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기름때가 꾸덕꾸덕 묻어 있는 아버지의 무거운 작업복을 손으로 눌러 빨았다. 아버지는 철도 정비창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고장 난 열차도, 집 안 보일러도 새 숨이 붙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손끝이 신기했다. 그래서 소년도 아버지 곁에서 나무 깎는 문구용 칼로 모형 비행기며 군함 따위를 만들었다. 그 소년이 이제 육십 줄에 접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목각인형이 쥐어져 있다. 팔과 다리, 머리 등에 줄을 매달아 조종하는 인형인 마리오네트를 국내에서 매우 드물게 제작하는 작가이자 가족 인형극단 <보물>의 대
“윤성규 환경부장관은 당장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지난 2일 비정부기구(NGO)인 푸른아시아가 정부의 미세먼지 대책을 비판한 논평의 한 구절이다. 푸른아시아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1998년 창설된 단체로, 몽골·미얀마에서의 나무심기와 사막화방지 등 다양한 환경보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 단체가 평소와 달리 격앙된 논평을 낸 것은 ‘미세먼지 책임을 고등어와 삼겹살 구이, 경유차에 돌린’ 정부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로의 푸른아시아 사무실에서 오기출(56) 사무총장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에요. 검찰 수사로 이 문제가 지금이라도 조명 받는 것은 다행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사회 전체와 언론이 이제 와 검찰이 흘린 정보에 집중하는 게 우습게 느껴지죠.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이며 제대로 된 언론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지난 2011년 무렵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해 대다수 언론은 최근까지 침묵했다. 기껏해야 짤막한 단신 기사로 내보낸 정도였다. 그러다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하자 앞다투어 요란한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지난 2
서민금융전문가.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9번으로 당선돼 30일 제20대 국회 임기를 시작한 제윤경(44) 의원을 오래 따라다닌 직함이다. ‘금융’ 하면 재테크부터 떠올리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서민금융이란 생소한 분야를 10년 이상 파고들었다. 지난 2007년 사회적 기업 에듀머니를 설립해 저소득층의 재무상담을 맡았고, 2012년 채무자단체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을 만들어 채무자 인권보호 활동을 벌였다. 2014년에는 시민들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장기 악성채권을 없애고 빚을 탕감해주는 ‘한국판 롤링주빌리 운동’을 시작했다. 지난해 8
봄에 태어난 아이, 춘희는 엄마가 덮어 준 이불 아래 늘 누워있다. 유릿가루처럼 반짝이는 아침 햇살과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왕버들도 창 너머로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아빠는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엄마가 실종된 아빠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그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다. 1945년 8월이었다. 춘희는 엄마 뱃속에 있었다. 엄마가 본 세상은 하얗게 불타 검게 바스러졌고, 춘희는 구겨진 몸으로 태어났다. 재일조선인 원자폭탄 피해자의 아픔을 담은 그림동화책 <춘희는 아기란다>에 담긴 이야기다. 지난달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누가 맞고 틀리는지 판단하기보다는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속 시원한 답을 주기보다는 의문을 던진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기보다는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세월호 재판 기록 15만쪽과 3TB 분량의 동영상을 토대로 697쪽의 책을 쓴 사람들, 그중 한 사람인 박다영(28)씨를 지난 1일 재단법인 '진실의 힘' 사무실 앞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출신이기도 한 그는 후배들에게 '누구보다
4.13 총선을 앞둔 지금, ‘청년’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목마른 주제다. 20·30세대를 위한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을 지난 2년간 이끌어 온 김민수(26) 위원장은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는 심정으로 총선 유권자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20여 개 청년단체가 연합한 유권자단체 ‘총선청년네트워크(총청넷)’이 그 추진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청년유니온에서 노동운동을 해온 그에게 청년정치와 노동운동은 삶의 일부다. 2010년 창립된 국내 최초의 세대별 노조인 청년유니온에는 만15세부터 39세 사이의 청년들이 취업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충북 청주시 수동 수암골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마을이다. 지금은 70, 80대 노인들이 주로 사는데, 다 합쳐야 60여 가구 남짓이다. 지난 2007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리면서 관광객이 찾아오고, 인기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등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그 덕에 마을에 고층 커피숍도 들어섰지만, 여전히 독거노인이 숨진 뒤 수십 일 지나 발견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관광객 중에는 함께 온 아이들에게 “공부 안 하면 이런 데서 사는 거야”라고 훈계하는 이도 있
아담한 키에 머리가 약간 벗겨진 남자가 미닫이문을 젖히고 살그머니 소극장 밖으로 나온다. 무대에서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모스부호(Morse code)처럼 끊어졌다 이어진다. 남자는 잡초가 듬성듬성한 흙바닥을 빙빙 돌다 낡은 벤치에 앉더니 말간 하늘을 바라본다. 아내인 박연숙(41) 자계예술촌 대표가 성폭력 피해여성을 소재로 한 1인극을 공연하는 동안, 밖에 나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박창호(53) 예술감독의 모습이다.지난해 10월 17일과 31일 두 차례 찾아간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마을의 자계예술촌은 눈 감고도 계절이 느껴
충북 제천시 고암동의 한적한 주택가. 옥수수, 조, 감자, 고구마 등이 자라는 넓은 텃밭 옆에 꽃과 그림으로 아기자기 장식된 벽돌 건물이 ‘제천기적의도서관’이란 간판을 걸고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지상 1층, 지하 1층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강정아(47) 관장과 직원 6명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제천의 ‘북스타트’ 운동을 이끌고 있는 강 관장을 지난 6월 만난 데 이어 18일 전화로 추가 인터뷰해 지난 10년간 ‘책 읽는 아이들’을 키워온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도서관을 찾아갔을 때 강
“(제게) 잘 맞는 일을 찾은 덕분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자신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볕 좋은 창가에서 해사하게 웃는 출판편집자 겸 작가 김민채(27)씨에게서 진심으로 일을 즐기는 사람의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여행과 예술분야의 책을 주로 내는 북노마드에서 3년차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그녀와 지난 5월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데 이어 17일 온라인 메신저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출판사에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삶은 어떤지 궁금했다.
“엠부테!”연보라색 셔츠와 회색 정장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30대 후반의 남자가 링갈라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인사를 건넸다. ‘엠부테’라 쓰긴 했지만 첫음절은 ‘음’과 ‘엠’ 사이 어딘가의 소리라 우리말로 정확하게 적을 길이 없다. 링갈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 남자의 이름은 프레디 피오피오.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지금은 고향에서 1만2142킬로미터(km)나 떨어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산다.중앙아프리카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은 곧잘 ‘아프리카의 심장’이라 불린다. 넓은 국토, 비옥한 토양, 풍부한
“아이고, 오래 기다렸죠. 여기가 제 작업실이에요. 제자가 운영하는 카페 2층을 빌려 쓰는 거죠.”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의 조그마한 공정무역 커피가게에서 서해성(55) 작가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카페 2층이 통째 그의 작업공간이었다. 기자가 처음 찾아갔던 지난 5월 15일 오후에는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이 꽃과 선물을 챙겨왔고, 그가 관여하는 평화박물관의 직원들이 문서 작업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5평(약 15㎡) 남짓한 베란다에는 진돗개 세 마리가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었다. 2층 구석에 있는 8평(약 24㎡) 남짓
2년 전 가을 끝자락이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사람이 살까 싶은 마을에 도착했다. 해가 떨어져 어둑한 마당에서 낮은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불빛과 함께 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숲속작은도서관’의 김병록(52) 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사정이 있어 인터뷰가 어렵다고 말했고, 기자는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건네 준 막걸리만 들이켠 뒤 다락방에서 밤을 보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살림집에 민박도 겸하는 동화 같은 공간 탈핵, 평화, 공동체 회복 등 ‘개념 있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던 그 도서관은
지난해 6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경남 밀양 주민들의 농성장을 밀양시가 행정대집행을 통해 강제 철거한 후 ‘할매 할배들의 투쟁’은 잊혀졌다. 공무원 200명, 경찰 20개 중대 2000명, 한국전력 직원 250명이 동원된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70, 80대의 ‘어르신 투사’들은 울부짖으며 무참하게 끌려나왔다. 그해 말 한전은 신고리~북경남 변전소 송전선로 구간에 765킬로볼트(㎸) 송전탑 161개 건설을 완료했다. 이 중 69개가 밀양에 세워졌다. 긴 싸움 끝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주민들은 지난 15일 창원지방법원에서 업무방해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안타깝게 헤어졌던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는 속편 <비포 선셋>에서 9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다. 프랑스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이 서점은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영미문학의 큰 별이 된 작가들이 파리 여행 중 숙식하며 서점 일을 돕고 글을 썼던 장소로 유명하다. 대전시 중구 대흥동에 있는 도어북스(door books)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지향하는 서점이다. 책 제작부터 유통까지 작가가
지난 2012년 4월 선출된 19대 국회의원 300명 중 30대는 3%에 불과했다. 출마자격은 25세 이상이지만 20대는 단 한 명도 없고 40대가 27%, 50대 47%, 60대 23%였다. 그나마 각 당이 청년 비례대표 제도를 도입해 30대 의원들이 주목받으며 등장했지만, 기성정치의 프레임 속에서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젊은이들 스스로 정치를 바꿔보자며 등장했던 청년당은 0.34%의 실망스런 득표와 함께 간판을 내렸다.지난 4월, 원내 제3당인 정의당의 천호선 당시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의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