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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 주스 찾지 말고, ‘음료’나 마셔!”
[현장] 시각장애인 울리는 점자 사각지대
2018년 04월 28일 (토) 22:23:52 권성진 기자 sungjin1312@naver.com
   
▲ 한 시각장애인이 전철역에서 안내견을 데리고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많이 확충되고 있으나 정작 일상생활에서는 점자 표기가 제대로 안 돼 있거나 불충분해 많은 불편을 겪는다. ⓒ 플리커

시각장애인 ㄱ씨는 목이 말라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도 음료 자판기를 사용할 수 없다. 자판기에는 점자가 없어 작동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작동방법을 안다 해도 소용이 없다. 무슨 음료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편의점에 가도 혼자 계산대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점원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음료수 냉장고로 가지만 좋아하는 음료를 골라 살 수 없다. 음료수 캔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를 해 놓은 것이 많지 않고, 해 놓은 것도 콜라나 주스 같은 자세한 이름 없이 ‘음료’로만 표시돼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음료수 이름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지만 그마저도 음료수 캔이 둥글게 휘어 있어 잘 인식이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점원을 불러 주스를 찾아 달라고 하면 찾아 주기는 하지만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예 주스 마시기를 포기하고 슬그머니 돌아 나오는 때가 많다.

ㄱ씨는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주스니 콜라니 가리느냐, 그냥 아무거나 마시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고 했다.

화학약품에 잘못 코 댔다가 기관지 크게 다쳐

음료수는 마시는 걸 표기하면 되지만, 그게 약품이나 화학제품이면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어 조마조마해진다. 다른 시각장애인 ㄴ씨는 약국에서 약을 사서 집으로 오면 약을 바로 분리해서 다른 상비약과 뒤섞이지 않게 해놓는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 먹는 약이 다를 때가 많은데 그때는 약사에게 아예 다른 봉투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다.

냉장이 필요한 물약은 냉장고에 넣어 두는데 어디 넣어 두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아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가족 중 누군가를 불러 도움을 청해야 한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음료수와 약병이 구분이 안 되고 헷갈릴 때가 많아 엉뚱한 것을 꺼내 마셨다가 급하게 내뱉는 일도 있다.

간단한 상비약은 편의점에서 사고 싶어도 무슨 약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 곤란을 겪는다. 일부 소화제만 드물게 종이 포장지에 점자 표기가 돼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 약품에는 점자 표기가 돼 있지 않다. 그래서 ㄴ씨는 집에 오면 바로 약병이나 음료수 캔 등에 점자 스티커를 붙여 표시해 놓는다.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데도 한번은 세면용품과 세제를 혼동해 큰 낭패를 당했다. 샴푸나 린스 락스 등은 플라스틱 용기가 다 비슷해서 코로 냄새를 맡아 구분을 하는데, 다른 화학약품에 코를 갖다 댔다가 기관지를 상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시각 장애인 숫자는 2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 점자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은 약 17만 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특수 안경을 쓰거나 보조기구를 이용한다. 이렇게 많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나 보드블록, 음성방송 같은 보조 편의수단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정작 시각장애인들이 매일 곁에 두고 사용하는 생활도구, 편의용품, 음료수, 약품 등은 여전히 시각장애인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다.

“최소한 먹고 마시는 것은 구분하게 해줘야”

   
▲ 시중에 판매되는 음료수 캔 중 점자 표기가 돼 있는 일부 제품들. 이처럼 점자 표기가 돼 있는 제품은 많지 않지만 표기된 음료수는 전부 ‘음료’라고만 돼 있다. ⓒ 권성진

시각장애인이면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으로 일하는 김훈(46)씨는 “일상생활에서는 아직도 시각장애인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캔 음료수 하나 마시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점자 간격도 틀린 것이 많고 질감도 엉망이라 그마저도 잘 식별이 되지 않아요.”

실제로 시중에 팔고 있는 캔음료수를 확인해보니 모두 같은 점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김씨는 “화학물질이나 의약품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락스와 세제, 샴푸를 후각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는데 호흡기 건강에 아주 위험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또 “시각장애인 중 고혈압과 당뇨가 있는 사람은 약을 면밀히 확인해서 먹어야 하는데 점자 표기가 돼 있지 않아 오복용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캡슐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촉감으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시각장애인이 이런 생활 가까운 곳에서의 불편을 해소해 달라는 민원을 연합회에 많이 제기해 정부나 국회 등에 해결을 촉구하고 요청했지만 별 진전이 없다고 한다.

   
▲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상비약 중에는 일부 제약회사 소화제에만 점자 표기가 돼 있고 나머지는 표시가 없다. ⓒ 권성진

“점자 새기는 데 25원, 업체들은 강제사항 아니라 무관심”

음료수 캔이나 세면용품, 화학제품, 의약품 제조회사들은 점자표기 의무가 없다며 무관심하거나 외면한다. 한 대형 음료수업체의 소비자센터 관계자는 전화 인터뷰에서 “법적으로 권고사항일 뿐,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의약품 회사 관계자는 “점자 표기를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른 제약회사 관계자는 “의약품 기본법이 발의돼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은 언론을 통해서 보았다”며 “향후 추이를 지켜보고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음료수 캔에 점자 표기를 하는 데는 그리 큰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음료생산 업체들은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대형 음료수 생산업체에 캔을 납품하는 업체 관계자는 “캔을 백만 개 이상 제작하면 구체적인 내용을 표시해도 캔 하나당 25원 정도면 된다”고 말했다. 그게 부담이 된다면 음료 캔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도 있어 할 의지만 있으면 방법은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 이야기다.

시각장애인연합회가 이런 방안들을 포함해서 해결책을 국회의원들과 정치권에 요청했지만 이뤄진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연합회 김훈 연구원은 “매번 국회의원들이나 정부관계자들이 와서 이야기를 듣고 가지만 일시적”이라며 “국회의원도 가고나면 무소식이고 공무원들은 이동이 잦아 일이 진전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점자 표기 의무화 법안은 국회에서 잠 자

정의당 윤소하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이 이번 국회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심의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건강기능법’ 17조 3항과 47조 1항 6호를 신설하고, ‘약사법’의 59조의 2항과 98조 1항을 신설해 의약품과 식료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놓았다. 현행법상 권고 사안에 그치고 있는 것을 의무조항으로 바꾸는 법안을 발의해놓았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윤소하 의원실 공석환 비서관은 “이견이 있는 사안이라 상임위에서 심사되고 있지 않고 있다”며 “통과가 쉽지 않을 거 같다”고 말했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등 제약업계는 점자 표기 의무화에 반대한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명건국 홍보차장은 “환자들이 약포지 형태로 약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용기 포장보다는 전문가의 지도가 실용성이 있다”며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이 부분을 강제하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편의점에서 파는 긴급 의약품에 대해서는 저희도 점자 표기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모든 의약품이나 음료수 또는 화학제품의 용기에다 전부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데는 이견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각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불편을 덜고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거나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 시각장애인들의 음료수나 의약품 사용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점자표기 의무화 관련법이 국회에 발의돼 있으나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 국회홈페이지

편집 : 박경난 PD

[권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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