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블랙머니’

TV광고에도 나오던 은행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중학생 때였다. 뉴스에서 연일 ‘론스타’를 언급했다. 외환은행이 외국에 팔린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내막은 몰랐다. 정지영 감독 영화 <블랙머니>를 보고 나서야 10년 넘게 지난 사건의 구조를 이해했다. 그때 우리는 왜 외환은행 매각 과정이 합법적으로 이뤄지는지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을까?

▲ 정지영 감독은 <블랙머니> 말고도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 등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우리 사회현실을 영화로 연출해 ‘사회파 감독’으로 불린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실화 모티브 영화는 보통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되,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야 한다. 영화는 ‘모피아’ 세력을 악당으로 묘사한다. 부패한 악당 권력은 살인까지 저지르며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반대편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사회적 영웅’도 자연스레 등장한다. 영화를 보고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허구라는 장치를 통해 현실의 깊은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8일 개봉한 <블랙머니>는 248만 관객을 기록했다. 2007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외환은행을 매각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200만 명 이상이 이 사건을 다시 떠올리거나, 처음 알게 된 셈이다.

론스타 ‘5조 원 ISDS 소송’ 누구 책임인가

‘론스타는 2012년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외환은행 매각 지연의 책임을 물어 5조 원대의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질 경우, 국민의 세금으로 물어야 한다. 이 사건은 진행중이며, 지금까지 구속된 사람은 없다.’ (블랙머니 엔딩 자막)

2003년 8월, 론스타는 외환은행 지분 51%와 경영권을 1조3800억 원대에 양도받아 대주주가 된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등은 론스타가 투기성 자본이라며 대주주 자격 허용에 반발했다. 그러나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투자자 구성을 알 수 없는 사모펀드가 한국의 은행을 인수하는 행위는 애초에 금감위가 제동을 걸 수 있는 사안이었다. 뒤이어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매각하려 했고, ‘먹튀’ 논란이 불붙었다. 금감위는 ‘먹튀’ 논란을 철저히 검증해야 했다. 외환은행노조가 금융당국에 론스타를 철저히 감사하라고 시위까지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그 외침은 무시됐다. 새 정부는 ‘외국인 투자유치’라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다.

별종 검사 ‘막프로’와 관객의 분노

영화 속 ‘대한은행’은 외환은행, ‘스타펀드’는 론스타펀드다. 국제결제은행(BIS)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리거나 투자하는 은행에게 지키도록 규정한 자기자본비율을 누군가가 조작해 대한은행이 스타펀드에 헐값으로 매각된다. 영화는 이 행위를 금융 범죄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정경유착’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자초지종을 아는 금융감독원 차장과 대한은행 직원이 고위급에 의해 타살됐다는 정황도 제시한다. 두 사람은 열애중인 관계였다.

이때 선량하고 정의로운 검사 ‘양민혁’이 등장한다. 그의 별명은 ‘막프로’다. 거침없이 수사하는 정의파 열혈 검사다. 그가 상대하는 모피아 세력은 전 총리, 은행장, 금감원장 등 금융계 핵심인사 카르텔이다. 검찰 중수부장은 차기 검찰총장직을 조건으로 수사를 덮으면서 이 카르텔에 가담한다.

▲ 양민혁 검사(조진웅 분)는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 금융 범죄라는 결정적 단서를 찾지만, 중수부장은 이를 활용해 전 총리와 검찰총장직을 거래한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실제 외환은행 자기자본비율은 영화보다 더 나쁘게 전망되기도 했다. 당시 변양호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은 금융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강석 외환은행장이 밝힌 자기자본비율이 5.4%에 불과했다는 게 근거다. 재경부와 금감위, 매각 자문사 관계자 등이 참석한 10인 비밀회의에서는 ‘매각’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양민혁 검사를 통해 금융 범죄 과정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론스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영화 개봉 이후, <블랙머니>를 비평하는 글이 여럿 나왔다. 사실을 ‘왜곡’했다는 평도 많았다. 그러나 영화가 사실을 충실하게 복원만 하면 되는 걸까?

양 검사는 경제 전문 검사가 아니다. 그는 권력층 범죄를 파헤치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권력층과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지 보여준다. 이 영화가 환기하고 있는 건 론스타 사건이 맞다. 그러나 ‘검은돈’을 만들어낸 건 권력의 ‘부패고리’다. 감독은 양 검사가 검찰 배지를 내팽개치고 노조 편에 서는 ‘판타지’ 같은 결말을 제시한다.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노’가 아닐까?

‘탐사보도’ 언론이 절실한 이유

영화 속 ‘뉴스탐사’는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다. 수사팀에 합류하지 못한 양민혁 검사는 언론사 취재 자료에서 모피아가 ‘돈세탁’한 정황을 파악한다. ‘뉴스탐사’는 그에게 페이퍼컴퍼니와 관련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양 검사는 ‘ICIJ’가 무엇인지 묻는다. PD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라고 설명하면서, 한국 탐사보도가 세계 꼴찌 수준인 탓에 ICIJ가 한국언론을 상대도 안 해준다고 덧붙인다.

<뉴스타파>는 2013년 ICIJ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했다. 그해 5월 21일 첫 결과물로, 조세피난처의 한국인이 최소 245명이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 속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도 포함돼 있었다. ICIJ는 전세계 40여 개국 80여 명의 탐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영화 속 PD가 한국 언론에 관해 자조하는 장면이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단독과 속보 경쟁에 매몰된 국내 언론사는 충분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탐사보도’에 소홀하다.

▲ <뉴스타파>는 탐사저널리즘으로 조세 정의를 실현하고자 2013년 ICIJ와 ‘조세피난처프로젝트’를 진행해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한국인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 ⓒ <뉴스타파>

<블랙머니>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여러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매각 사건을 심층취재한 MBS ‘취재수첩’이 방송을 못 하게 된다. 불방 항의에도 꿈쩍 않는 방송사 사장은 ‘권언유착’ 그 자체다. 스타펀드와 내통하는 전 총리는 인권변호사가 기고한 글을 보며 ‘무지’해서 노조 편을 든다고 말한다. “밤에 다 먹으면서 하잖아”라며 노조 단식투쟁을 폄하하는 대사도 나온다. 범죄에 가담하고도 “나는 믿는 사람”이라며 신앙심을 내세워 발뺌하는 금감원장 모습도 그려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의 권력자들과 겹친다.

<블랙머니>는 ‘검은돈’ 그 자체보다, ‘검은돈’을 만들어 낸 당시 권력층의 부패고리를 고발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그 고리가 도사리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 고리에 분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편집 : 정소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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