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쟁이 방송쟁이] KBS 스포츠하이라이트 이정화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 연세대 화학과 대학원에서 한 여학생이 라디오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중계를 들으며 실험을 하다 교수에게 혼쭐이 났다.

“실험하는데 왜 이렇게 딴 생각이 많은가. 자네는 화학 외에 관심 갖는 게 너무 많아.”

▲ 이정화 KBS 스포츠기자. ⓒ 정혜정
지도교수와의 공동연구로 대학원 2학기 차에 해외 유명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등 촉망받는 화학도의 길을 가던 그는 ‘온 신경을 화학에만 쏟아야 교수가 될 수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에 적잖이 상심했다. 야구를 좋아하던 아버지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야구를 보며 ‘삼진 아웃’ ‘볼 넷’을 외쳤고, 대학시절엔 소프트볼 동아리에서 활약했던 그에게 ‘야구 사랑’을 버려야 하는 학자의 삶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경제적 형편이 나빠져 유학을 가기 어렵게 되자, 그는 1999년 가을에 대학원을 그만뒀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6개월여의 방황 끝에 어린 시절의 꿈을 떠올렸다. ‘야구선수를 인터뷰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평생 후회하지 않으려면 도전을 해 봐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2000년 3월부터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사들은 응시연령에 제한을 뒀다. 만 26세였던 그에게는 2000년이 시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인 손석희 전 아나운서(성신여대 교수)의 사진을 걸어 놓고, 야구장에 가서 선수들을 인터뷰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SBS, 한겨레, 문화방송(MBC), 중앙일보 등 여러 언론사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다 그해 12월 한국방송(KBS) 스포츠기자 시험에 합격, 꿈을 이뤘다.

이정화 기자(38)는 KBS에 입사한 뒤 6개월간 경찰서를 출입하며 사회부 사건기자로 훈련을 받은 뒤 2001년 9월부터 지난 6월까지 스포츠부에서 10년 간 취재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지금은 제작부 소속으로 KBS 2TV ‘스포츠하이라이트’에 출연하고 있다. 취재기자 생활 첫 1년은 축구와 배구 담당이었고 마지막 1년은 빙상, 피겨, 역도, 수영, 골프, 핸드볼 등 생활 체육과 장애인 체육을 맡았다. 그 중간의 8년은 야구와 농구를 전담했다.

 ▲ 이 기자가 KBS 2TV <스포츠하이라이트>에 출연해 스포츠 소식을 전하고 있다. ⓒ KBS 홈페이지

야구 '마니아'와 스포츠 '기자' 사이

야구 ‘마니아’인 그지만 야구장에서 일하는 게 늘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감독과 선수를 만나서 주변 취재를 하고 경기를 보면서 게임의 승부처가 어디였는지 맥을 짚어요. 경기가 끝나면 수훈 선수와 감독을 인터뷰하고 홍보팀 등 주변 취재를 한 뒤 기사를 쓰죠. 보통 스포츠뉴스가 시작 됐을 때 야구경기가 진행 중일 때도 많기 때문에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늘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일하러 갔을 때는 야구를 즐길 수가 없어요.”

모든 걸 잊고 좋아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고 싶지만 일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이 기자는 대신 주말이나 휴가 때 무조건 야구장으로 향한다고 말했다. 자녀가 없는 맞벌이 부부라 틈만 나면 남편과 함께 야구를 보러 간다고.

 ▲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화 기자. ⓒ 정혜정

야구선수들 만큼이나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장에 많이 드나들어선지 취재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두산베어스 내야수 손시헌(31)을 꼽는다. 그는 첫 만남에서 손 선수가 대성할 재목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고 한다. 

“두산베어스가 2004년 일본 쓰쿠미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였어요. 신인 선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한 선수가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뛰어오더라고요. 심한 감기로 훈련에도 빠지고 누워 있었는데 인터뷰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는 거예요. 2003년 8월 두산베어스 연습생으로 들어온 손 선수에게 방송사 인터뷰는 놓칠 수 없는 큰 기회로 보인 거예요. 얼굴이 정말 안 돼 보였는데, 끝까지 괜찮다며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인터뷰하던 게 인상 깊었어요. 결국 국가대표 유격수에 두산베어스를 대표하는 타자가 되더군요.”

이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도 야구선수 이승엽(35·일본 오릭스)이다.

“지난 2006년 이승엽 선수를 취재했을 때 이 선수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오바이트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도대체 얼마만큼 힘들면 토할 것 같을까 하는 궁금증에 저도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올해로 4년 째 하고 있는데 이제는 선수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전 제 몸을 만들기 위해서 훈련하지만 선수들은 이걸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고 생각하니 존경심도 생기고 그들의 고통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는 ‘스포츠를 좋아 하고, 많이 알고, 할 줄 아는 것’을 스포츠 기자가 갖춰야 할 자격요건으로 꼽았다. 경기에서 졌을 때 얼마나 분한지, 선수가 재활치료를 끝내고 다시 경기장에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면 선수들과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기자는 ‘스포츠를 좋아 하고, 많이 알고, 할 줄 아는 것’을 스포츠 기자가 갖춰야 할 자격요건으로 꼽았다. ⓒ 정혜정
스포츠기자로 일하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갖는 편견에 화가 날 때도 있다고 한다. 지난 6월, 해체 위기에 몰린 용인시청 핸드볼팀에 대해 취재하던 중 용인시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9시 뉴스 끝자락에 방송되는 거면 직원으로 충분하지 시장까지 인터뷰할 필요가 있나’하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스포츠뉴스를 폄하하는 태도였다. 같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스포츠 기자는 고민이 필요 없고, 이겼다 졌다만 보도하는 사람들이니 기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낮춰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고 한다. 이런 편견들은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에 대한 생각 자체가 왜곡된 탓이 크다는 게 이 기자의 의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둘 중 하나만 뛰어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선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운동까지 잘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운동선수는 운동만 하도록 교육시스템이 자리 잡혀 있어요.”

당장의 성적보다 균형잡힌 교육 시스템으로 선수들 길러내야

KBS 스포츠뉴스가 기획 방영한 <2010 학교체육 새로운 시작>시리즈는 한국과 일본의 운동부 교육시스템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었다. 연세대, 고려대와 일본 명문대인 와세다, 게이오 대학의 야구부 졸업생 취업률을 비교해보니 연고대 졸업생 14명 중 절반이 취업을 하지 못하고 ‘백수’로 지내는 반면, 와세다, 게이오 두 대학의 졸업생 73명은 전원이 취업에 성공했다. 그 중 언론사나 공기업에 취직한 경우도 30명이 넘었다. KBS 스포츠뉴스는 한일 대학 야구부 취업률의 이 같은 차이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시스템 유무에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 학생들의 체육 학습권과 운동부 선수들의 공부에 대한 학습권,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KBS 스포츠가 앞장서서 바꿔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KBS 스포츠뉴스가 기획 방영한 <2010 학교체육 새로운 시작>시리즈 중 '한일 대학 야구부, ‘극과 극’ 취업률' 편. ⓒ KBS 홈페이지 
이 기자는 우리 스포츠계의 ‘승리 지상주의’에도 유감이 있다. 지난 5월, 2011년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 여자 46kg 이하급에 출전한 국가대표 막내 김소희 선수(17)는 16강전에서 상대방의 발차기를 막다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뼈가 삐져나온 부상이어서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손가락 신경이 마비될 수도 있다’며 출전을 만류했다. 하지만 김 선수는 아픔을 참고 시합을 강행했고 남은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한국에 대회 첫 금메달을 선사했다. 김 선수를 취재한 이 기자는 당시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고 회고했다.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손가락 마비쯤은 무시해도 될 만큼 금메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승리지상주의에 빠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국이 대회 나흘째까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상황에서 이 친구가 어떻게 그만 둘 수 있었겠는가 이해도 되고요.”

그는 당시 언론에서 ‘부상투혼’으로 미화할 수 있었지만 1등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한국 스포츠 현실에 답답함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이 기자는 “공영방송의 스포츠기자로서 우리 스포츠계의 문제를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고, 체육이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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