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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안식처’ 마지막 자유의 땅을 가다
[어서오너라 벗고놀자] 우세린 부부 여행기 ②
2019년 02월 22일 (금) 13:27:03 우세린 부부 homerunsery@gmail.com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활성화한 마그마 작용 덕분에 온천이 발달해 있다. 온천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온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의 온천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 주변에 온천 리조트를 지었다. 전현직 기자 부부가 이 지역 무료 자연 온천을 다니며 썼다.


존재하나 기록되지 않은 곳이 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남부 슬랩 시티(Slab City)다. 슬랩(Slab)은 흔히 아버지 세대가 말하던 회색 단열재인 ‘슬라브’와 같은 단어로, 다시 말해 이곳은 판자촌을 뜻한다. 빈자들의 공동체, 그들의 무료 노천 목욕탕인 슬랩 시티 온천(Slab City Hot Springs)을 찾아갔다.

슬랩 시티 온천은 행정구역 상 임페리얼 카운티 닐랜드(Niland)에 있으며 소노란 사막(Sonoran Desert)에 자리하고 있다. LA에서 남쪽 309km 지점으로 111번 하이웨이를 달리다 비포장 길인 빌 로드(Beal Rd)로 접어들면 나온다. 길가에 별다른 안내판이 없어 외지인들은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지역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기념품 판매 트럭 뒤쪽에 있으니 구글 지도를 ‘굳게’ 믿자.

   
▲ 왼쪽 멀리 슬랩 시티 지역 예술가들이 판매하는 기념품 트럭 뒤에 온천이 있고 오른쪽에는 방문객들 차량이 주차돼 있다. ⓒ 우세린 부부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명의 도시다.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10월, 미 해군이 북아프리카 공격을 위한 대공 포탄 훈련지 캠프 던랩(면적 2.6㎢)을 세운 뒤 1961년 부대를 철수하면서 폐허로 남아 있던 공간이다. 그 전후로 LA와 샌디에이고 등 미 전역에서 노숙자와 히피들이 몰려와 텅 빈 탄약고와 무기고, 목욕탕 건물을 점거해 살고 있다.

뜨거운 여름철에는 300여명이 거주하다가 겨울이 되면 따뜻한 곳을 찾아 온 장기 여행자들이 더해져 인구가 10배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카운티로서는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이곳이 골칫거리라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전기∙수도 시설이 없다. 쓰레기를 버릴 곳이나 더러운 물이 흘러가야 할 하수시설도 없다. 그 대신 군부대 맨홀과 각종 물탱크만이 고대 화석처럼 곳곳에 남아있다.

마지막 자유의 땅에서 보내온 우편물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차를 타고 마을을 지나가자 사막에 레저 차량이 듬성듬성 모여있다. 어떤 이들은 고급 레저 차량 앞에 파라솔을 쳤고 어떤 이들은 낡은 레저 차량 지붕에 판자를 덧대 햇볕 가리개를 만들었다. 버려진 레저 차량 상판을 모래에 박아 놓고 낡아 부서진 벽에는 두꺼운 종이 박스로 막아 둔 집, 인근 태양광 발전소 기자재를 나르던 지게차용 팰릿을 붙여 만든 누더기 집, 노아의 방주를 뒤집어 놓은 듯한 기하학적인 판자 집도 있다.

영화 '디스트릭트9'에 등장하는 세기말 모습이나 영화 ‘판의 미로’ 속 어둡고 괴상한 아우라가 풍기는 키치적 공간이다. 산악 전문작가 존 크라카우어의 논픽션이자 동명의 영화 ‘인투더와일드’(In To The Wild)에도 등장하는 곳으로 주인공 크리스토퍼 매캔들리스가 알래스카로 가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 이곳에서 10대 소녀와 짧은 사랑을 나눴다.

이곳은 히피들의 예술 공간이기도 하다. 눈길을 먼저 붙잡는 것은 길 따라 버려진 군부대 검문소다. 히피들은 검문소에 색색깔 래커 스프레이로 다양한 메시지와 그림을 그렸다. 슬랩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문구와 함께 ‘THE LAST FREE PLACE, ALMOST THERE’(마지막 자유의 땅, 곧 도착). 인생은 한번뿐(You only live once)이란 뜻의 ‘YOLO’(욜로), 외설적이란 뜻의 단어 ‘LEWD’를 써놓았다.

   
▲ 사막에서 자라는 키 작은 덤불을 사이에 두고 레저차와 폐차가 세워져 있다. 히피들은 이런 차량들에 래커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고 고물을 이용해 조형물을 만든다. ⓒ 우세린 부부
   
▲ 판자로 지어진 기하학적 집. 사막지대라 여름에도 그늘만 만들면 꽤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 ⓒ 우세린 부부

사막에 버려진 폐차에는 선풍기 날개 수십 개를 붙여 우주 로봇 괴물처럼 표현했고 어떤 차에는 크레파스 풍 원색을 칠해 레고 장난감처럼 만들었다. 마을 안 ‘버려진 곰 인형의 집’은 해가 지는 흐름에 따라 인형의 표정과 분위기가 바뀐다.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섬뜩하면서 가엾다. 마을이 마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거리는 시계 같다.

이곳이 세상에 점차 알려지자 장기여행자와 이 문화를 체험하려는 속칭 ‘슬래버(Slabber)’가 찾아왔다. 종말을 대비해 생존 훈련을 하는 서바이벌리스트(Survivalist)와 무정부주의자, 각종 예술가 등 괴짜들이 모였다. 작가 찰리 해일리는 자신의 책 ‘슬랩 시티, 마지막 자유의 땅에서 보내온 우편물(SLAB CITY, DISPATCHES FROM THE LAST FREE PLACE)'에서 1985년 기준 겨울철 주민 수가 6천명이었다고 기록했다.

주민끼리 논쟁거리가 발생하면 마을 이사회가 열려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간혹 신분을 속이고 숨어있는 도망자도 있다. 2016년 4월 뉴멕시코 주에서 여성을 목 졸라 죽인 40대 남성이 이곳에 은신해 있다가 석 달 뒤 또 다른 여성을 이 마을에서 총격 살해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 슬랩 시티를 걷다 만난 집. 대문과 안마당에 빨간색 하트 문양을 곳곳에 그려놨다. 집을 지나자 주인장이 초콜릿을 먹고 가라고 우리 부부를 불렀다. ⓒ 유순상 작가

유격훈련장 참호를 떠올리게 하는 온천

테니스 코트 크기의 온천은 진흙이 굳은 듯한 윤기 없는 거친 땅에 덜렁 있었다. 공사장 기초 작업을 위해 파놓은 대형 구덩이에 장맛비가 고인 모양새다. 온천 둘레도 콘크리트나 돌로 깔끔하게 마감이 돼 있지 않아 군부대 참호 같다.

   
▲ 군부대 참호 같은 슬랩 시티 온천. 겉보기에는 지저분했지만 눈 딱 감고 입수하면 제법 후끈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 우세린 부부
   
▲ 깊은 곳은 2m가 훨씬 넘을 듯한 온천. 바닥이 진흙이라 미끄러질 수 있으니 위험한 장난은 하지 않는 게 좋다. ⓒ 유순상 작가

물은 시멘트를 풀어 놓은 듯 짙은 잿빛이다. 유황이 흘러 계란 썩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온천 가장자리에는 수초가 동전만한 크기로 뭉쳐 있고 날벌레가 여기저기 빠져 죽어있다. 이것을 온천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뜨거운 물 웅덩이라고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마침 발가벗고 목욕을 하던 10대 후반 소녀도 아버지의 빛 바랜 하늘색 승용차를 타고 사막으로 사라졌다.

여긴 아니다 싶어 물에 손만 담그고 있는데 어디선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 백인 여성이 하얀색 호텔 가운을 입고 나타났다. 이름은 안드레아. 그녀는 온천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대뜸 “이곳에서는 원하는 사람은 옷을 다 벗고 목욕을 해도 돼. 나는 벗고 목욕할 거야”라고 말하더니 가운을 벗어 던지고 물에 들어갔다. 순간 눈을 어디 둬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비누칠도 온 몸 구석구석 은밀한 부분까지 대차게 했다.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갔다. 남편도 따라 입수. 온도는 36도로 제법 후끈했다. 더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니 물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유황 성분이라 물이 탁할 뿐 물 속까지 더럽지는 않았다. 온천 바닥에서 온천수가 보글거리며 계속 솟구쳐 작은 수로로 흘렀다. 수심 깊은 곳은 2m가 넘었다. 바닥이 진흙이라 미끄러지면 위험할 수 있다.

   
▲ 온천 바닥에 있는 진흙을 피부에 바르면 좋다고 해 남편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우세린 부부

안드레아는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소개했다. 대학을 다니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이곳을 알게 됐고 6년 전에는 완전히 이주를 했단다. 하는 일은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주고 다친 개를 치료하는 것. 물론 그도 채소 한 포기 기를 수 없는 사막에서 자급자족을 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한 달에 한 주 정도는 샌디에이고로 나가 돈을 벌고 지인들에게 개 사료 등을 기부받아 돌아온다.

“내가 거의 수의사나 마찬가지야. 이 마을 사람들은 다들 가난해서 개들에게 먹이를 줄 형편이 안 돼. 내가 사료를 주고 치료도 해주고 있어.”

슬랩 시티 온천은 수돗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곳에서 안드레아와 같은 가난한 독지가나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지역 예술가, 높은 집값에 허덕이다 해방구를 찾아온 노숙자들에게 안식처다. 누구도 입장료를 받지 않으며 비싼 차, 명품 옷을 입고 와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함께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다. 몸에 숨겨두었던 작은 상처까지 드러낸다. 시인 유하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처럼 이곳 온천은 허위를 씻어 낸다.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 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안드레아는 온천을 떠나기 전, 아침 9시에 5달러짜리 샌드위치를 파는 오아시스 카페, 정크아트로 유명한 이스트 지저스(East Jesus) 등 마을 명소를 알려줬다. 그는 또 “매주 토요일 해가 지면 슬랩 시티 나이트클럽인 더 레인지(The Range)에서 밴드 공연이 있다”며 “오픈 마이크로 왜 자기가 이곳에 왔는지 등 사는 이야기도 공유한다”고 추천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세상을 걷어찬 자들의 연대

   
▲ 구원의 산, 샐베이션 마운틴. 레오나드 나이트가 28년 동안 고무 페인트를 쏟아 부어 만들었다. ⓒ 유순상 작가

우리는 온천 욕을 끝내고 1.1㎞ 떨어진 구원의 산, ‘샐베이션 마운틴(Salvation Mountain)’을 찾아갔다. 샐베이션 마운틴은 미 동부 버몬트 주 출신의 레오나드 나이트가 36살에 종교에 심취해 이곳으로 온 뒤 종교 기념물로 만든 페인트 언덕이다. 처음에는 시멘트로 작은 기념물을 만들었는데 점차 커져 높이 46m짜리 대형 그림 언덕이 된 것이다. 투입된 시간만 28년, 쏟아 부은 페인트가 37만 리터다. 그는 청년 시절 한국전쟁에 징집돼 한국 땅도 밟았지만 열흘 만에 휴전이 되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거대 페인트 산에는 빨강색과 분홍색, 연두색 등 원색 페인트로 나무와 계곡, 각종 기호들이 그려져 있다. 정상에는 하얀 십자가가 2~3m 크기로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신은 사랑입니다(GOD IS LOVE)’라는 문구가 부조로 만들어져 있다. 또 아래에는 ‘예수여, 나는 죄인입니다. 제발 나에게 와 마음속으로 들어와 주세요’(Say JESUS I'M A SINNER PLEASE COME UPON MY BODY AND INTO MY HEART)라는 메시지가 같은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밖에 다양한 성경 구절이 여기저기 적혀 있다.

사실 임페리얼 카운티로서는 이곳이 눈엣가시였다. 세금도 안 내는 불온한 자들이 정부 땅을 불법 점거해 개발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교 시설물이라 쉽게 부수지도 못했다. 카운티가 세운 전략은 환경 문제를 제기해 철거하는 것. 카운티는 1994년 독소 전문가를 고용해 주변 환경 조사를 했다. 결과는 납 성분 환경 기준치 초과. 카운티는 바로 철거 수순에 들어갔다.

   
▲ 샐베이션 마운틴 주변에는 폐차 등을 이용한 정크 아트가 많이 배치돼 있다. 성경 구절이 많이 적혀 있다. 사진작가와 종교인들이 많이 찾는다. ⓒ 우세린 부부
   
▲ 현재는 동명의 비영리단체인 ‘샐베이션 마운틴’이 고무 페인트를 쏟아 부으며 보수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우세린 부부

주민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역 예술가와 종교인이 연대해 여론전을 벌이며 타 지역 민간단체에 환경조사를 다시 의뢰했다. 다행히 납 성분이 환경 기준치 미만으로 나왔다. 수성전에 성공. 나이트는 이후에도 이곳에 머물며 여러 작품을 만들다 2014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샐베이션 마운틴이라는 같은 이름의 시민단체가 유지보수작업을 한다.

샐베이션 마운틴 바로 아래 판잣집에 살고 있는 활동가 론은 “오전 10시쯤 사람들과 모여 보수작업을 한다”며 “여기를 더 크게 만들 수는 없고 매일 무너진 곳에 지푸라기를 짚어 넣고 페인트를 채운다”고 했다. 론은 샐베이션 마운틴을 오르는 방문객에게 종종 고함을 친다. “그쪽은 올라가는 길이 아니에요! 언덕에 앉아 있으면 안 돼요! 페인트가 다 무너져요!” 론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차에서 내려 마을을 둘러 다니다 보니 하늘이 금세 어스름해졌다. 햄버거도 사먹을 겸 안드레아가 추천한 나이트클럽 ‘더 레인지’에 갔다. 늙은 기타리스트가 기타 줄을 튕기고 한 중년 여성은 하모니카에, 또 다른 남성은 탬버린을 친다. 노래는 슬랩 시티 주민인 마이크 브라이트가 만든 ‘슬랩 시티 송’(Slab City Song). 그들은 빠른 템포의 연주에 맞춰 “우리는 여기가 좋아,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We like it here and we ain't going back)를 함께 불렀다.

노인 20명이 긴 의자에 앉아 음악과 밤공기를 즐기고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 드레드 머리를 한 청년들은 뒤편 의자에 앉아 마리화나 파이프에 불을 붙인다. 조끼 차림의 정체 모를 중년 남성들은 오른쪽 허리띠에 장도를 차고 공연을 지켜본다. 목줄 풀린 개들은 청중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고 무대에 올라가 나른한 기지개를 켠다.

   
▲ 공연장이자 마을의 유일한 나이트 클럽인 레인저. 햄버거를 팔며 술은 외부에서 사서 가져와야 한다. ⓒ 우세린 부부

두 번째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한 여성이 올라와 드럼 스틱을 들었다. 주변에서 그의 이름을 외친다. “안드레아! 안드레아!” 낯익은 이름. 낮에 온천에서 같이 목욕한 금발 여성이었다. 안드레아의 드럼 실력이 출중하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은 그녀에게 환호를 보냈다. 읊조리듯 부르는 가수의 노랫말은 고요한 사막에 퍼지고 어느새 어둠의 커튼이 발 밑까지 내려왔다. 내 옆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빠-안히 바라보던 동네 개는 결국 내 햄버거를 차지했다. 객석도 어느새 활기가 넘친다. 이들은 세상에 낙오된 걸까, 아니면 스스로 세상을 걷어차 버린 걸까?


** 전 <경기방송> 기자이자 LA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고 있는 우세린 씨 부부가 캘리포니아 중남부 자연 노천 온천을 돌아다니며 글을 썼다. 충주에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유순상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편집 : 윤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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