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소희

‘보고 싶은 걸 보고, 그만큼만 안다.’ 영화 <오! 수정>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을 이렇게 뒤집는다. 한날 한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은 서로를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남자는 ‘여성스럽고 차분한 그녀’만, 여자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모는 부유한 그’만 안다. 보고 싶은 상대방의 모습만 기억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매사가 그렇다. 한진중공업 사태와 희망버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억도 제각각이다. ‘기업 경영이 어려우면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는 이들은 200여 일째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내려올 때라고 말한다. 희망버스 방문 때 밤새도록 시민과 경찰이 대치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영도 주민, 휴가철 대목을 앞둔 상인들의 반대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본 김진숙과 영도는 또 다른 모습이다.

▲ 7월 9일 오후, 전국에서 모두 195대의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로 향했다(위), 만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역 광장 집회에 참가했다. ⓒ 안세희

분노.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처음 목격한 것이다. 400명의 정리해고를 감행하며 회사는 “지난 2년 간 영도조선소는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업계 사정도 예전과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지은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는 잘 나간다. 규모만 세계4위다. 값싼 노동력 등 좋은 여건 덕분이라지만, 내부적으로 일감을 몰아준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전체 노동자의 20%를 내쫓은 다음날, 회사는 주주들에게 174억원을 배당하고 임원들의 연봉을 50% 인상했다. 의혹의 눈덩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설령 아니라 해도, 선박 수주는 배를 만드는 노동자들 몫이 아니라 파는 사람, 곧 경영간부들 몫이다. 자본은 철저히 책임은 피하고, 이익은 챙겼다. 사태 해결을 위해 열린 청문회에서조차 진실을 외면했다. 회장이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정중하게 호소’한 것도 컨설팅회사 지침에 따른 위선이었다. 진정성 없는 그의 ‘호소’는 평범한 회사원, 교사, 대학생들을 계속 희망버스에 오르게 한다.

그들이 한진중공업 사태를 통해 본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온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던 일상은 전체 국민소득 수준이 더 낮을 때 풍경이니 어찌된 영문인가? 한없이 경쟁에 내몰리면서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 일하는 사람의 절반 가량이 비정규직인 현실은 불안을 일상화했다. 부실한 사회안전망은 불안을 더욱 키운다. 아무리 일해도 자식들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고, 노부모 모시는 것도 큰 짐이 된다.

공공보험 보장률이 낮아 민영보험 가입은 필수인 세상이다. 안정한 삶을 꾸리는 데 필수조건이 바로 ‘직장’이다. “해고는 살인”이라 외치는 농성자들, 35m 상공에 매달려 “조합원들에게 일상을 돌려 달라”는 김진숙에게서 사람들은 봤다. 그들은 평범한 삶을 보장받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희망버스에 몸을 싣고 영도와 서울을 찾게 하는 ‘외부세력’은 바로 ‘공감’이었다.

‘분노’와 ‘공감’을 보지 못하면 희망버스를 알 수 없다. 이미 파업이 끝났다는 말이나 희망버스가 아니라 주민 괴롭히는 ‘훼방버스’라는 비난으로 달리는 버스를 멈추기 어렵다. 그들이 영도에서 목격한 분노와, 해고자의 눈물에서 느낀 공감을 알아야 한다. 이제 <알자지라> <CNN> <BBC> 등이 다룰 정도로 한진중공업 사태는 세계가 주목하는 사건이 됐다.

▲ 박소희 기자
한진중공업은 더 이상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문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시민들의 불안한 삶을 안정시키고 몰염치한 자본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힐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한진중공업 문제 해결은 그 첫 단추다. ‘빨갱이, 외부세력, 훼방꾼’으로만 희망버스를 보면 답이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만큼만 서로를 알고 이해했던 <오! 수정>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어정쩡하게 끝난다. 세상은 영화와 다르다. 엇갈린 시선과 기억은 갈등의 골을 깊게 하고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한다. 국가의 노력이, 법과 제도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 희망버스는 서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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