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우리 말과 글을 아끼는 사람들

572년 전 조선의 세종대왕이 ‘온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만들고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 9일, 누구보다 감회가 각별한 사람들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말살 정책’도 이겨냈지만 외국어와 인터넷 신조어 등의 홍수 속에 쓰임새가 혼탁해지는 한글을 걱정해온 ‘우리말 지킴이’들이다. 특히 이건범(53) 대표를 비롯한 한글문화연대 회원들과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 이수열(90) 소장의 한글사랑은 남다르다.   

법정 공휴일 지정 되살린 한글문화연대 

지난 2000년 ‘우리 말과 글을 아름답게 가꾸자’는 뜻으로 500여 시민들이 뭉친 한글문화연대는 어려운 한자와 외국어가 뒤섞인 공문서, 표지판 등 우리 사회의 잘못된 언어 사용을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 왔다. 1991년 법정 공휴일에서 빠졌던 한글날을 되돌리는 운동을 펼쳐 2013년 재지정을 성사시킨 것도 이 단체다. 한글문화연대는 이 해부터 한글날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시민 꽃 바치기 행사’를 열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9일에도 참여를 자원한 시민 100여명이 오전 11시부터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꽃 바치기 행사에 나섰다.

▲ 한글문화연대는 9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시민 꽃 바치기 행사’를 열었다. ⓒ 한글문화연대

“우리말과 글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쉽게 써야 합니다. 외국어 능력이나 학력 등에 관계없이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해요.” 

이건범 대표는 8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한글문화연대가 ‘정부 공문서 쉽게 쓰기’ 등에 힘을 기울여 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00년부터 이 단체의 운영위원으로 일하다 2012년 9월 대표를 맡은 뒤 서울 시내버스의 로마자 표기 없애기,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막기 등의 국어시민운동을 이끌어왔다.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 한글문화연대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감옥살이를 했던 그는 “법률용어와 같은 중요한 말이 어렵게 쓰였을 때 인권을 짓밟을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어운동에 전념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핵심의제를 둘러싼 좌우 진영의 논리 구조를 설명한 책 <좌우파 사전> 기획자이기도 한 이 대표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던 중 ‘도끼 상소’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글날 공휴일 지정에 반대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에 항의하기 위해, 2012년 10월 서울 대흥동 경총 건물 앞에서 도포 차림에 갓을 쓰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든 채 1인 시위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도끼로 내 목을 치라’고 했던 것처럼,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눈이 나빠져 현재 시력장애 1급의 중증장애인이다. 하지만 동공의 옆면을 통해서만 겨우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처지에서도 특수 키보드로 원고 작업을 하는 등 한글사랑 활동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어령의 글쓰기도 ‘첨삭’한 원칙론자

“국어교육을 뜯어고쳐야 해요. 국어교사를 양성하는 대학교수들 수준도 형편없어요.”

47년간 국어교사로 일하다 정년퇴임한 뒤 신문기사나 칼럼 등에서 잘못된 우리말 표현을 찾아 바로잡는 일에 25년째 몰두하고 있는 이수열 소장은 지난 6일 서울 은평구 통일로 자택에서 <단비뉴스>와 만나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준 높은 국어교육이 있어야 시민들이 우리말을 올바르게 사용할 텐데 국어교과서 마저 외국어투에 물들었다”며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이 6일 서울 은평구 통일로 자택에서 <단비뉴스>와 만나 “국어교육이 제대로 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 조현아

지금까지 2만 통이 넘는 ‘첨삭’ 편지를 필자들에게 보냈다는 이 소장은 소문난 글쟁이의 하나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칼럼에 훈수를 두었다가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1993년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이 전 장관의 칼럼에 대해 ‘영어나 희랍어 등 외국어를 너무 많이 써서 어지간한 독자들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전 장관은 다음 칼럼에 “필요 이상으로 순혈을 고집하는 바람에 한국말을 오히려 빈혈에 걸리게 하는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이 소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그는 수십 년 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일할 때 교과서에 외국어투 표현이 남발된 부분 등을 표시한 뒤 이를 인쇄해 교육부에 보낸 적이 있다. 하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고 한다. 이 소장은 “프랑스는 1975년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법’을 공표해 광고와 게시물뿐만 아니라 언론 매체에서도 영어 단어 사용을 금지했다”며 “이는 프랑스인이 시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프랑스어로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을 ‘국어보호법’으로 바꾸고 일본어투, 영어투 같은 외국어 번역투를 금지하는 등 구체적인 규제와 처벌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지나치게 과거의 기준에 매달리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물론 말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외국어를 우리말에 끼워 넣어서 달라지는 건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특히 신문방송에서 우리말을 쓸 수 있는 표현도 외국어로 쓰고, ‘~로부터’ 같은 영어 번역투나 ‘~에 있어서’ 같은 일본어 번역투를 남용하는 것은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편집 : 최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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