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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복 왜 멀쩡해’ 가위질도 버텼다
[제정임의 문답쇼, 힘] 한국 영화 거장 임권택 감독
2019년 07월 27일 (토) 07:31:49 이자영 기자 delicious_12@naver.com

“그때는 반공을 고취한다고, 검열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잘라버리는 거예요. 항의해도 소용없고 다음 작품에 앙갚음 당할까 말조심해야 하고... 내 영화에 이북 탱크들이 막 몰려오는 장면을 찍었는데 인민군복을 너무 좋게 입혔다고 다 잘렸어요. 그런 검열을 당하면서도 통제를 벗어나려는 노력들을 그때는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검열이 없는데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고 오직 흥행을 생각해서 앞에 ‘터진’ 영화의 아류들을 만든다고 할까...”

1962년 독립군을 다룬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후 <서편제> <취화선> <장군의 아들> 등 모두 102편의 작품을 연출한 임권택(83) 감독이 25일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에 출연해 영화 인생을 회고했다. 1919년을 한국 영화사의 시작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한국 영화 100년을 대표하는 감독 1위’로 선정하기도 한 그는 흥행만 추구하는 최근의 영화 제작 풍토와 스크린 독과점의 폐해 등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투자자 ‘입맛’ 맞추느라 다양성 못 살리는 영화계

   
▲ 임권택 감독이 1976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에서 ‘인민군복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해당 장면이 가위질(필름 삭제) 당했던 일을 회고하고 있다. ⓒ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

임 감독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등 군부독재 시절에 ‘말도 안 되는’ 검열을 당하면서 영화인들은 ‘자기 스스로 검열관이 될 정도로’ 억압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통제 속에서도 ‘가위질(필름 삭제)’을 피해 창의적인 영화를 만들려는 노력 또한 치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시절과 비교할 때 경제도 커지고 검열도 사라진 지금은 창의적인 영화가 쏟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돈 대는 사람들(투자자)의 기호에 맞춰서 만들고...돈의 노예가 된 건지, 자본주들의 요구에 순응하고 있는지...모르겠어요.”

임 감독은 흥행 가능성 있는 소수의 영화가 전국의 상영관을 거의 독차지하는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서도 배급사와 극장이 이권만을 좇기 때문이라며 대기업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영화배급사와 극장체인 등) 대기업이 자기들의 욕심을 좀 줄이고 흥행은 안 되더라도 우수한 영화, 작은 영화들이 관객과 접촉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그래서 관객들의 영화적 시야를 좀 더 고급스럽게 바꿔 나가고 (작은 영화들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 던질 만큼 영화를 좋아해야 살아남아

임 감독은 영화를 찍는 모든 장소를 직접 찾아가 광선까지 점검하고, 촬영 당일에는 항상 스탭·배우들보다 한 시간 먼저 현장에 나가 카메라 각도를 고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감독은 전 스탭을 통솔해야 하는데 그것이 명령으로 되는 세계는 아니다”며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이 정말 작품에 다 걸고 열심히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 일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인가, 자기를 온통 투사할 수 있는 정열이나 정신이 있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정말 영화가 좋아서 다 던지고 살고 있는가를 물었을 때 의심스러우면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덧붙였다.

   
▲ 임권택 감독은 영화지망생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영화에) 다 던지고 살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

그는 (회사의 요구 등으로)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 대신 억지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고 생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적 정서 물씬한 영화들, “평생 할 수 있어 행복”

임 감독의 작품 중 <씨받이>는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신혜수)을,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받았다. 또 <취화선>이 2002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그의 작품은 국제영화계의 호평을 받았고 한국 영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그는 “과거 국제영화제에 나가면 작품 대신 검열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어떤 작품 세계를 추구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한국인이 갖는 정서와 한국 사람이 살아낸 얘기를 담아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특히 판소리를 소재로 한 <서편제>의 경우, 첫 영화를 발표한 직후 들었던 우리 소리에 매료돼 30여 년 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저예산으로 촬영했는데,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서울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는 등 의외의 인기를 모았다고 회고했다.

임 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초반 50여 편은 ‘삶과 무관한 이야기를 허겁지겁 만든 쓰레기’이며 “완성도에서 만족스런 영화는 아직 한 편도 찍지 못했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어서 인생이 행복했다고 털어 놓았다.

   
▲ 임권택 감독은 “완성도에서 만족할 만한 영화는 한 편도 못 만들었지만 한 번도 (이 길을 택한 것에 대해) 갈팡질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SBS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

“긴 세월을 영화 속에 한결같이 빠져서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영화를 통해 뭔가 큰 것을 얻어서가 아니고,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에 미쳐서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행복한 것이죠. 뭐 안 되면 이것도 해봐야지, 저것도 해봐야지 하는 갈팡질팡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인생이 이렇게 뉘엿뉘엿해지는 끝장에까지 그 일과 같이 끝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경제방송 SBSCNBC는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가 진행하는 명사 토크 프로그램 ‘제정임의 문답쇼, 힘’ 2019 시즌방송을 3월 14일부터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11시부터 1시간 동안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사회 각계의 비중 있는 인사를 초청해 정치 경제 등의 현안과 삶의 지혜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단비뉴스>는 매주 금요일자에 방송 영상과 주요 내용을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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