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프롤로그 – 여기에 사람이 산다① 발암물질에 포위된 마을② 불덩이와 냉동고의 집③ 사라진 가축과 스러진 사람④ 오래된 가난의 삶 두 시간 간격으로 하루 여덟 번 버스가 다녔다. 마을은 종점이었다. 경북 경주시 천북면 신당3리. 경주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사람의 흔적이 드물어질 때까지 40분 남짓 달려 ‘희망마을’에 도착했다.차량방역소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화물트럭이 도로를 훑으며 지나갔다. 높이가 3미터(m)쯤 되는 방역소는 마을 안과 밖을 나누는 관문처럼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마을을 오가는 차량을 주시하는 ‘가축방역
가난의 문턱아픈 무릎을 이끌고 빗물을 받으러 나왔다. 문턱이 산 같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음이 나왔다. 집 앞을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이마의 땀이 턱 끝까지 내려왔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붉은 양동이를 옮겼다. 구름 낀 하늘이 어두운 게,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받은 빗물은 화장실에서 쓸 생각이었다.최순이(88·가명) 씨는 아홉 살에 고아가 됐다. 가난이 싫어 일찍 시집을 간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그는 손과 발이 자꾸 부어 병원에 갔다. 의사는 몸에서 나균이 나온다고 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둘 사이엔 어린 아들
전신 35%의 화상을 입었다. 4년 전 관리자로 일하던 프랜차이즈 고깃집에서 불이 났다. 불은 눈 바로 앞까지 널름거렸다. 천장에서는 기름기 섞인 불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소화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미 불은 눈 바로 앞까지 번져 있었다. 보경 씨는 가게에 갇혔다. 화장실로 피했다. 가만히 있어야 할지,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밖에서는 119나 구급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는 죽겠다 싶었다. 몸에 물을 적셨다. 걸레 삶는 용도로 쓰던 스테인리스 냄비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두 달 정도 혼수상태
광주광역시에 사는 이정선(57·가명) 씨에게는 3년째 은둔 중인 아들이 있다. 둘째 권준성(20·가명) 씨다. 이 씨 부부와 세 형제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 51평짜리 아파트에서 권 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3평 남짓한 자신의 방에서 보낸다. 하루에 한두 번 화장실과 주방을 갈 때만 방에서 나온다. 배고플 때는 라면이나 냉동식품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다. 한동안은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어머니 이 씨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요즘에는 그마저도 끊겼다. 소통 단절로 오해만 쌓여가족은 은둔 청년과 가장 가까운 타인이다. 안정과 지지를
선천성 연골무형성증으로 현재 키는 133.8센티미터(cm). 가족 중에 저신장증을 가진 이는 민석 씨가 유일하다.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다. 1년간 키가 자라면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 보일 거라는 어머니의 뜻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휜 다리를 교정하고 키를 늘리는 수술을 받았다. 길을 가다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이 손가락질할 때도 많았다. 민석 씨는 “피해를 끼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남에게 부탁할 일이 많다 보니 미안함이 그늘처럼 드리워 있다. 불편할 만한 상황은 미리 피하려고 한다. 선천성 연골무형성증에 합병증으로 뼈가
10년째 틱 증상을 보이는 뚜렛 증후군 환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 으! 음!’ 소리를 내는 음성 틱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목을 꺾거나 어깨를 들썩이는 근육 틱도 생겼다. 스트레스로 편두통과 혓바늘이 끊이지 않는다. 학창 시절엔 동급생들에게 욕설을 듣거나 구타를 당했다. 억양이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였다. 그때 당했던 괴롭힘을 따라 하는 틱이 생겨 종종 상대를 공격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기 싫은 하민 씨는 숨어서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만화를 그리는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생긴 틱은 밝고 활발한
은둔 탈출에는 촘촘한 단계가 필요하다. 회복 속도에 따라 다른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둔 청년이 고립되는 집에서는 가정방문 상담이 필요하다. 은둔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 학교에서는 교사의 대응이 중요하다. 3년 이상 길게 은둔한 청년에게는 전문기관의 도움도 필요하다. 지원의 법적 근거가 되는 조례 제정과 법률 통과도 중요한 과제다.1단계: 가정초기 단계에 있는 은둔 청년은 일반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 이상 가족 이외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 일체를 거부하거나 소수의 관계만 유지한다. 가족과도 소통을 끊는 일이 있
여기 두 사람의 '이리나 마치쉐브스카'가 있다. 26살의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씨는 할머니의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의 이름을 맏딸에게 붙였다. 같은 이름의 할머니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씨는 올해 81살이었다.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머니 이리나 씨는 지난 8일 숨졌다. 러시아 군이 발포한 포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지 나흘 뒤인 12일 오후, 손녀는 서울 성북구 월곡동의 어느 카페에 앉았다. 그가 일하는 직장 근처였다. 꿈을 좇아 먼 나라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손녀를 할머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새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다 싶은 순간, 우크라이나 제95공수여단 중위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먼저 머리, 가슴, 팔, 그리고 다리를 만졌다. 그것이 아직 몸통에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안도의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귓속을 찢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겨우 눈을 들어 주변을 보았다. 숨을 거둔 채 널브러진 동료들이 있었다. 검은 연기도 보였다. 목구멍이 조여져 숨쉬기 힘들었지만, 냄새를 맡았다. 뜨거운 화약 가
지난 1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민족, 문화, 언어를 없애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언어 교사를 찾아내 학살하고 있다고 말했다.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를 <단비뉴스>가 취재했다. 23살의 그는 이름과 은신 지역이 드러나 러시아 군의 표적이 될 것을 염려했다. 이에 따라 이 기사는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적었다. 은신하고 있는 도시는 A시라고 적었다.23살의
지난 3월 26일 <단비뉴스>는 우크라이나 제95공수여단 중위 데느스 안티포우(Denys Antipov) 씨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의 부대는 3월 9일 러시아 무인항공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여러 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데느스 씨는 허리에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군 병원에 입원중인 그는 <단비뉴스>와 다시 인터뷰했다. 4월 1일부터 2주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줌(ZOOM) 화상회의와 온라인 메시지 등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단비뉴스>에 이야기했다.팔다리를 잃고 병원 복도에 누운 군인들데느스 씨는 빠른 부대
알미라 텐(Almira Ten) 씨(60)는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비좁은 차를 타고 있다. 손녀를 무릎에 앉힌 채 창밖을 걱정스레 살핀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포탄 소리에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깬다. 알미라 씨는 3월 21일,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며느리, 손주 3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남편 유리 리(Yuri Li) 씨(67)는 아직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다.
지난 4월 14일, 여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람이 있다. 이름은 장진영, 나이는 42살, 직업은 프리랜서 사진가. 프리랜서 사진가 장진영 씨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국 언론인 가운데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취재했다.나중에 한국 외교부의 허락을 받은 기자들이 2~3일씩 현지 일부 지역을 취재한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현지 체류 기간과 취재지역은 장 씨의 경우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전쟁 발발 9일 뒤인 3월 5일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Przemysl)을 거쳐 우크라이나로 들어간 뒤, 보름 동안 전쟁 현장을 직
지난 3월 26일 오후 2시 서울시 노원구 상계3·4동 수락산 자락 별빛마을에 사회복지재단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의 자원봉사자 100여 명이 모였다. 초등학생을 동반한 50대 부부와 대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연령대의 봉사자들은 초록색, 자주색 등의 조끼를 입고 3.6킬로그램(kg)짜리 연탄 대여섯 장씩을 지게에 진 채 언덕길을 올랐다. 이들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 곳곳에 녹이 슬고 벽에는 낡은 판자가 덧대어 있는 집들을 돌며 연탄을 배달했다. 1965년 서울 청계천 철거민들이 산림청에서 가구당 10여 평 임야를 대여받아 정착한 별빛마을에는 무허가주택이 대다수고, 150여 가구 중 44가구가 아직 연탄을 땐다.
6.3%. 2018년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당선된 지방의회 의원 가운데 청년 정치인의 비율이다. 40살을 넘지 않은, 20대와 30대 기준이다. 이들의 인구 비율인 26.2%에 한참 못 미친다. 20대 의원만 따지면 더 심각하다. 전국 17개 시도의회 가운데 서울과 대전, 울산, 경남 4곳에만 20대 정치인 한 명 혹은 두 명이 진입할 뿐이었다.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치가 다원화되고,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적 이해관계는 복잡해진다. 취약계층은 다양해지고, 특히 사회주도층이던 청년이 ‘삼포세대’가 돼 갈수록
청년 정치인은 정치권 진입도 어렵지만, 진입 뒤 의정 활동을 펼치기도 쉽지 않다. 1977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캔터 교수의 ‘임계수치(Critical Mass)’ 이론에 따르면 소수자가 집단 안에서 15%를 넘지 않으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어렵다. 청년 의원이 지방 의회에 진출하더라도 한두 명에 불과하다 보니 청년 정책을 추진하기 쉽지 않고, 정치인으로 인정받기보다 그저 청년으로 주목된다는 장애물도 가지고 있다. 충북 청주시의회의 유일한 2~30대 청년인 유광욱 의원은 ‘나 홀로 청년정치’로는 청년이 가진 문제를 풀어
지난달 1일 오전 8시 경북 영주시 휴천동 강원연탄. 200평 남짓한 공장 안에서 연탄을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고, 시커먼 석탄 가루가 뿌옇게 흩날렸다. ‘시끄러운 음악 수준’인 84데시벨(dB) 이상의 소음이 내내 귀를 괴롭혔다. 출하 대기장에서는 연탄 소매업자 10명이 갓 나온 연탄들을 3.1톤(t) 트럭에 싣고 있었다. 1972년 문을 연 이 업체는 2018년까지만 해도 하루 최대 8만 장까지 연탄을 생산했지만, 현재는 2만~3만 장 정도로 생산량이 줄었다. 매출액은 연 40억 원 정도인데 재고 물량과