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준석

▲ 이준석 기자
씨름의 묘미 중 하나는 덩치가 작은 선수가 저보다 훨씬 큰 상대를 모래판에 메다꽂는 통쾌한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 지긋한 씨름팬들은 지난 83년 4월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결승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씨름 중계방송의 시청률이 최고 61%까지 올라갔던 당시, 경기가 열린 서울 장충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몸무게가 92kg에 불과했던 한라급의 이만기가 120kg을 넘는 백두장사 이준희, 홍현욱을 차례로 제압하고 제1회 천하장사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스포츠칼럼니스트 박동희에 따르면 씨름은 ‘역칠기삼(力七技三)’이라고 해서 몸집에서 나오는 힘이 7, 기술이 3을 차지하는 경기라고 한다. 두 선수의 체중 차이가 30~40kg 이내면 안다리걸기, 잡채기 등 여러 기술로 힘의 불균형을 좁히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만기처럼 기술이 뛰어난 선수가 몸집이 훨씬 큰 상대를 넘어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몸무게가 50kg 이상 차이가 나면 ‘역구기일(力九技一)’, 즉 힘이 90%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기술로 뒤집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만기 이후 한국 씨름계가 선수들의 덩치를 키우는 데 집착하면서 쇠퇴일로를 걷게 된 것은 더 이상 ‘기술이 낳는 기적’을 보기 어려워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씨름의 쇠퇴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닮아 있다. ‘역구기일’이 우리의 산업생태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덩치를 키운 대기업, 특히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재벌그룹의 막강한 영향력 앞에서 중소기업들은 ‘비장의 기술’로도 어찌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5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지난 4년간 306개나 늘어나 현재 778개에 달한다. 이 중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등 10대그룹의 2010년 현재 자산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75.6%에 이른다. 55개 대기업집단 가운데 공기업을 제외한 민간 기업집단들의 당기순이익은 지난 4월 기준 78조원으로 전년보다 67.7%나 급증했다. 재벌들의 덩치가 쑥쑥 커지고, 이윤도 쑥쑥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대기업들의 몸집 불리기가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중소기업영역 침해와 기술탈취, 하도급 횡포 등 불법과 편법을 통해 경쟁 중소기업을 넘어뜨리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영역까지 침범해 막대한 이익 본 대기업, 국가가 개입해 규제해야

경제개혁연대 부설 경제개혁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9개 재벌그룹 총수 일가 190명은 최근 수년간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로 10조 원에 가까운 이익을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 계열사들이 일감을 몰아준 회사는 주로 과거에 중소기업들이 먹고 살던 산업 영역에 진출했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사업이다. 기업 내부의 사무용품 등 소모성 자재 구매를 대행하는 기능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2000년 전후에 여러 대기업들이 앞 다투어 계열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그룹 계열사는 물론 1,2,3차 협력업체와 공공기관 납품까지 차지하면서 지난 3년간 중소 MRO업체들의 매출액은 2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대로 두면 중소 MRO들은 갈수록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역구기일’의 현장이다.

재벌 계열사들이 진출한 광고업계에서도 중소업체들이 말라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한다. 재벌 광고회사들이 계열사의 광고 물량을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수주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외부 광고까지 흡수하면서 중소광고사들은 뛰어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도 광고수주를 위한 프리젠테이션(발표) 기회조차 따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현재 국내 광고대행사 총 취급액 순위 10위권 안에는 외국계 대행사 2곳을 제외한 8개가 모두 재벌 계열 광고회사들이다. 이들은 약 8조원에 이르는 국내 광고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들은 이대로 망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우리 헌법 제119조 2항은 ‘강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허용하고 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게 그 내용이다. 다시 말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국가가 적정한 규칙을 만들고 심판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재벌 계열사간의 부당한 내부거래를 규제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하도급 횡포를 막는 임무가 이미 공정거래위원회에 주어져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금까지 제 역할을 해주었다면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재벌 계열사의 급성장과 경쟁 중소기업의 몰락이 이처럼 심각한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정위는 ‘물가 전쟁’의 전위대로서, 설렁탕집 가격 담합 조사 따위에 더 힘을 쏟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공정위가 ‘독과점 폐해의 해소와 공정한 경쟁 촉진’이라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 할 일을 해야 한다.

스포츠 경기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규칙과 엄정하고도 민첩한 심판의 역할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 우리 경제에는 규칙을 제대로 만들고 공정하게 집행하는 국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국회는 과도한 경제력집중을 막을 수 있는 법을 만들고, 행정부는 엄격하게 적용하고, 사법부는 위반 행위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재벌의 지나친 경제력집중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몰락 등 경제 양극화를 심화할 뿐 아니라 정치 부패와 언론 장악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현실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반면 경제력집중이 완화되고 중소기업이 공정한 기회를 얻게 되면 경제 전반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이 살아나면서 성장 잠재력이 커질 것이다. 전체 일자리의 90%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잘 되면 고용창출과 노동자처우 개선을 통해 경제의 활력이 높아질 것이다. 한라장사 이만기가 덩치 큰 백두장사를 이길 수 있는 씨름판처럼, 한국 경제도 ‘역칠기삼’의 산업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