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공감’

▲ 오수진 기자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 백혈병 등 반도체사업장 질환에 관한 지원 보상 문제를 매듭짓고 두 손을 맞잡았다. 노동자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이다. 자기 사업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려 숨진 노동자를 오랫동안 외면한 삼성, 사업장을 안전하게 관리·감독할 책임이 없다며 가난한 노동자들을 보듬어주지 않은 국가(근로복지공단), 그리고 피해자. 이 3자간 분쟁은 처음부터 보편적 가치를 향했다면 조금 더 빨리 합의를 이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맞닿아 이야기를 나누고 뒤늦은 사과를 받기까지 피해자는 늘었고, 그들의 아들딸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뉴요커> 기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행을 저지르는 동기가 없어도 결과적으로 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세에 따르는 것이 악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평범한 사람조차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반인류적인 줄 알지만 사회와 집단이 규정하는 ‘상식’에 맞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상식’이고 ‘정당한 일’인 셈이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화해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안도감보다 세계적 기업 삼성이 그동안 기업 논리에만 매몰돼 노동자를 대하는 사회적 책무를 너무 가벼이 여겼다는 점을 재확인하기 충분했다.

▲ 악을 행하려던 동기는 없지만 우리 사회는 공감이 결여된 채 행해지는 악이 존재한다. ⓒ jtbc 뉴스

베른 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 한나가 이를 증명한다. 소설은 ‘전범세대’ 상징 인물로 나치 시대에 순응하는 ‘문맹(文盲)’ 한나를 그린다. 그는 재판에서 유태인 학살 범죄를 지적하는데도 자신은 직업이 간수여서 수용자를 가뒀고,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맹인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유대인 학살에 동참하는 서명을 했고, 시키는 대로 일했다. 오로지 수감자 방을 비우기 위한 목적으로 수감자에게 죽음을 지시한 주인공.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고 쉽게 행동했다.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청소년들의 집단 왕따 문제나 어긋난 직업윤리에 따르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그 예다. 또 검·경 수사기관이 범행 증거물들을 당사자에게 돌려줄 때 행정편의로 성범죄 등 피해자의 실명과 주소까지 그대로 드러낸 채 관보에 올리는 걸 보면 국가도 공감이 결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악을 행하려던 동기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편에 서서 생각해보는 과정을 배제했고, 단순히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는 어긋남이 없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무심코 악을 행했다. 공감이 무뎌진 사회에서 공분이 앞설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일상성에 묻혀 ‘누구나 다 이러는데, 나 하나만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는 지시 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등의 이유로 이타적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마저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상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는 언제든 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왜 우리는 상식에 감동하는가?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점을 숙고해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황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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