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군중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으로 제주4.3사건의 발단이 됐다.

3.1절 28주년이었던 1947년 3월1일, 제주도내 곳곳에서 기념 집회가 열렸고, 집회 이후 군중들은 시가 행진을 하며 가두시위를 했다. 이 와중에 제주시 관덕정 앞 광장에서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 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1년 뒤 제주4.3사건의 기점이 됐다. 3.1절 발포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3.1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집회 후 시위군중이 미 군정청이 있는 관덕정 앞을 지날 때였다. 제주경찰서를 향하던 기마경관이 어린이를 치고도 그냥 방치하고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항의하는 도민을 향해 경찰은 발포했고, 시위를 구경하던 6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이때부터 경찰은 ‘3.1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탄압에 들어갔다. 시위를 이끈 간부와 학생들이 대거 끌려갔고, 유치장에선 구타와 고문이 잇따랐다. 미군정과 경찰의 강경책은 민중의 분노를 야기했다. 급기야 3.10 총파업 투쟁(민간을 제외하고도 166개 공공기관·단체에서만 41,211명 참여)으로 저항의 불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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