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너라 벗고놀자] 황상호-우세린 부부 여행기 ⑪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의 작용으로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이 원주민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미국 로스엔젤리스에서 활동하는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모노레이크 근처 모레인 캠핑장(Moraine Campground)에서 하루 묶고 캘리포니아 북부 레이크 타호(Lake Tahoe)에 가기 전 알파인 카운티(Alpine County)의 산골 마을 마크리빌(Markliville)에 들렀다. 거기 그로버 온천(Grover Hot Springs)이 있기 때문이다. 

▲ 시에라 네바다 산맥 동쪽, 3000m 고봉으로 둘러싸인 그로버 온천. © 황상호

알파인 카운티의 ‘알파인’(Alpine)은 유럽 알프스산맥과 같은 어원인 ‘알프’(Alp)에서 따왔다. 뜻은 ‘하얀 산’.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3000m 고봉들로 일년 내내 산봉우리에 눈이 쌓여 있다. 그로버 온천도 설악산 대청봉(1708m)보다 높은 고도 1800m에 있다. 

온천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지만 마크리빌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 반쯤 숲을 걷는 것도 좋다. 바닐라 향이 나는 침엽수인 제프리 파인(Jeffrey Pine)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약초로 쓰는 세이지 브러쉬(Sage Brush) 군락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차도 인적도 드물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온실 정원보다 ‘천만 배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천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쯤 더 걸으면 핫 스프링스 크릭(Hot Springs Creek Falls)이 나오는데 수량이 풍부한 폭포가 계단처럼 떨어진다.

막장 인생들의 안식처 ‘산악 온천’

그로버 온천은 1854년 존 호킨스(John Hawkins)라는 인물이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이곳을 방문하면서 서서히 세상에 알려졌다. 10년 뒤 그는 이곳에 집과 마구간을 지었고, 사방에 흐르는 온천수를 모아 지름 30cm, 깊이 20cm 온천탕을 만들었다. 때맞춰 산골 마크리빌에는 은을 채굴하려는 외지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인구가 지금의 10배인 2000여명에 이르렀다. 온천은 ‘막장’ 인생들을 위한 안식처였다.

그 뒤 알파인 카운티 대지주 앨빈 그로버(Alvin Grover)가 이곳을 사들였다. 그는 온천 둘레를 12m까지 확장하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쳤다. 1870년대부터 수십 년간 온천을 유료로 운영했다. 이어 농장주 찰스 스카서스(Charles Scossas)가 1908년 이곳을 매입했고, 11년 뒤 불이 나자 재개발을 했다. 1959년에는 주정부가 이 일대를 주립공원으로 지정했고, 알파인 카운티는 그로버 온천을 포함한 온천 밸리 지역 땅 553에이커를 사들였다. 카운티는 이곳을 그로버 온천 주립공원(Grover Hot Springs State Park)이라고 이름 짓고, 온천을 수리해 1976년 다시 문을 열었다.

온천은 고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감히 쉽게 오르지 못할 뾰족한 산이다. 이곳은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도 무사할 것 같은 오지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았다. 온천 출입구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7~8명 있었다.

온천 원수는 60도로 손을 대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겁다. 주립공원은 온천수를 탱크에 저장한 뒤 다시 데워 온천수로 사용한다. 돈 받고 입장하는 방문객에게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방편일 테다. 온천탕 뒤편 언덕에는 온천 성분을 기록한 푯말이 붙어 있다. 중탄산염이 리터당 775mg으로 가장 많고, 나트륨 440mg, 염화물 190mg, 황산염 160mg 등 20여 종의 미네랄이 물에 녹아 있다.

▲ 그로버 온천에 딸린 수영장은 가족 방문객이 시간을 보내기 좋다. © 황상호

온천탕은 옅은 녹색을 띤다. 소독제인 브롬(Bromine) 용액이 온천수의 무기 염류와 만나 산화하면서 온천탕 벽면에 붙은 것이다. 청소를 자주해 유황 냄새는 많이 나지 않는다. 특히 온천에는 큰 온천수 수영장이 있다. 아이가 있는 가족은 이곳에 와 시간을 보내면 제격이다. 겨울철이면 수증기가 뭉개 뭉개 피어올라 장관이다. 입장료는 성인 10달러, 아이 5달러다. 6월부터 8월까지 매일 문을 열지만,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는 문 여는 시간이 바뀐다. 캘리포니아 주립공원 웹사이트(Parks.ca.gov)에서 개장 시간을 확인하면 된다.

문화를 파는 로컬 식당과 주유소

목욕을 마치고 마크리빌 마을 삼거리로 이동했다. 카키색 지붕의 낮은 목조 건물이 오종종히 들어서 있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백인 아주머니는 집 앞 인도에 좌판을 펼쳐놓고 유리컵과 가방, 액세서리를 팔고 있다. 길 건너에는 검은 가죽옷으로 무장한 오토바이족과 화려한 꽃 빛깔 운동복을 입은 자전거족이 세를 과시하듯 커피 가게 밖에 무리 지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죽음의 라이드’(Death Ride)라 불리는 자전거 대회가 열린다. 2500m급 고봉을 넘나들며 250km를 달려야 하는데, 매년 3000여명이 참가한다.

우리는 지역 주민 추천을 받아 ‘더 제이 마크리빌 톨 스테이션’(The J. Markliville Toll Station Food & Lodging)이라는 식당에 갔다. 처음 보는 연어 버거 세트를 주문하고, 망고 맥주를 하나 부탁했다. 음식은 곧장 나왔다. 생선 버거라···. 로스앤젤레스에서 내로라하는 햄버거는 죄다 먹어 봤지만 생선 버거는 처음이었다.

살짝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 입 크게 물었다. 그런데 두툼한 연어 살이 부서지지 않고 짭조름하니 빵과 잘 어울렸다. 달콤한 망고 맥주와 환상의 짝꿍이었다. 허겁지겁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온천으로 녹인 몸에 맥주를 부으니, 어디 퍼져서 낮잠 한숨 자고 싶었다.

▲ 감자칩과 함께 나온 햄버거(앞쪽)와 연어버거(뒤쪽). © 황상호

식사를 마치고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길 건너편에 있는 알스 주유소(Al’s Got Gas, BAIT & TACKLE)에 갔다. 주유기는 한 대뿐, 가게 입구에는 지역 예술가가 그림을 팔고 있었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낚시용품과 주유소 창업주 얼굴을 캐리커처 한 모자와 티셔츠가 판매되고 있었다. 계산대는 창업주 아들이 지키고 있었다. 기특한 마음에 모자 하나를 샀다. 대형 체인점에 기대지 않고 고유한 문화와 이미지를 만들어 운영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온 우주의 푸른빛이 풍덩 빠진 곳

마크리빌에서 차로 북쪽으로 50분간 달려 목적지인 레이크 타호에 도착했다. 9월 첫째 주 노동절 연휴라서 도로에는 차가 꼬리를 물었다. 한국 벚꽃놀이 철 유명 관광지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호수 서쪽 면으로 향했다. 살짝 긴장하며 왕복 2차선의 좁고 굽은 언덕길을 올라갔다. 경비행기로 하늘을 활공하듯 좌우로 코발트블루 빛깔 호수가 아득히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빛은 호수에 반사돼 밤하늘 별 무덤처럼 찬란히 반짝거렸다. 라디오를 끄고 변주하는 빛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침엽수림은 그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수평의 호반에서 곧게 자라고 있었다.

▲ 레이크 타호는 규모가 커 단번에 사진에 담기 힘들다. 호수 서쪽 면에 있는 트레일에서 찍은 모습. © 황상호

레이크 타호는 200만 년 전 지진과 단층 활동으로 만들어졌다. 주변에는 프릴 피크(Freel Peak∙3320m), 모뉴먼트 피크(Monument Peak∙3068m), 피라미드 피크(Pyramid Peak∙3043m) 등 3000m급 고봉이 호수를 호위한다. 빙하기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에메랄드 베이(Emerald Bay)는 이곳 랜드마크다. 여사장이 찻집을 운영했다던 파네트 섬(Fannette Island) 주위에는 카약과 요트가 한가히 노닐고 있다.

호수는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에 걸쳐 있다. 특히 서 캘리포니아 남쪽 지역에 관광객이 많다. 이곳 카운티 이름도 남미 아마존에 있다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와 같은 엘도라도 카운티다. 도로 이름에도 세상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였다. 파라다이스 플랫 레인(Paradise Flat Ln), 에메랄드 베이 로드(Emerald Bay Rd), 루비콘 드라이브(Rubicon Dr), 북유럽 지혜의 신 오딘이 산다는 발할라까지 호명해 발할라(Valhalla) 로드라 부르는 길도 있다.

호수는 해발 1897m에 있다. 지리산 천왕봉(1915m)과 비슷한 높이다. 가장 깊은 수심은 501m로 북미에서는 오리건주 크레이터 레이크(Crater Lake, 594m) 다음으로 깊다. 충주호(97.5m)가 5개나 빠지고 남을 깊이로 전 세계에서 15번째로 깊다고 한다. 면적은 490km2로 서울의 80% 크기다. 그중 75%가 국립공원이다. 물은 63개 강물에서 흘러 들어온다. 수질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수질 검사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됐다며 충격에 빠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타호는 아메리카 원주민 와쇼(Washo)족 언어로 ‘Da ow(Tahoe)’, ‘호수’ 또는 ‘호수의 끝’이라는 뜻이다. 와쇼족은 호수를 중심으로 6000~9000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여름철 사냥을 위해 이곳에 모여 대가족 형태로 살다가 겨울이면 해체하는 이른바 ‘밴드형 가족’이었다.

▲ 레이크 타호에 있는 파네트섬 주변에서 요트와 카약이 노닐고 있다. © 황상호

마크 트웨인을 키우고 치유한 온천

이곳 사람들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1835~1910)을 만든 게 레이크 타호라고 믿는다. 마크 트웨인은 노예제를 주장하는 남부 연합군에서 탈영해 1861년 네바다주 칼슨 시티(Carson City)로 이주한다. 그는 곧장 인근 도시인 버지니아 시티의 신문사에 기자로 취업하고 이름을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에서 마크 트웨인으로 바꾼다. 그는 기자로 일하는 동안 칼슨 시티에서 레이크 타호 북쪽까지 하이킹을 했다. 또 감기 치료를 위해 1963년 레이크 타호 남쪽에 있는 데이비드 왈리스 리조트(David Walley’s Resort)에서 온천욕을 하며 요양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타 신문사와의 치열한 경쟁과 기자 일에 염증을 느끼고 버지니아 시티 지역 신문사를 그만둔 뒤, 여러 매체를 오가다 1872년 자전적 서부 여행기인 <서부유랑기>(Roughing it)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마크 트웨인은 레이크 타호를 ‘천사들이 숨 쉬는 곳’,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풍광’이라고 극찬했다. 책 <수면 아래 타호>(Tahoe Beneath the Surface)’를 쓴 작가 스캇 랭포드(Scott Lankford)는 호수가 “마크 트웨인을 발명했다(Tahoe invented Mark Twain)”고 썼다. 마크 트웨인은 말년에 이곳에 살려고 했지만, 점 찍어뒀던 곳이 산불로 타버려 포기하고 말았다.

마크 트웨인이 레이크 타호를 본 첫인상을 느끼려면 호수 동북쪽 터널 크릭 트레일(Tunnel Creek Trail) 2km 구간을 걸으면 된다. 터널 크릭 카페(Tunnel Creek Café)에 차를 세우고 안내판을 따라 걸으면 된다. 현지 매체들은 이곳 수질을 ‘크리스탈-클리어’(Crystal-Clear)라고 표현하는데, ‘수정처럼 투명한’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 아내와 함께 호수에서 선상 낚시를 즐겼는데 한 사람당 송어 대여섯 마리를 낚았다. © 황상호

결국, 놈을 만나고 말다

해가 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우리는 하루 묶을 캠핑장을 물색했다. 레이크 타호 서쪽에만 캠핑장이 십여 곳이나 있다. 전화로 문의하고 직접 방문도 했지만 모두 만석이었다. 노동절 연휴를 만만히 본 것이었다. 차에서 잠을 자는 ‘차박 캠핑’이라도 해야 하나 마음을 졸이던 중 다운타운에 있는 타호 밸리 캠프그라운드(Tahoe Valley Campground)를 찾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레저차량용 캠핑장과 캐빈뿐 아니라 일반 텐트 캠핑 사이트도 400곳이나 있는 대형 유료 캠핑장이었다. 설마 이곳마저 꽉 찰까?

해가 떨어지기 전 캠핑장에 도착했다. 바로 접수 데스크로 갔다. 마침 바로 앞에 서있던 남자가 예약을 취소했다. 알고 보니 그게 유일한 빈자리였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만약 자리가 없었다면 200달러 넘게 주고 허름한 숙소에서 잠을 자거나, 승용차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했을 거다. 캠핑장에는 모든 시설이 다 갖춰져 있었다. 온수 샤워장에 야외 영화관, 당구장까지 있었다. 온수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 텐트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아닌 것 같았다. 최소한 사람 크기의 무엇인가가 텐트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설마 곰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곧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손전등을 켜 마구 흔들고, 누군가는 냄비를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사람들이 우리 텐트 주변에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이스박스가 쓰러져 음료와 소시지, 야채 등 먹을거리가 흙과 뒤범벅이 돼 있었다. 곰은 그 와중에도 유기농 포도와 오렌지만 먹고 달아났다. 다음 날 먹으려고 아껴 둔 비싼 포도였다.

▲ 곰이 포도를 다 먹어버려 포도를 포장하는 용기가 비어 있다. © 황상호

우리를 구해준 캠핑족들은 신기한 경험이었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대개 남미 출신 대가족들이었다. “나도 곰 처음 봤어. 휘파람 소리 같아 누가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어.” “화장실에 가려는데 누가 서 있더라고. 그래서 쳐다봤는데 곰과 눈이 마주쳤어.” “이야, 여기 며칠 있었는데 곰은 처음이다. 뭐 재미있네!” 저마다 무용담을 풀어놨다. 캠핑장 직원이 곰이 나타날 수 있으니 음식물을 차에 넣으라고 사전에 주의를 줬지만, 주변에 텐트가 수백 개라 설마 곰이 나타날까 하고 방심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우리 텐트는 캠핑장 한가운데 있었다.

레이크 타호 북쪽을 여행하다 보면 애니메이션 피카추 모델인 새앙토끼(American Pika)를 만날 수 있다. 만화의 인기와 달리 서식지가 파괴돼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또 북쪽에는 캠프벨(Campbell) 온천이 있다. 킹스 비치(Kings Beach)나 스피드보드 비치(Speedboad Beach)에서 카약을 타고 20분간 노 저어 들어가면 호수와 맞닿은 작은 온천이 나온다. 개인 온천 리조트가 입구를 막고 있어 멀리서 카약이나 패들 보트를 타고 가야 한다.


** 황상호는 <청주방송>(CJB)과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한 뒤 LA 민족학교에서 한인 이민자를 돕는 업무를 하고 있고, 우세린은 <경기방송> 기자로 일한 뒤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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