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옥상화가 김미경 ‘그림 속에 너를 숨겨 놓았다’

“나무는 ‘내 마음속 성황당’, ‘도시 속 성황당’ 같은 존재예요. 가까이 있는데 그냥 지나친 거죠. 눈여겨 안 보다가 들여다보니 삶 속에, 도시 속에 원시가 가까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이런 존재를 기억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나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그런 전시였으면 좋겠어요.”

지난 21일 저녁, 서울 경복궁 옆 서촌 전시공간 창성동실험실에서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59) 작가를 만났다. 이곳에서 18일 오프닝 리셉션을 시작으로 전시회 ‘그림 속에 너를 숨겨 놓았다’가 열리고 있다. 김 작가는 <한겨레>에서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기자로 일했다. 이후 뉴욕 한국문화원 기획담당,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을 지냈다. 2014년부터 전업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서촌 곳곳의 건물 옥상에서 그림을 그려 이름을 알렸다. 지난 전시회는 동네 곳곳에서 피고 자라나는 꽃과 풀에 집중했다. 2015년 2월 첫 개인전 ‘서촌 오후 4시’에 이어, 같은 해 11월 두 번째 개인전 ‘서촌 꽃밭’, 2017년 10월 세 번째 개인전 ‘좋아서’를 열었다. 이번 네 번째 전시회 주제는 ‘나무’다.  

▲ 김미경 작가가 미국 LA에 사는 딸을 지켜주는 나무를 그린 작품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최유진

‘나무’ 따라 가시리에서 LA까지 

“배경으로만 등장하던 나무를 이제야 주인공으로 그려봤는데 앞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요. 삶이 외롭고 힘들 때, 말은 못 해도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니까요. 나이 들수록 더 멋있는 게 나무 같아요.”

제주도, 강진, 경주, 포항, 괴산, 강릉… 그리고 딸이 사는 미국 LA까지. 김미경 작가는 지난 2년간 각지를 떠돌며 나무에 푹 빠져 지냈다. 2017년 가을부터 2019년 여름까지 그린 70여 점 그림들을 전시회에서 선보인다. 김 작가는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나를 자리매김하는 게 아니라, 이 멋진 나무들의 친구로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모진 세월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간직해 온 동백나무의 강인함이 전달되면 좋겠어요.”

이번 전시회 대표작은 <제주도 가시리 구석물당>이다. 구불구불한 가지와 검은 현무암 위에 꽃잎이 점점이 떨어진 모습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지난해 초 제주도 중산간 마을 가시리 구석물당에서 큰 동백나무를 만났다”며 “제주 4.3사건 당시 폐허가 된 마을을 수백 년 동안 보듬어 준 존재가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구석물당’은 제주어로 성황당을 뜻한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성황당처럼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나무들을 그렸다.  

▲ <제주도 가시리 구석물당> 2018~2019년, 펜&수채, 58×77㎝. 김미경 작가의 네 번째 전시회 대표작이다. ⓒ 아트펍

‘오늘도 걷는 사람들’을 위한 사실보도 

<오늘도 걷는다 3>도 이번 전시회 대표작이다. 플라타너스 가지가 드리워진 서촌 거리를 그렸다. 첫 전시회에 등장했던 <오늘도 걷는다 1, 2>의 2019년 버전이다. 세 작품 모두 경복궁 서쪽 영추문 앞에 앉아서 그렸다. 풍경과 걸어 다니는 전투경찰들의 모습이 도드라졌던 전작들과 달리, 길거리를 휘감아 도는 나무들에 초점을 맞췄다.

▲ <오늘도 걷는다3> 2019년, 펜, 70×116cm. 김미경 작가의 네 번째 전시회 대표작이다. ⓒ 아트펍

기자에서 화가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있는 대로 그린다는 건, 내가 보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죠. 처음엔 그런 생각도 했어요. 건물에 창문이 원래 여섯 개인데, 다섯 개만 그리면 사실을 왜곡한 그림이 되지 않을까? 몇 십년 뒤에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오해할까 봐, 있는 대로 다 그려내려고 했어요. 사실보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남아있었던 거죠.”

김미경 작가는 “내 그림도 소나무를 세밀하게 그렸다고 하지만 결국 내 눈에 보이는 부분만 그린 것”이라며 “완전한 객관 보도가 아니라 선택한 팩트를 쓰는 기사처럼, 내가 해석하고 길들인 걸 보여주는 게 그림”이라고 말했다.

“여러 편차가 있어서 똑 부러지게 말하긴 힘들지만, 큰 틀로 보자면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고 글은 머리로 쓰는 것 같아요. 대신 그림은 머리에 있던 걸, 글은 마음에 있던 걸 재료로 하는 거죠.”

김 작가는 "신문에 기사를 쓸 때 침대에 맞춰서 발목을 자르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며 “쓸 부분이 많은데 몇 장에 맞춰서, 1면 톱에 맞춰서, 박스에 맞춰서 가지를 다 치고 엑기스만 전달하는 훈련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미디어로 자리를 옮기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간추리는 훈련을 하고 보니 스스로 너무 힘든 거예요. 왜 이렇게 힘들까? 신문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생각했어요. 인간 마음속이나 인생사는 너무 복합적이고 엉겨 있잖아요. 그걸 다 어울려서 그리는 일이 저에게는 훨씬 자유로웠죠.”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의 전문성 쌓기 

김 작가는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한겨레> 기자 시절, 박재동 화백이 지도하는 사내동호회 ‘한겨레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다. 전업작가 생활을 결심한 계기를 묻자, 그는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절대 안 했다”며 “뭘 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천천히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창작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잖아요. 그래도 그 과정에서 나를 표현하는 게 뭘까, 내가 더 자유로워지는 길이 뭘까 하는 고민을 놓치지 않으면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김미경 작가가 지난해 11월 출간한 <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표지에 춤 그림을 실었다. ⓒ 최유진

이번 전시회에는 다음 작업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예고 작품들도 있다. 연작으로 그리고 있는 춤 그림들이다. 김 작가는 책 <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표지로 쓴 춤 그림을 소개했다. 그는 “쨍한 날에 비친 그림자를 그렸다”며 “날고 싶어서 새를 그렸다는 사람도 있고, 과거를 떨쳐버리고 싶은데 계속 끌고 가는 거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저는 상상하지도 않은 걸 사람들이 말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죠. 기사는 그렇게 쓰면 안 되잖아요. 저에게는 그게 버겁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좀 멍청하게 하는 게 훨씬 편해서 이 길로 온 것 같아요.”

▲ 김미경 작가가 자신이 사는 서촌에서 그린 나무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 최유진

생활이 빠듯한 건 자유의 대가

김 작가의 오른팔에는 빨간 꽃이 피어있다. 미국에서 살 때, 한 친구가 팔에 있는 빨간 점을 보더니 타투 같다며 예쁘다고 칭찬했다. 그 일을 계기로 3년 전 자신의 꽃 그림을 타투로 했다. 그는 “빨간 점이 창피했는데 그 마음에서 벗어났다”며 “숨기려 하기보다 다른 예술 형태로 표현하게 돼 좋다”고 말했다. 

“내가 혼자 해야 하니까 전시회 준비할 땐 사실 힘들어요. 어떤 건 버리고, 어떤 건 전시하고 팀 회의에서 그림 골라서 결정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근데 자유의 대가니까요. 평생 살면서 지금이 돈은 제일 적게 버는데 제일 자유로워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심플하게 사니까요.”    

▲ 서촌 창성동실험실과 가까운 ‘영추문 앞 역사책방’에서는 올 연말까지 ‘서촌옥상도2’(2014년 작) ‘오늘도 걷는다2’(2014년 작) 등 김미경 작가의 초기 작품 1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 최유진

이번 전시회는 다음 달 1일까지 열린다. 28일에는 김미경 작가와 함께 <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속 그림 찾아 떠나는 서촌 답사, 29일에는 커뮤니티댄스팀 ‘도시의 노마드’의 ‘그림과 함께 춤을’ 공연이 이벤트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서촌 창성동실험실과 가까운 ‘영추문 앞 역사책방’에서는 올 연말까지 김미경 작가 초기 작품 전시회도 계속된다.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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