 일부 흉악범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의자들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미국은 확정판결이 나기 전, 용의자 선상에 오를 때부터 피의자들의 얼굴을 공개한다. 사진은 2011년 4월 26일, 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카운티 교도소에서 얼굴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여성 피의자. 정면과 측면에서 찍은 얼굴 사진과 함께 이름과 생년월일, 키, 몸무게, 머리 색깔, 범죄 혐의 등이 나와있다. 바로 그 아래에 있는 'vote'를 클릭하면 이 여성 수감자의 표가 1표 올라가게 된다. ⓒ 애리조나주 마리코파(Maricopa) 카운티 경찰 홈페이지

익명 보도 원칙과 사생활 보호 요구의 확대

미국에서 프로서의 프라이버시권 논문이 나온 것이 1960년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듬해에 나온 《신문연구》 제2호에 프라이버시권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미국에서도 프라이버시권이 연방대법원 차원에서 확립되기 전이었으니 프라이버시권의 국내 소개는 대단히 신속했던 셈이다.(5) 프로서의 논문 같은 최신 논의를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의 프라이버시권의 개념, 특히 이것이 행복추구권과 인간 존엄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까지 잘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가 되어서도 우리 언론이 사생활 보호를 크게 신경 쓴 것 같지는 않다. 미국처럼 ‘공적 정보’는 물론이고, 취재 과정에서 수집한 각종 사적 정보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적잖게 노출됐다. 성범죄 피해자의 주소나 이름까지 공개되기도 했고, 신혼여행 중에 실족사한 공무원 이야기를 가십으로 다룬 신문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급변한 것은 대법원이 1998년 이른바 ‘익명 보도 원칙’을 천명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6) 범죄 보도의 공익성을 인정하더라도 ‘누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정당한 공적 관심사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 이 판결은 프라이버시가 아니라 범죄 보도를 통한 명예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로 공인과 같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면 범죄 보도에서 실명이나 사진 노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됐고, 사회 전반의 인권 의식 고양과 맞물리면서 인격권 보호의 범위나 수위도 올라가는 계기가 됐다.

프라이버시가 함부로 무시되던 시절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겠지만, 프라이버시권은 내밀한 나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에서 나에 관한 모든 사항을 내 뜻에 반해 처리하지 못하게 할 권리로 점차 확대됐다. 판결 경향도 이런 사회적 인식 변화와 보조를 같이했다. 고속도로 요금소 근무자의 모습이 명절 도로 상황을 취재하던 카메라에 노출된 사건에서 ‘요금소 근무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며 배상 책임이 인정됐고, 방송 카메라 앞에 섰던 아파트 경비원도 비슷한 이유로 배상을 받았다. 급기야 붐비는 시내 길거리에서 기자의 배경 속에 우연히 찍힌 남녀가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영상 삭제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사안별로 출렁인다면 기준이 아니다

우리의 사생활 보호에 대한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코로나19 확진자의 세부 동선이 공개되는 것과 관련해 사생활 침해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미 적잖은 확진자들이 곤란을 겪고, 국제적인 화제가 된 뒤였다.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의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사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핵심 피의자인 조주빈은 물론 단순 가입자나 시청자들의 신상 공개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고위 공직자 수사와 관련한 언론 보도를 사생활 침해 등을 이유로 강하게 비판하던 것과는 크게 달라진 분위기다.

눈에 띄는 건 조주빈의 신상 공개를 강하게 요구하는 와중에도 경찰의 신상 공개 하루 전에 이뤄진 SBS의 실명 보도에 대한 비판 이유다. 신상 공개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다음날 결정한 뒤 보도하면 될 것을 왜 먼저 보도했느냐는 것이다. 언론이 실명 보도를 할지 판단하는 것과 수사기관의 신상 공개 결정이 전혀 다른 독립적 행위라는 것을 무시한, 언론 불신을 보여주는 단면인 셈이다. 프라이버시권을 기준으로 본다면, SBS의 실명 공개가 문제가 아니라 조주빈의 학점을 공개하고 글쓰기 스타일이나 교우관계를 들춰낸 것이 더 논란이 됐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SBS의 실명 보도를 비판하는 주장 중에서 그런 원칙적인 지적은 찾지 못했다.

▲ 지난 3월 23일 SBS는 텔레그램 성 착취 가해자 중 한 명으로 검거된 피의자 조주빈 신상을 경찰 신상 공개위원회 결정 하루 전 단독 보도했다. ⓒ SBS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은 기준이 필요하다

앞서 본 대법원 판례가 사생활 보호와 관련해 제시한 기준은 사실상 ‘정당한 공적 관심사’라는 것 하나뿐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의 사생활 공개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도 ‘정당한 공적 관심사 여부’여야 한다. 앞서 SBS의 실명 공개 보도의 정당성도 이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 문제는 정당한 공적 관심사인지가 너무 폭넓게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떤 사안을 보도해도 괜찮은지 명쾌한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안전한 방법은 출연을 자처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익명처리에 모자이크, 음성 변조까지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방송 뉴스 화면이 더 모자이크 투성이가 되면서도 제대로 된 사생활 보호는 안 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기준이 조금 더 명확해져야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노출된 부분들까지, 특히 공적인 사회생활 영역에 속하는 사항들까지 사생활의 비밀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처럼 공적 문서에 올라 있다고 해서 성범죄 피해 사실까지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적 사회생활에 해당하는 것까지 모두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보호해야 하는 내밀한 사생활 영역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공법상의 행위인 범죄까지 사생활로 보고 보호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계속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론이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왜 보도하느냐는 지적도 있을 텐데, 그건 엄밀히 말해 품질의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는 아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언론이 보도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보도 자체를 불법행위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조차 준수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면, 기준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각주]
1. 대법원 2013. 6. 27. 선고, 2012다31728 판결.
2. Warren, Brandeis, “Right to Privacy”, 4 Harvard L.R. 193, 1890.
3. Prosser, “Privacy”, 48 Cal. L. Rev. 383, 1960.
4. Griswold v. Connecticut, 381 U.S. 479 (1965).
5. 고명식, “프라이버시의 권리: 개인의 사생활영역과 보도의 한계”, 「신문연구」 통권 2호(관훈클럽, 1961. 4.), 35-38쪽. (「신문연구」는 이후 「관훈저널」로 제호가 변경되었다)
6. 대법원, 1998. 7. 14. 선고, 96다17257 판결.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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