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합천 해인사 전시행사에 가족관람객 등 줄 이어

“천년이 지났어도 판이 새로 새긴 듯하고, 나는 새들도 이 집을 피해 기와지붕에 앉지 않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다.”

<택리지>를 지은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감탄한 천년의 ‘판’과 ‘집’은 바로 팔만대장경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이다. 석가모니의 말씀이 새겨진 팔만대장경(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32호)과 경판을 담은 장경판전(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 52호)이 드디어 이중환이 미리 언급한 탄생 1000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경남 합천 해인사 일대에서는 지난달 23일부터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이 열리고 있다.

▲ '해인총림‘ 현판이 걸린 천왕문을 통과하면 사찰내로 들어갈 수 있다. 진입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높은 나무들이 해인사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진희정

일반 공개 네 번뿐이었던 실물, 45일간 세상 나들이

오는 11월 6일까지 계속되는 이 축전에서는 그동안 일반인에게 네 번밖에 공개되지 않았던 대장경의 실물을 보여준다. 가야산 해발 700m 지점의 해인사 내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 8만 1258판 중 고려대장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판과 고려 각판(국보 206호) ‘화엄경 변상도’ 두 점이 주행사장 ‘대장경천년관’에 전시됐다. 해인사측이 향후 100년간 대장경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한 탓인지,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발길들이 줄을 잇고 있다. 주말이었던 지난 2일 축전이 열리고 있는 행사장과 해인사,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가야산 6㎞ 홍류동 계곡 ‘소리길’은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대장경 실물을 감상할 수 있는 ‘천년관’에 입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은 행사장 일대에 여러 번 똬리를 틀 정도로 길게 늘어섰다. 이날 기자는 천년관 입장을 위해 꼬박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희정

세계 기록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지식문명관’과 불교문화를 알고 참선을 체험할 수 있는 ‘정신문화관’, 세계 작가들의 판각 판화를 전시하는 ‘세계교류관’ 등 주요 전시 행사장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은 단연 ‘대장경천년관’이다. 실제 대장경을 구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장경의 역사와 장경판전의 과학성 등 말 그대로 ‘천년의 지혜’를 한 번에 듣고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모든 경전을 한자로 번역해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초조대장경(1011~87년 판각)은 아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2차 침입으로 모두 다 타버리고 인쇄본으로만 전해지며, 지금의 팔만대장경은 1236년에서 51년까지 다시 조성한 재조대장경이다. 대장경 1000년은 초조대장경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 천년관 내부의 다양한 전시 모습. 천년관에 들어서자마자 3D영상이 관람객의 눈을 압도한다. ⓒ진희정

2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천년관에는 동판으로 제작된 대장경이 벽면에 가득한 원형 전시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3층 높이의 전시실을 따라 올라가는 내내 벽에 쓰리디(3D)입체화면과 홀로그램으로 대장경이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러 전시실을 통과하며 대장경과 장경판전의 역사를 보고 들은 뒤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대장경 실물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실물 대장경 관람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품은 보물 두 점의 위용은 늠름하고 눈부셨다. 다소 무뎌진 듯한 판각 한자 한자 마다 천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듯 했다. 

▲ 대장경 제작과정을 재현한 모형. 번호 순서대로 (1)고증을 끝내고 원고작성하기 (2)건조된 목재 다듬기 (3)한지제조하기 (4)경판에 새길 판하본 만들기 (5)경판 새기기 (6)한 장씩 찍어 원고와 대조하기 (7)잘못된 글자 수정 후 인쇄하기. ⓒ진희정

경북 김천에서 온 김경미(39) 씨는 “이번에 보는 건 진짜야, 애들아”라며 9살 난 아들과 7살 된 딸 보다 더 흥분했다.

“생각보다 작은 경판 안에 그렇게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을지 몰랐어요. 이런 게 8만개나 더 있다니....... (중생의 번뇌에 관한 것이라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데 고민 많은 건 매 한가진가 봐요.”      

그림으로 보는 대장경이 있는 천년관 내 기획전시실을 비롯해 주전시장 곳곳에는 어린이들이 대장경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각자의 소망을 담아 솟대를 만들기도 하고 부모와 함께 판각을 새기고 종이에 찍어내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축전이 열리고 있는 주행사장과 해인사를 잇는 산책로 ‘소리길’.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소리길은 홍류동 계곡을 중심으로 한 가야산 일대 테마로드다. ⓒ진희정

행사장에는 등산복과 등산화 차림의 관람객들이 많았다. 해인사에 이르는 가야산 6㎞ 홍류동 계곡길을 7개의 다리와 500m 나무판으로 단장한 ‘소리길’을 알고 온 사람들이다.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 흐르는 물마저 붉어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 홍류동 계곡길. 계곡 주위의 송림사이로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 해서 붙여진 또 다른 이름, 소리길. 아직은 다소 이른 단풍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소리길을 따라 해인사로 향했다.

▲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해인사 축전을 찾은 사람들이 소리길을 걸어 해인사로 향하고 있다. ⓒ진희정

무릉교까지의 완만한 길을 지나 가야산의 굴곡이 조금씩 느껴지는 농산정에 다다르면 본격적으로 너른 홍류동 계곡이 펼쳐진다. 계곡과 바위의 위치를 따라 구불구불해지는 소리길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사찰 특유의 향 내음이 나기 시작한다. 해인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가야산 백련암에서 수도하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남긴 성철스님의 말대로 산바람과 물바람이 차가워지는 소리길 끝에 해인사가 있다.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중 하나인 해인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한 ‘해인삼매’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 이곳부터는 모든 중생적인 속박을 벗어나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부처님의 세계를 상징하는 해탈문. ⓒ진희정

아랫마을 축전의 분위기는 해인사마저 들뜨게 했나보다. 해인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갖은 산나물을 선뵈러 나온 홍류동 사람들과 사찰음식을 들고 나온 승려와 보살들로 작은 읍내 시장을 방불케 했다. 대장경천년을 기념하는 세계 각국 예술인들의 작품들이 드문드문 전시돼 있는 길을 걷다보면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해인사 돌계단은 워낙 가팔라서 저마다 옆 사람의 손을 잡고 오르게 된다. 속세와 선계의 경계처럼 느껴지는 해탈문을 지나면 천년 산사가 펼쳐진다. 
 

▲ 정중탑 앞에서 방문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소개하는 스님들과 방문객들의 기와불사가 눈에 띈다. ⓒ진희정

사찰 한가운데에 있는 정중탑 앞에서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마당 한구석에는 다녀간 이들이 소망을 남긴 기와불사도 보인다. 해인사 본당에 해당하는 대적광전 앞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해인도 따라돌기’를 위해서다. 해인도는 의상 대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화엄사상을 요약한 계송(부처의 공덕이나 교리를 담은 노래 글귀)을 형상화한 것으로, 얼핏 미로처럼 보이는 만(卍)자 도안이다. 도안 중심에서 시작한 210자의 계송이 끝나기까지 54번 꺾어 도는 동안 그 내용을 마음에 새기며 따라가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전해진다.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적은 종이를 들고 깨달음을 구하며 해인도를 돌고 있었다. 

▲ 대적광전 앞마당에서 사람들이 해인도 따라돌기를 하고 있다. 만(卍)자 도안 가운데 탑을 중심으로 따라 돌며 계송을 외우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희정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해인사 사찰 안에서도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에 한때 대장경을 콘크리트로 지은 판전에 보관했다가 경판이 뒤틀리자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긴 후부터 장경판전 통로는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았다고 한다.

▲ 해인사 내 장경판전 살창 사이로 보이는 팔만대장경의 모습. ⓒ진희정

가야산의 여름과 겨울은 모두 습기가 많은데, 목판은 습기에 뒤틀리고 벌레 먹기가 쉽다. 장경판전은 이를 감안해서 과학적으로 설계됐다. 판전 아래에는 두터운 층의 모래와 소금을 깔아 바닥으로부터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또 벽면 아래위 살창의 크기와 건물 앞뒷면 살창의 크기가 다르게 만들어, 창으로 스며든 계곡의 바람이 실내에서 아래위로 최대한 돌아 나가도록 했다. 길게 뻗은 판전의 처마는 빗물을 막고, 직사광선을 가린다. 살창으로 잔잔히 스며드는 빛과 바람이 습기를 씻어내고 경판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대장경 천년의 지혜는 다름 아닌 자연의 지혜를 빌려온 것이었다.   

▲ 축전주행사장 곳곳에는 방문객을 위한 다양한 체험행사가 마련돼 있다. 솟대 만들기 체험을 하는 아이들과, 대장경 인쇄를 유심히 지켜보는 외국인의 모습. 아이들을 위한 판각체험에 오히려 어른들이 열을 올리고 있다. ⓒ진희정

누구나 마음에 부처가 있지만, 번뇌 속에 살아가게 되는 중생의 삶. 석가모니의 지혜를 8만4000여 법문에 담은 팔만대장경과 천년의 진리를 지켜온 장경판전의 살창을 만나러 올 가을 해인사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 기간 : 2011년 09월 23일(금) ~ 2011년 11월 06일(일)
 - 장소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주행사장, 해인사, 창원컨벤션센터 일원
 - 문의 : 전화 055-211-6251/홈페이지
www.tripitaka2011.com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